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빗살무늬/김용주

빗살무늬 ㅡ김용주(1964~) 오래된 LP판 위로 햇살이 앉아있다 쉰 소리로 돌아가는 그대 낡은 봄빛 갈라진 발뒤꿈치 사이 꽃물 드는 저물녘 가등 켜진 골목길 한 짐 시름 부려놓고 바람 풍금 마디마다 풀어 가는 봄날이여 촘촘히 파고든 허물 마냥 투명하다 빗살무늬'는 참빗의 고운 결을 담고 있다. 섬세한 올을 지닌 명주바람의 문양을 담은 것도 같다. 그보다 많이 겹치는 전통 토기 덕에 빗살무늬 기억은 각별하다. 그런데 '오래된 LP판 위'에 앉아 있는 햇살과 그 안팎을 '쉰 소리로 돌아가는 그대 낡은 봄빛'이 얹힌다면 그 빗살무늬야말로 애틋하기 짝이 없겠다. 그것도 '갈라진 / 발뒤꿈치 사이 / 꽃물 드는 저물녘'이니! 사라져가는 것들을 따라가는 눈빛 그늘이 길게 잡힌다. ' 바람 풍금'도 마디마디 봄날을..

좋은 시 2021.06.11

빗물 사발/길상호

빗물 사발 -길상호(1973~ ) 아무런 기척도 없이 가랑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누가 거기 두고 갔는지 이 빠진 사발은 똑, 똑, 똑, 지붕의 빗방울을 받아 흙먼지 가득한 입을 열었다 그릇의 중심에서 출렁이며 혀가 돋아나 잃었던 소리를 되살려 놓는 것 둥글게 둥글게 물의 파장이 연이어 물레를 돌리자 금 간 연꽃도 그릇을 다시 향기로 채웠다 사람을 보내놓고 허기졌던 빈집은 삭은 입술을 사발에 대고 모처럼 배를 채웠다 조용조용하게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사람이 떠난 빈집 마당 한구석에는 사기로 만든 그릇이 하나 놓여 있다. 사발은 위가넓고 아래는 좁으며 굽이 있고 줄금이 나 있다. 그 그릇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빗방울이 똑, 똑, 똑, 떨어지자 사발이둥근 입을 벌려 그것을 받는다. 빗방울을 받아 다시 ..

좋은 시 2021.06.04

나물 파는 보살 할매/전인식

나물 파는 보살 할매 전인식 얇은 봄 햇살도 머리에 이면 무거운가 보다 시끌벅적 사람들 소리 요란한 시장 어귀 한 보따리 봄나물 펼쳐 놓고 고갯방아를 찧는 할머니 나물 팔 생각은 아예 잊어버리고 꿈속 극락 미리 다녀오시는 모양이다 할머니 대신 파릇파릇 눈을 뜨고 있는 저 봄나물 다 팔고 나면 늙은 영감 저녁상에 간고등어 한 마리 올릴 수 있을까 냉이 달래 쑥 사이소 사이소 외치지도 않고 마음 다 아는 듯 눈 감고 앉은 모습이 왠지 경주 남산 바위 속 보살님 걸어 나온 것만 같다 ―전인식(1964~ ) 봄나물 꺾어 장에 나온 할머니. 졸음에 겨운 할머니 머리 위에 햇빛은 하얗기만 합니다. '봄 햇살도 머리에 이면 무거운가' 봅니다. 그럴 리가요. 모든 짐을 머리에 이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풍습을 환기한 거지..

좋은 시 2021.06.04

나막신/이병철

나막신 ― 이병철(1921∼1995)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목숨 수(壽)자 박힌 정한 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우리 집 둘째 꼬마는 귀신이 나올까 봐 화장실에 혼자 못 간다. 귀신이 무섭다니 다행이다. 세상에는 그보다 무서운 것투성이인 것을 아직 모르고 있다. 나는 귀신보다 마음이 무섭다. 때때로 마음이 나를 지옥에 내려놓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터져 마음이 쑥대밭이 됐다. ‘해결할 수 없으면 놓아야 한다.’ 머리에서는 이렇게 지시가 내려오는데 마음은 영 말을 듣지 않는다. ‘어쩌지, 어쩌지.’ 마음은 이 난장판..

