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국수/장석주

국수 장석주 지느러미도 깃털도 없는 나를 위해 노모가 점심 식사를 내오셨다. 직립인의 고요한 식욕에 부응하는 이것, 뼈도 근육도 없는 이것, 비늘을 가졌거나 가시를 가진 것도 아닌 이것, 두드리고 때려 단련시켰건만 물과 만나 허수히 무너지는 이것, 여럿이되 하나고 단순하되 극적인 이것, 한 끼니의 편이, 미끈거리는 촉감의 허영심, 오랜 명망과 혁명의 동지들, 가느다란 養生의 꿈들!

좋은 시 2021.05.11

잡탕밥/박수서

잡탕밥/ 박수서 여기 잡탕밥 둘! 사는 게 뭐라고 그까짓 인생이 뭐라고 섞고 볶다 보면 그게 그거 아니겠어 새우의 갑옷을 벗기고, 오징어를 칼등으로 으깨고, 해삼을 능지처참하고, 전복을 비응도飛鷹島 우럭처럼 날리고, 소라의 어깨를 긁어 고추기름, 식용유, 대파, 마늘, 간장, 굴소스가 떡 하니 입 벌려 날름 밥을 받아먹고 뒹굴다 보면 잡탕밥 아니겠어 사는 일이 짬짬하고 싱거울 때 삶의 날것들을 모아 채썰기라도 하여 모아두면, 아니 이 삶과 저 삶 위에 달걀 하나 툭, 까 올려 비비고 볶아 본다면 알겠지 사는 일이 뭐라고 지지고 볶으며 날마다 날마다 잡탕밥을 짓고 있는 일이라고 - 시집『해물짬뽕 집』(달아실, 2018)

좋은 시 2021.05.11

노각正傳/김현주

노각正傳 김현주 끝물을 수확한 오이 밭고랑에서 노각이 흔들흔들 술毒에 누렇게 쇤 할아버지를 끌고 가는 녹슨 자전거 바퀴가 흔들흔들 어젯밤 천둥번개에도 끄떡없던 노각이 쿵, 하고 누렇게 쇤 등짐을 아무렇게나 부려놓네 아이코, 이 웬수야! 비틀거리는 생의 주름살을 늦은 햇살이 잡아당겨 칭칭 감고 있네 어지러움 증처럼 천천히 되감기는 녹슨 바퀴살 사이로 망망한 갈증을 견디고 있는 노각의 굽은 등을 바라보네 헝클어진 몸을 반듯하게 눕히고 흙 묻은 껍질을 벗기자 낡은 런닝 밑으로 쉰내 나는 땀방울이 물컹한 슬픔으로 만져지네 어둡고 험한 삶의 고랑을 더듬더듬 넘을 때마다 더러는 치밀어 오르는 홧덩이를 천천히 꺼내 휙, 내던지던 곳, 슬픔 같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저기 한 뼘 허공에 머물기 위해 쿵, 하고 맨땅에..

좋은 시 2021.05.10

믹서/김영미

​ ​ ​ 믹서 ​ ​ 원산지에 따라 생육사가 다른 각양각색의 과일들 믹서에 넣는다 ​ 스위치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 격동의 한 세기가 몰려온다 굉음을 울리며 칼날의 검은 회오리 속으로 빨려든다 꿈결처럼 빨강과 초록, 극좌와 극우가 손을 잡고 주황과 연두, 중도와 보수가 섞인다 과육 속 붉게 영근 따가운 햇살이 섞이고 지중해의 염분과 아열대를 적시는 오후의 소낙비 몬순의 당도가 섞인다 기적처럼 껍질과 알맹이의 근원적 대립이 몸을 풀고 열 번의 만남과 스무 번의 헤어짐 마침내 모든 입자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꿈결 같은 탁자 위, 한 잔의 코스모 폴리탄! ​ 원심분리 되지 않는 그대와 나 믹서에 넣는다 뼈와 몸뚱이 비극처럼 회오리처럼 ON OFF ON OFF ​ ​ ​ 여름철 주방기구의 주인공은 단연 믹서! ..

