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잎새달 / 권현숙

잎새달 / 권현숙 아파트 그림자에 갇혀 웅크렸던 누옥이 기지개를 켠다. 잎샘 꽃샘 다 물러가도록 쉬지 못한 내복들 채 헹궈지지 않는 독거의 냄새를 풍기며 사월의 볕살 아래 나른하게 흔들린다. 급변하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버티기가 어디 쉬울까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던 이웃들 하나 둘 아파트 숲으로 떠나버리고 외딴 섬으로 남은 누옥의 주인장 끓여댔을 가슴속 켜켜이 쌓인 외로움을, 재롱스런 푸성귀들이 얼마쯤은 달래주기도 하려나. 빛이 밝을수록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는 남루 새것과 낡은 것의 극명한 대비 도드라지는 경계를 지우려 텃밭은 점점 더 푸르러진다.

좋은 시 2021.05.02

신문/유종인

신문 신문 ―유종인(1968∼ )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 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 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아무래도 굴풋한 날 당신이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핏물이 밴 활자들 신문지 째로 건넬 때의 그 시장기가 좋다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 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대보는..

좋은 시 2021.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