좋은 시 2021.06.03

밀물/정끝별

밀물 ―정끝별(1964∼) 가까스로 저녁에서야/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나란히 누워/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응, 바다가 잠잠해서 오늘은 정끝별 시인의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한 편의 시를 소개한다. 처음 이 시를 읽고 나서 한참을 잊을 수 없었다. 제목처럼 밀려오는 감동을 여러분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은 ‘밀물’인데 막상 시를 읽어보면 ‘밀물’이라는 단어는 하나도 안 나온다. 자연현상, 달의 힘, 해변과 썰물…. 밀물에 응당 따라오는 이런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이 시는 바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은유의 힘을 빌려 시는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 우리, 나, 너의 이야기다...

좋은 시 2021.06.03

냄비받침/남구택

책은 베개도 되고 가끔 냄비받침도 된다. 책에 火印으로 남은 자국을 보고, 시인은 시가 불도장이라 생각들었을까. 詩는 저마다의 마음에 남은 화상자국이라는 생각에 공감한다. 무엇을 남기는 것은 뜨겁다. 詩는 뜨겁고 전하는 마음도 뜨겁지만, 가끔은 전하고자 하는 말이 허공으로 달아나버리기도 한다.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데,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둥글게 둥글게 큰 파문으로 닿고 싶은데... 좋은 시를 쓰고 싶은 모든 시인의 염원이다. 냄비자국도 흔적이므로 퍽 괜찮은 시를 썼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다.

좋은 시 2021.05.31

가정/박선희

가정 박선희 열무 썰어 소금 뿌리자 숨이 죽었다 한길을 흐르는 물관과 체관 뻣뻣한 아빠의 티격을 태격으로 되받는 엄마의 말끝처럼 소금은 단단한 쪽과 부드러운 쪽을 오가고 있었다 삐죽삐죽 고개 드는 열무는 다독여 재우고 햇살을 팽팽하게 당겨 질겨진 잎은 흔들어주고 베트남 우즈베키스탄에서 건너와 한국말 익히며 김치라는 발음을 섞어 만든 김치를 익히는 여자들 그들의 어둔한 말투만큼 싱거워진 김치맛에 주고받는 눈빛은 짜다 소금을 머금고 뱉으면서 수위 조절하며 단단한 성질 절여질 때를 기다리는 엄마 펄펄 뛰던 숨 부드러움에 절여지는 아빠 기세 조금씩 역전되고 소금은 열무를 통째로 뒤집게 만든다 이국땅서 온 저들도 곧 이렇게 버무려질까 풀 죽은 아빠의 등 뒤, 물속으로 녹아들지 못해 오소소한 소금들 갓 취직한 나는..

좋은 시 2021.05.29

감잎에 쓰다/이해리

감잎에 쓰다 이해리 물든 감잎을 시엽지(枾葉紙)라 부른 사람이 있었다 감잎이 종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적겠는가 외딴 뒤란 저녁연기 금빛 사장을 둥실 떠나는 나룻배 막차가 떠난 뒤 홀로 헤매는 바람도 좋겠지만 나는 적겠다 벌레 먹힌 잎이 왜 지극한지 상처 많은 단풍이 왜 마음 당기는지 그런 물음 적어 파란 하늘 아래 달아놓고 기다리겠다 수 만 잎의 답신이 돌아올 때까지 -시집『감잎에 쓰다』(시와사람, 2010) -사진 : 다음 이미지 ----------------------------------------------- 순간을 바라보기 그리고 시가 되기까지 기다리기 대단한 고집이고 욕심이다 이런 거 없으면 시인 하지 말아야 한다 묻는다는 것 그게 삶이고 詩다 ‘지극함’과 ‘당김’은 시에 있어 숙명 같은 것이다..

좋은 시 2021.05.28

봉평 장날/이영춘

봉평 장날 이영춘 올챙이국수를 파는 노점상에 쭈그리고 앉아 후루룩 후루룩 올챙이국수를 자시고 있는 노모를 본다 정지깐˚ 세간사 뒤로 하고 한 세기를 건너와 앉은 푸른 등걸의 배후, 저문 산 그림자 결무늬로 국수 올들이 꿈틀꿈틀 노모의 깊은 주름살로 겹치는 허공, 붉은 한 점 허공의 무게가 깊은 허기로 내려앉는 한낮. ˚부엌의 영동지방 사투리 -시집『봉평 장날』(서정시학, 2011) -사진 : 다음 이미지 ------------------------------------------------ 어머니를 회상하는 어느 봉평 장날의 풍경이다 시인은 이제 나이 들어 어머니가 경험한 세계로 직접 여행을 떠나본다 어머니를 떡 허니 시 속에 불러들여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고감의 차이가 시간의 연속이듯 삶과 죽음은..