좋은 시 2021.05.09

멸치, 명태에 대한 시

멸치똥 / 복효근 똥이라 부르지 말자 그 넓은 바다에서 집채만한 고래와 상어와 때깔도 좋은 열대어들 사이에서 주눅들어 이리저리 눈치보며 똥 빠지게 피해다녔으니 똥인들 남아 있겠느냐 게다가 그물에 걸리어 세상 버틸 적에 똥마저 버텼을 터이니 못처럼 짧게 야윈 몸속에 딱히 이것을 똥이라 하지 말자 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잡아먹은 적 없이 잡아먹혀서 어느 목숨에 빚진 적도 없으니 똥이라 해서 구리겠느냐 국물 우려낼 땐 이것을 발라내지도 않고 통째로 물어 넣으면서 멸치도 생선이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적마다 까맣게 타들어갔을 목숨 가진 것의 배알이다 배알도 없는 놈이라면 그 똥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뜯어낸 자리 길고 가느다란 한 줄기 뼈가 있겠느냐 밸도 없이 배알도 없이 속도 창시도 없이 똥만 그득한 세상을..

좋은 시 2021.05.08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 최광임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 최광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밥 때를 비켜 혼자 아무렇게나 끼니를 때우는 일이다 식은 밥에 고추장 얹고 통깨 몇 알 뿌려 비빌 때의 느낌과 타월로 제 몸의 때를 밀 때의 퍽퍽함이나 같은 일이다 싱크대 위, 흐린 햇살을 쳐놓고 선 채로 쓸쓸함을 뜬다 식도를 타고 오르는 간밤의 취기 나 말고 또 누구를 만났었던가 붉은 밥 수저 안에서 역류성 식도염이 따끔 거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겹겹의 웃음이 번지고 있지만, 장기 공연하는 배우들 같았다 말이 건배를 하고 술잔이 건배할 때도 형광등보다 도수 높은 쓸쓸한 눈빛들, 외투 속 어깨를 심하게 들먹이며 골목 어디로 흩어지던 사람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보다 사랑 줄 누군가가 없다는 것은 더 쓸쓸한 일이다 ..

좋은 시 2021.05.08

저수지/권정우

저수지 권정우 자기 안에 발 담그는 것들을 물에 젖게 하는 법이 없다 모난 돌멩이라고 모난 파문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검은 돌멩이라고 검은 파문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산이고 구름이고 물가에 늘어선 나무며 나는 새까지 겹쳐서 들어가도 어느 것 하나 상처입지 않는다 바람은 쉴 새 없이 넘어가는 수면 위의 줄글을 다 읽기는 하는 건지 하늘이 들어와도 넘치지 않는다 바닥이 깊고도 높다 ―권정우(1964∼) 매년 5월이 되면 정신이 확 든다. 벌써 2021년도 이만큼이나 갔구나 싶어서 마음이 급해진다. 인간관계도 돌아보게 된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챙길 일이 많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애틋한 건 어버이날이다. 부모님과 몇 해나 더 함께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5월의 찬란함은 좀 서럽다. 부모님 없이 맞는 어..

좋은 시 2021.05.08

연필을 소재로 한 시

* 몽당연필 -이해인- ​ 너무 작아 손에 쥘 수도 없는 연필 한 개가 누군가 쓰다 남은 이 초라한 토막이 왜 이리 정다울까 ​ 욕심 없으면 바보 되는 이 세상에 몽땅 주기만 하고 아프게 잘려 왔구나 ​ 대가를 바라지 않는 깨끗한 소멸을 그 소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만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 * 몽당연필의 꿈 ​ 나는 너희들의 몽당연필이 되어도 좋다 침 발라 쓰다가 쓰다가 쓸 수 없을 때 버려도 좋을 한 자루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다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이 시커먼 흑연빛이 아니라 5월의 푸른 하늘같이만 될 수 있다면 그 푸른 하늘을 날으는 종달새같이만 될 수 있다면 나는 너희들의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다 (김경..

좋은 시 2021.05.06

무릎에 대하여/이재무

무릎에 대하여 이재무 계단 오르내릴 때마다 투덜거리는 무릎 관절 이 이상 신호는 탄력 잃은 기관들의 이음새가 느슨해지고 녹 슬어간다는 징후이리라 누구는 칼슘 결핍에 운동부족이라 탓하고 혹자는 식습관을 고쳐라 처방하지만 나는 안다 이것의 참다운 기원은 설운 생활에의 마음의 굴절에 있다는 것을 썩지 않는 기억은 유구하다 세상은 내게 없는 살림에 뻣뻣한 무릎이 문제였다고 말한다 내키지 않은 일에 무릎 끓을 때마다 여린 자존의 살갗 뚫고 나오는 굴욕의 탁한 피 하지만 범사가 그러하듯이 처음이 어렵고 힘들 뿐 거듭되는 행위가 이력과 습관을 만들고 수모도 겪다 보면 수치가 아닌 날이 오게 된다 굴욕은 변명을 낳고 변명이 합리를 낳고 마침내는 합리로 분식한 타성의 진리를 일상의 옷으로 껴입고 사는 날이 도래하는 것이..

