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밥숟가락/이사라

밥숟가락 ㅡ이사라(1953~). 식탁 위에 놓인 밥숟가락이 한 덩이씩 생을 담고 나를 기다려요 아주 조그만 한 입의 생은 제 목이 멜 때까지 나를 기다려줘요 차지게 서로 뭉치면서 사는 밥알들처럼 세상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반쯤 둥글게 몸을 웅크리며 나는 살아가요 밥숟가락 안의 생은 모든 것을 반원이거나 둥글게 만들죠 한 덩이씩의 생이 어쩌다가 움푹 파인 구덩이에서 잘못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죠 하나씩 밥술 놓고 떠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도 밥숟가락은 나를 기다려줘요 (…) 그래요 밥숟가락이 봉분이 되고 당신들 무덤이 세상의 밥숟가락이 되어 나를 기다려줘요 ■ 밥숟가락은 생명의 알레고리. 세상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있는 것도 밥이 경전이기 때문. 또한 시인은 밥숟가락에 소복이..

좋은 시 2021.05.19

소리 씨앗/김명수

소리 씨앗 김명수 늙은 호박 하나, 한아름이다 덤불이 메마르자 형상이 드러났다 누런 겉껍질 흉터도 있다 소리는 어떻게 숙어졌나 목젖 떨림이 잦아지면서 가랑비에 소나기 스며 있다 천둥 번개도 잠재웠으리라 구린내도 오랫동안 품어왔으니 그렇다면 구린내도 소리가 되고 한줄기 소변도 시원하리라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들었다 소리는 이제 없고 소리 씨앗만 주름진 흉중에 품고 있어라 ―김명수(1945~ ) 서 있는 나무들, 언덕을 기던 넝쿨들, 파랗던 풀잎들 모두 시들어 갑니다.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지났으니 식물들의 한해살이는 그쳤습니다. 울타리 너머 덤불이 시들자 한아름이나 되는 호박 하나가 반가운 손님처럼 와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나서 세상에 나오지 않은 듯이 한 생을 완성한 모습에 흉터와 ..

좋은 시 2021.05.19

호박/이승희

호박 ― 이승희(1965∼ ) 엎드려 있었다지, 온 생애를 그렇게 단풍 차린 잎들이 떨어지며 는실난실 휘감겨와도 그 잎들 밤새 뒤척이며 속삭였건만 마른풀들 서로 몸 비비며 바람 속으로 함께 가자 하여도 제 그림자만 꾹 움켜잡고 엎드려만 있었다지. 설움도 외로움도 오래되면 둥글어지는 걸까 제 속 가득 씨앗들 저리 묻어두고 밤낮으로 그놈들 등 두드리며 이름도 없이, 주소도 없이 둥글게 말라가고 있었다지. 늙은 호박을 잡아 그 둥글고 환한 속을 본다 사리처럼 박힌 단단한 그리움. 왜 세상의 많은 엄마들은 엄마가 됨과 동시에 둥근 얼굴과 둥근 체형으로 변해 가는 걸까. 젊었을 때 날카로운 턱선, 샤프한 눈매의 남자들도 아빠가 되면서 푸근푸근 둥글어 가는 걸까. 엄마가 더 엄마가 될수록, 아빠가 더 아빠가 될수록..

좋은 시 2021.05.19

헌 집 /김윤배

헌 집 ―김윤배(1944~ ) 바람이 혼자 산다 바람처럼 드나드는 그녀는 발소리도 말소리도 없다 바람을 먹고 사는 바람꽃이 찾아오는 날은 그녀를 떠나 있던 물 긷는 소리도 오고 밥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온다 헌 집은 소리들, 미세한 소리들로 차고 기운다 후박나무 그림자가 더욱 길어지고 그녀는 후박나무 아래서 바람을 더듬는다 바람의 여린 뼈가 만져진다 그녀는 주름투성이의 입술을 문다 후박나무 잎새들이 검게 변한다 헌 집이 조금씩 산기슭으로 옮겨간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문학과지성사, 2007) 헌 집은 늙은 개 한 마리와 바람과 후박나무 그림자와 함께 산다. 헌 집에는 없는 게 많다. 눈이 침침하니 보이는 게 적고, 귀가 어두우니 화날 일이 없다. 이가 빠졌으니 먹을 게 적고, 발음이 부정확하..