좋은 시 2021.05.28

라면/권선희

라면 권선희 하루가 퉁퉁 불어터졌다. 찌그러진 양은냄비 속에서 꼬들꼬들 익어가는 라면에 찬밥 한 덩이 미련 없이 던져 넣는 어머니. 푹푹 개죽처럼 끓어 가난이 쟁반 위로 오르면 우리들의 그 절제된 여인은 오목한 국자로 침묵을 퍼올렸다. ‘살자’는 두 글자가 길게 올랐다가 그릇에 담겼다. 주둥이를 내밀고 당겨 앉아 도대체 얼만큼 살아야 제대로 된 라면을 먹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ㅡ출처 : 시집『구룡포로 간다』(애지, 2007) ㅡ사진 : 다음 이미지 ---------------------------------------------- 혼자서 맛있게 끓여 먹는 라면은 고급스레 끓일 수 있다 여럿이 먹어야 하고 먹어도 부족한 라면이면 게다가 찬밥 한 덩이 넣은 라면은 보나마나다,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다 절..

좋은 시 2021.05.28

이끼/김경성

이끼 김경성 그만큼의 거리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디여도 몸 내려놓을 자리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 가장 가벼운 몸으로 골짜기 그 너머까지 썩은 나무의 등걸을 지나 동굴 속까지 너른 바위 안쪽까지 철퍽철퍽 미끄러지는 물 잔등이어도 마른 입술 툭툭 터지도록 긴 가뭄이어도 몸 깊숙이 남겨놓은 자리가 있어 후드득 지나가는 빗방울 몇 개만 있어도 순식간에 그대 곁으로 달려간다, 달려간다 아주 짧은, 단 한 번의 부딪힘만으로도 너른 바위를 덮고 계곡을 덮고 고인돌까지 덮을 만큼 지독하게 간절한 무엇이 있어 ㅡ출처 : 시집 『와온』(문학의전당, 2010) ㅡ사진 : 다음 이미지 ----------------------------------------------- ‘후드득 지나가는 빗방울 몇 개만 있어도..

좋은 시 2021.05.28

사랑에 대한 반가사유/이기철

사랑에 대한 반가사유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일용할 양식 얻고 제게 알맞은 여자 얻어 집을 이루었다 하루 세 끼 숟가락질로 몸 건사하고 풀씨 같은 말품 팔아 볕드는 本家 얻었다 세상의 저녁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아름다워 세상 가운데로 편지 쓰고 노을의 마음으로 노래 띄운다 누가 너더러 고관대작 못되었다고 탓하더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부르며 잠시 빌린 집 한 채로 주소를 얹었다 이 세상 처음인 듯 지나는 마을마다 채송화 같은 이름 부르고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본적에 실었다 우리 사는 뒤뜰에 달빛이 깔린다 나는 눈매 고운 너랑 한생을 살고 싶었다 발이 쬐끄매 더 이쁜 너랑 소꿉살림 차려놓고 이 땅이 내 무덤이 될 때까지 너랑만 살고 싶었다 - 이기철 -

좋은 시 2021.05.27

연근/김은

연근 김 은 진흙 먹으며 집 지켰고 가뭄으로 지붕이 내려앉을 땐 소금쟁이 다리 끝에서 생기를 얻었지 곧게 서서 물위에 푸른 지붕을 얹고 연분홍 황녀 같은 꽃 피워내어 증발하는 물 막고 비단잉어의 새끼도 받았다 살갗엔 거뭇거뭇한 반점들이 있으나 매끄러운 살빛에선 여자의 분 냄새도 난다 연근이 뽑혀나간 못 여기저기 둥글게 퍼낸 저 흔적은 숭숭 구멍 뚫린 어머니의 가슴팍이다 그녀가 부재중인 진흙은 어쩌면 자정능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꼬르륵 연못의 배 앓는 소리 들릴 때 힘겹던 그 세월, 우리 백분의 일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까 말갛게 씻겨 도마에 오른 알몸 위에서 내 어머니 골다공증의 이력을 다시 본다 시집 『시계는 진화 중』 2021. 지혜사랑 [출처] 연근 / 김 은 |작성자 마경덕