좋은 시 2021.05.05

곡비(哭婢) / 문정희

곡비(哭婢) / 문정희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엄마는 곡(哭)을 팔고 다니는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먹고 살았다. 그네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먹으며 까무러칠 듯 울어대는 곡(哭) 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 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일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옥례엄마 머리 위에 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의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 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좋은 시 2021.05.05

단단한 고요/김선우

단단한 고요 김선우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멧돌 속에서 껍질 타지면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곤대며 어루만져 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 인사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 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 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 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마른 잎사귀에 숨어 있던 도토리로 시작해서 단단한 도토리묵이 되기까지..

좋은 시 2021.05.05

흉터/양수창

흉터 양수창 함양에 있는 상림공원에서 고목이 된 나무들 가운데 큰 흉터를 간직한 나무를 보았다. 커다란 동굴을 연상케 하는, 그 상처가 얼마나 깊었을까. 아픔은 얼마나 극심했을까. 여러 날, 여러 밤, 역사의 한 복판에서 잠 못 이루고 신열하며 들떠 지냈던 기억이 고스란히 흉터로 남아있다. 아픔을 견디고 상처를 쓸어 덮고, 그렇게 스스로 치유한 흉터. 고목 스스로, 더욱 고풍스럽게, 더욱 우아하고 더욱 품위 있게, 자기 존재 가치를 드러낸, 그 아팠던 흔적. 이름 모를 새들은, 그 아팠던 흉터 속에 들어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고 어떤 생애生涯를 살다 떠나갔을까

좋은 시 2021.05.04

바람아래 붉은 강/이영옥

-바람아래 붉은 강/이영옥- 길쯤이 얼어붙은 강위로 아버지의 구식 자전거는 오래된 충복처럼 삐거덕거리며 아버지를 부축해 왔다 오십천 왜가리는 얼음에 발을 심고 한나절을 버텼다 미루나무가 달랑거리는 귀 한 짝을 달고 외롭게 서 있었고 그 모습은 하나같이 바람의 갈기를 붙잡고 떠돌다가 이제 막 황량한 겨울 풍경 앞에 뱉어진 꼴이었다 하교 길에 영덕대교아래에 사는 거지들의 따듯한 저녁을 나는 가끔 훔쳐보았고 청솔가지 태운 연기가 흰 뱀처럼 몸을 비틀며 붉은 강을 건너왔다 한 방향 속에는 얼마나 무수한 방향들이 살고 있었는지 바람이 삶 전체를 뒤로 밀었다가 제자리에 세우면 강바닥에는 어지러운 손금들이 자꾸 태어났다 모두가 하룻밤만 자고나면 떠날 객식구처럼 바람이 뱉어낸 싸락눈처럼 발 없는 귀신처럼 서늘하게 집안..

좋은 시 2021.05.04

옆걸음/이정록

옆걸음/이정록 전깃줄에 새 두 마리 한 마리가 다가가면 다른 한 마리 옆걸음으로 물러선다 서로 밀고 당긴다 먼 산 바라보며 깃이나 추스르는 척 땅바닥 굽어보며 부리나 다듬는 척 삐친 게 아니다 사랑을 나누는 거다 작은 눈망울에 앞산 나무 이파리 가득하고 새털구름 한올 한올 하늘 너머 눈 시려도 작은 몸 가득 콩당콩당 제짝 생각뿐이다 사랑은 옆걸음으로 다가서는 것, 측근이라는 말이 집적집적 치근거리는 몸짓이 이리 아름다울 때 있다 아침 물방울도 새의 발목 따라 쪼르르 몰려다닌다 그중 한 마리가 드디어 야윈 죽지를 낮추자 금강초롱꽃 물방울들 땅바닥을 적신다 팽팽한 활시위 하나가 하늘 높이 한 쌍의 탄두를 쏘아올린다 호박범종 물앵두나무 우듬지에 늙은 호박 하나, 폭설 내내 새들이 다녀간다 툇마루에 앉아 겨우내..