좋은 시 2021.05.18

서늘함/신달자

서늘함 ―신달자(1943~ ) 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 없다 지팡이 하나 세우는 데 큰 뜰이 필요 없다 마음 하나 세우는 데야 큰 방이 왜 필요한가 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 쌀 한 톨만 한 하루가 지나간다 -늙는다는 것은 작아진다는 것이고, 마른다는 것이고, 비운다는 것이다. 하나인 것에 덤덤해진다는 것이고, 지나가는 것에 담담해진다는 것이다. 늙으면 살던 집을 좁히고, 이고 지고 끼고 살던 것을 버리고, 일이나 사람을 줄이는 까닭이다. 몸소, 간소, 검소, 감소, 축소, 청소하지 않으면 늙음은 시간의 소굴이 되기 십상이다. 작아진 몸을 눕힐 주소 하나, 낮아진 몸을 의지할 지팡이 하나, 굼뜬 몸을 일으켜 세워줄 마음 하나, 주먹만 한 위를 채워줄 언 밥 한 그릇으로 압축되는 이 한 삶이 서..

좋은 시 2021.05.18

송년회/황인숙

송년회 황인숙(1958~) 칠순 여인네가 환갑내기 여인네한테 말했다지 "환갑이면 뭘 입어도 예쁠 때야!" 그 얘기를 들려주며 들으며 오십대 우리들 깔깔 웃었다 나는 왜 항상 늙은 기분으로 살았을까 마흔에도 그랬고 서른에도 그랬다 그게 내가 살아본 가장 많은 나이라서 지금은, 내가 살아갈 가장 적은 나이 이런 생각, 노년의 몰약 아님 간명한 이치 내 척추는 아주 곧고 생각 또한 그렇다(아마도) ㅡ'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 지성사, 2016) 칠순을 훌쩍 넘긴 노시인께서 마흔을 갓 넘긴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뭘 해도 참 예쁠 나이다! 그때는 나도 속으로 깔깔 웃었다. 마흔 즈음에 나는 이제부터는 늙겠구나라는 헛헛함에 급기야는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듣다 운전대를 부여잡..

좋은 시 2021.05.18

조용한 일/김사인

조용한 일 ― 김사인(1956∼)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하늘에 왜 불이 났어?” 어린 아들이 묻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노을이다. 붉은 노을을 상상하지 않고 눈으로 보는 것은 오래간만의 일이다. 드디어 노을이 짙어지고 하늘이 깊어지는 시절이 왔구나 싶다. 색의 계절, 가을이 찾아오는 것이다. 가을이 온다는 말은 우리를 안심하게 한다. 농경사회의 유전자가 남아서일까. 이제 추수가 시작되니까 덜 배고플 거라고, 우리의 조상이 속삭이는 것일까. 아니, 현대사회의 지친 유전자는 가을을 다르게 듣는다.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오는구나.’ 여름과 가을 사이의 시간..

좋은 시 2021.05.17

빈집/마경덕

빈집 마경덕 비 냄새 질펀한 들머리판, 나락냄새 풋풋합니다. 가도 가도 초록뿐, 모곡리 들녘이 몸을 뒤척입니다. 길은 어디론가 구불구불 기어가고 길섶엔 살진 호박이 배꼽을 내놓고 누웠습니다. 호젓한 아침, 길이 일러주는 대로 한서초등학교를 지나 밤벌 유원지를 돌아 나올 때 물안개는 산허리를 자르고 서서히 마을을 삼키고 있었지요. 간간이 만나는 빈집, 얼마나 적막한지요. 빈집 앞에 똘배 한 그루 어깨가 축 늘어져 있습니다. 꾀죄죄한 몰골로 예닐곱 개 남은 똘배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돌덩이처럼 식은 똘배가 발아래 어지럽습니다. 거뭇거뭇 낙과가 비에 타들어갑니다. 가도 가도 빈집, 빈집입니다. 흙벽이 무너지고, 앞마당 녹슨 자전거가 외롭습니다. 우물이 마르고 문짝이 기울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뒤..

좋은 시 2021.05.17

거리에서/이원

거리에서 ―이원(1968∼ )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빠져나와 있다 탯줄 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둥둥 떠다닌다 ‘거리’라는 단어는 쉽고도 어렵다. 일상에서는 네거리, 사거리처럼 쉽게 쓰이는 말이지만 다른 한편, 매우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거리를 걸을 때를 생각해 보자. 나는 고작 군중 속에 파묻힌 한 명의 무명인이다. 이름도 뭣도 중요치 않은 ‘지나가는 행인 1’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거리에서 나는 나 외의 다른 군중을 바라보는 구경꾼이 된다. 거리 속의 나는 그저 그..