좋은 시 2021.05.24

만리동 책방 만유인력 /전장석

만리동 책방 만유인력 전장석 고갯마루를 마수걸이한 마을버스가 몇 사람과 접점하고는 내리막길로 이항한다 간판이 분필로 쓰인 책방은 방금 새로운 이론을 설명하려던 중이다 ​저녁 산책의 중력파가 만리동까지 미치면 거기, 작동이 멈춘 낡은 탁자 위의 시간들 수공이 되어 나를 내부 수리한다 무중력의 이 도시를 용감하게 횡행하던 한 권의 시집, 단 한 줄의 문장 속엔 궤도를 이탈한 소우주가 지구본처럼 떠돌고 평생 떨어진 사과를 줍다 허리 휜 내 이력이 통증이 가시지 않은 호롱불로 밤새 매달려 있다 막대그래프 같은 아파트와 낮은 곡선의 지붕들 그 아찔한 간극에서 자주 멀미하던 바람이 서점 어딘가에 불편한 기록으로 꽂혀 있다는데 언제쯤 그것들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불구의 시간들이 버릇처럼 그리움으로 발화되면 나는..

좋은 시 2021.05.24

그날 /곽효환

그날 - 곽효환(1967∼ ) 그날, 텔레비전 앞에서 늦은 저녁을 먹다가 울컥 울음이 터졌다 멈출 수 없어 그냥 두었다 오랫동안 오늘 이전과 이후만 있을 것 같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밤, 다시 견디는 힘을 배우기로 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고대’라는 말이 어울리던 옛날에 시는 노래였다. 그저 그런 노래는 아니고, 낮은 땅에서 높은 하늘을 향해 솟구치던 노래였다. 솟구치려면 힘이 세고 나아가는 방향도 분명해야 한다. 영웅서사시를 떠올려 보자. 그때의 시는 저만치 별처럼 빛나는 신이라든가 영웅을 향해 날아갔다. 날아가는 기세나 느낌은 마치 폭죽이나 불꽃놀이 같았을 것이다. 분명 그것은 ‘상승의 시’였다. 아주 오랜 후, 그러니까 ‘지금’의 시는 낱말의 집합이 되었다. 방향은 수천으로 나뉘었고 ..

좋은 시 2021.05.23

은는이가 /정끝별

은는이가 ―정끝별(1964∼ )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

좋은 시 2021.05.23

동질(同質)

동질(同質) ―조은(1960∼ )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 -나지금입사시험보러가잘보라고해줘너의그말이꼭필요해 모르는 사람이다 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 지하철 안에서 전화기를 생명처럼 잡고 있는 절박한 젊은이가 보인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신도 사람도 믿지 않아 잡을 검불조차 없었다 그 긴장을 못 이겨 아무 데서나 꾸벅꾸벅 졸았다 답장을 쓴다 -시험꼭잘보세요행운을빕니다! 아름다운 에피소드다. 불특정 다수에게 유독가스 같은 ‘악플’을 살포하면서 제 아까운 삶을 하찮게 만들고 남의 정신과 감정을 시들게 하는 이들이여, 스마트폰에 이런 훈풍이 불기도 한다오. 실수를 깨달은 뒤에 젊은이는 모르는 이가 보내온 답장으로 세상을 향해 한결 따뜻한 감정을 품을 테다. 그랬으면 ..

좋은 시 2021.05.23

유통기한/이근화

유통기한 이근화 오늘은 검은 비닐봉지가 아름답게만 보인다 곧 구겨지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 사물의 편에서 사물을 비추고 사물의 편에서 부풀어오르고 인정미 넘치게 국물이 흐르고 비명을 무명을 담는 비닐봉지여 오늘은 아무렇게나 구겨진 비닐봉지 앞에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무 물건이나 잘 담는 비닐 주머니를 시인은 바라보고 있다. 노란빛 귤, 가을의 감, 식품, 마실 것을 담는 비닐봉지다. 때로는 먹을거리의 질름거리는 국물조차 담는 비닐봉지다. 곧 구겨질, 싸구려 봉지이지만 사물의 편에 서는 비닐봉지다. 인정이 많고, 참을성이 있고, 덕스러운 비닐봉지다. 비닐봉지는 대개 유통기한이 길지 않다. 한두 번 사용하고 휴지 조각처럼 버려진다. 그러나 비닐봉지는 얇고 넓적하거나 길고 둥글거나를 상관하지 않고 묵묵하게..

좋은 시 2021.05.20

그 여름의 끝/이성복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좋은 시 2021.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