좋은 시 2021.05.03

구두에 대한 예의/이선정

구두에 대한 예의/이선정 삶의 무게를 벗어던진 그들이 오소소 잠든 현관 -꽃길만 걷자 해놓고 흙길만 걷게 해 미안하다 내 낡은 구두 앞에서 묵도하다가 멀리서 힘없이 잠든 말라빠진 구두 한 켤레에 울컥 목이 멘다 -어머니 , 당신은 더 힘드셨군요 삐딱하게 목이 늘어진 구두 한 켤레 깨지 않도록 가지런히 잠자리를 보아 드린다 치킨의 마지막 설법 닭같이 홰를 치고 싶은 날 화가 치밀어 된바람만 풀풀 일으키는 날 열난 가슴 달래려 치킨을 시킨다 내 속의 중심이 반쯤 기울어 무단시 * 어깨가 쳐질 때 닭 뼈다귀라도 채워 자신감 곧추세울까 물렁뼈까지 오독오독 남김없이 씹어 삼킨다 속으로 꾹꾹 눌러 가슴팍에 날아다니던 서슬 퍼런 언어들 양쪽에 날개 달고 기름진 모가지로 꼬끼오 꼬끼오 홰를 치는 밤 빌린 몸으로 도를 ..

좋은 시 2021.05.03

육탁/배한봉

육탁/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이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

좋은 시 2021.05.03

슬리퍼/이재무

슬리퍼/이재무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슬리퍼처럼 편하고 만만했던 얼굴이 떠오른다 슬리퍼는 슬픈 신발이다 막 신고 다니다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에 벗어놓는 신발이다 언감생심 어디 먼 곳은커녕 크고 빛나는 자리에는 갈 수 없는 신발이다 기껏해야 집 안팎이나 돌아다니다 너덜너덜해지면 함부로 버려지는 신발이다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안개꽃같이 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았던 오래된 우물 속처럼 눈 속 가득 수심이 고여있던 얼굴이 떠오른다 이재무 시집 중에서

좋은 시 2021.05.03

간절/이재무

간절 - 이재무(1958~ ) 삶에서 ‘간절’이 빠져나간 뒤 사내는 갑자기 늙기 시작하였다 활어가 품은 알같이 우글거리던 그 많던 ‘간절’을 누가 다 먹어치웠나 ‘간절’이 빠져나간 뒤 몸 쉬 달아오르지 않는다 달아오르지 않으므로 절실하지 않고 절실하지 않으므로 지성을 다할 수 없다 여생을 나무토막처럼 살 수는 없는 일 사내는 ‘간절’을 찾아 나선다 공같이 튀는 탄력을 다시 살아야 한다

좋은 시 2021.05.02

무의탁 못/이경옥

무의탁 못 ―이경옥(1959~ ) 땔감으로 부려놓은 폐자재 서까래에 뒤틀린 대못 하나 불편하게 박혀 있다 녹슬은 시간에 기대어 항변도 변명도 않고 대들보 깊숙이 박혀 안착하지 못하고 한데로 내쳐진 채 노숙으로 뒤척이다 수습할 식구도 없이 잿불 속에 파묻힐 의탁은 못의 운명이다. 어딘가에 박혀야 제 노릇을 하는 못. 무기처럼 단련된 채 박히길 기다린다. 뾰족한 끝과 망치를 받아낼 머리도 못질 끝에 거듭나는 것이다. 그 럴 때는 대못이나 나무못보다 쇠못이 제격이다. '무의탁 못'이 우리 주변의 '무의탁' 삶들을 일깨운다. '폐자재 서까래'속의 못도 의탁이 끝나고 버려진 생. 한때 누군가의 집을 어엿이 받든 '대못'도 다 쓰이고 나니 '잿불 속에 파묻힐' 일만 남은 게다. '수습할 식구도 없이 ' 내쳐진 땔감..

좋은 시 2021.05.02

호박찬가(琥珀讚歌)/우종률

호박찬가(琥珀讚歌)/우종률 이보시오 벗님네들 저기 물건(物件) 형색(行色) 보소 앉은키는 자그만데 배는 저리 처졌는가 대장(隊長) 짓을 시키자니 내세우기 부끄럽고 말단(末端)으로 보내자니 얼굴보기 창피하네 시골버스 올랐더니 뒷자리로 밀어 내네 기사양반(技士兩班) 브레이크 눈치 없이 굴러 가네 어린 것은 멍이 들고 늙은 것은 골병(骨病)드네 가를 박고 모를 차며 빙글빙글 굴러가네 꽃 중에는 너를 두고 꽃 아니라 이르거늘 장미(薔薇)처럼 하나하나 향기(香氣)조차 못 맡겠고 국화(菊花)의 암향(暗香)처럼 눈치조차 못 채누나 벌 잡기 놀이할까 자랑 못할 통꽃이여 없는 듯이 가시 돋은 이파리는 또 어떤가 새색시의 섬섬옥수(纖纖玉手) 흠이 날까 겁이 나네 장만하기 번거로워 먹기조차 귀찮다네 게으른 이 무용지물(無用..

좋은 시 2021.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