좋은 시 2021.05.17

담에 빗자루 기대며/신현정

담에 빗자루 기대며―신현정(1948∼2009) 이 빗자루 손에 잡아보는 거 얼마만이냐/여기 땅집으로 이사와 마당을 쓸고 또 쓸고 한다/얼마만이냐/땅에 숨은 분홍 쓸어보는 거 얼마만이냐/마당에 물 한 대야 확 뿌려보는 거 얼마만이냐/땅 놀래켜보는 거 얼마만이냐/어제 쓸은 마당, 오늘 또 쓸고 한다/새벽같이 나와 쓸 거 없는데 쓸고 또 쓸고 한다/마당 쓸고 나서/빗자루를 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놓는다/빗자루야 그래라 네가 오늘부터 우리집 도깨비하여라. 묵은해가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나갔다. 새해가 오는 줄도 모르고 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정해 놓은 약속일 뿐이라고 해도, 약속의 의미가 참 약해졌다고 해도 달력의 1월 1일은 중요한 날이다. 그런데 올해 1월 1일은 좀 어색했다. 새해 인사를 벅차게 하..

좋은 시 2021.05.17

곤드레밥/김지헌

곤드레밥 김지헌 봄에 갈무리해놓았던/곤드레나물을 꺼내 해동시킨 후/들기름에 무쳐 밥을 안치고/달래간장에 쓱쓱 한 끼 때운다/강원도 정선 비행기재를 지나/나의 위장을 거친 곤드레는/비로소 흐물흐물해진 제 삭신을/내려놓는다/반찬이 마땅찮을 때 생각나는 곤드레나/톳나물,/아무리 애를 써도/조연일 수밖에 없는/그런 삶도 있다 ―김지헌(1956∼) 만나고 돌아섰을 때 두고두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다. 시집도 비슷하다. 덮었을 때 두고두고 생각나는 시가 있다. 사람이나 사람이 낳은 시나 별반 다르지 않다. 나중에도 생각나는 시가 나에게 좋은 시다. 김지헌 시인의 ‘곤드레밥’이 바로 그런 시다. 왜 좋으냐를 따지자면 첫 번째는 ‘그냥’이다.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는..

좋은 시 2021.05.17

연필로 쓰기/정진규

연필로 쓰기/정진규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반편도 거두어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

좋은 시 2021.05.15

부엌의 불빛/이준관

부엌의 불빛 이준관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 무릎처럼 따뜻하다. 저녁은 팥죽 한 그릇처럼 조용히 끓고, 접시에 놓인 불빛을 고양이는 다정히 핥는다. 수돗물을 틀면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 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의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꺼지지 않게 한다.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대면 하늘엔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 별이 태어난다. ―이준관(1949~ ) 불, 모닥불을 피우고 모여서 이런저런 것들을 구워 먹고 살았습니다. 그 바깥에 기둥을 세우고 얽어서 지붕을 올려 '집'이라는 것을 지었습니다. 부엌만 있는 집이지요. 그 집의 자애로운 왕은 어머니! 식구들을 골고루 나눠 먹이고 키우는 왕이지요. 지금 자리에 없으면 남겼다가 나누는 공..

좋은 시 2021.05.12

호박잎타령/권갑하

호박잎타령 권갑하 연둣빛 더듬이 세워 아득한 허공 길을 팍팍한 돌서덜엔 환히 밝힌 호롱불꽃 덩굴손 움켜쥔 사랑 주렁주렁 맺어 놓고 김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을 쌈해 먹는 밥물에 살짝 쪄낸 풋풋한 그 맛이란 강된장 구수한 향에 꺼끌꺼끌한 식감까지 잔칫집 돼지고기 시장에선 꽁치 조기 천렵 갈 땐 된장 고추장 주섬주섬 싸가던 넓적한 음식 보자기 가난마저 감쌌었지 넘실남실 넌출넌출 타고 넘는 한 생이라 후두둑! 빗발쳐도 온몸으로 받아내는 아버지 손바닥 닮은 뭉툭하니 두터운 정

좋은 시 2021.05.11

막걸리/최영철

막걸리 / 최영철 쌀뜨물 같은 이것 목마른 속을 뻥 뚫어 놓고 가는 이것 한두 잔에도 배가 든든한 이것 가슴이 더워져 오는 이것 신 김치 한 조각 노가리 한 쪽 손가락만 빨아도 탓하지 않는 이것 허옇다가 폭포처럼 콸콸 쏟아지다가 벌컥벌컥 샘물처럼 밀려들어오는 이것 한 잔은 얼음 같고 세 잔은 불 같고 다섯 잔 일곱 잔은 강 같고 열두어 잔은 바다 같아 둥실 떠내려가며 기분만 좋은 이것 어머니 가슴팍에 파묻혀 빨던 첫 젖맛 같은 이것 시원하고 텁텁하고 왁자한 이것 어둑한 밤의 노래가 아니라 환한 햇볕 아래 흥이 오르는 이것 반은 양식이고 반은 술이고 반은 회상이고 반은 용기백배이다가 날 저물어 흥얼흥얼 흙으로 스며드는 순하디 순한 이것

좋은 시 2021.05.11

옻닭/손택수

옻닭 / 손택수 1 그늘만 스쳐도 살갗에 소르르 소름이 돋는다 해마다 한 번씩 자신을 스쳐간 폭염과 홍수 팔을 뚝뚝 부러뜨리던 폭설의 기억을 비벼 꼬아 제 속을 치잉칭 결박하는 나무 속을 쥐어짜 잎잎이 푸르디푸른 신음을 뱉어낸다 허나 독기라면 닭도 지지 않는다 한평생을 옥살이로 보내온 그가 아닌가 톱날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벼슬과 부리, 쇠창살 사이로 모가지만 간신히 빼내어 댕강 참수를 당하는 그 순간까지 제 것이 아닌 몸뚱이를 키우며 살아온 그가 아닌가 지독에 이른 동물과 식물이 한 몸이 되기 위해 부글부글 끓고 있다 2 독기라면 나도 지지 않는다 나를 무심코 집어삼킨 세상에 우둘투둘한 옻독을 옮기리라 뚝배기 국그릇 속에 코를 쥐어박고 아버지와 함께 옻닭을 먹는다 두 편에 오만 원 어쩌다 받은 원고료로..

좋은 시 2021.05.11

홍어/이명윤

홍어/이명윤 죽음도 조금씩 숙성될 수 있어 좋다 죽음을 항아리에 담아 꽃처럼 피우는 일, 죽음이 차마 못다 한 말들 달빛 쏟아지는 담장 밑에 묻어 두고 그 울분을 천천히 삭이는 일 죽어도 무대가 끝나지 않아 좋다 납작 엎드린 생이던 구차하게 코가 낀 생이던 살아온 날들 알싸하게 발효되어서 좋다 어느 날 벌떡 일어난 죽음이 삶의 코끝을 쿡 찔러서 좋다 죽음의 지독한 말이 세상에 널리 널리 퍼져서 좋다 죽음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잎을 피운 죽음의 맛에. 엄지 척 즐거워하는 문상객들 둘이 먹다 둘 다 죽어도 좋다 죽음을 키워서 파는 동네에 가면 오랫동안 붉은 눈을 뜬 죽음이 곱절로 맛있다

좋은 시 2021.05.11

식사법/김경미

식사법 김경미 ​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 가지 반찬만일 것 ​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 명에나 못 죽는 것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것 마저 다 낭비해버리고픈 멸치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을 잘 넘길 것

좋은 시 2021.05.11

메밀전병/전윤호

-메밀전병/전윤호- 강원도 정선 오일장에 가면 함백산 주목처럼 비틀어진 할머니들이 부침개를 파는 골목이 있지 가소로운 세월이 번들거리는 불판에 알량한 행운처럼 얇은 메밀전을 부치고 설움을 잘게 다진 묵은지로 전병을 만들지 참 못생기고 퉁명스런 서방이 대낮에 이불 둘둘 말고 자빠진 모양 한입 씹으면 시금털털한 사는 맛을 느끼지 함석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들으며 옥수수막걸리를 마시던 친구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뒤통수만 보여 주며 달아나던 처녀들도 간 곳 없는데 이 땅의 하늘을 떠받친 태백산맥 아래 아라리 흐르는 강 사이로 메밀전병 부치는 할머니들은 고소한 기름 냄새 풍기며 아직 그 자리에 있지

좋은 시 2021.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