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봄도 없이 삼월/김병호

봄도 없이 삼월 봄도 없이 삼월 김병호 사람이 사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무릎보다 낮은 반지하 쪽창에 핀, 손바닥만 한 보행기 신발과 앞코 해진 운동화 봄빛을 모아 출렁이는 두 켤레 꽃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봄도 없이 그 앞을 지나던 수백의 연분홍 맨발들도 한 번씩 발을 넣어보겠습니다 얼굴 없는 걸음들이 지나칠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햇살 미끄러지는 아이의 잠을 덮겠습니다 봄이 혼자만 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햇살에 힘줄이 돋습니다 ―김병호(1971~ ) 둘러보니 벌써 서울에도 매화꽃 만발했습니다만 가만 서서 웃으며 바라볼 여유는 없습니다. 꽃 얘기, 봄 소식 맘 놓고 나누지도 못하는 삼월입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올해처럼 실감하기도 처음입니다. 가난한 골목에는 반지하의 삶들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시..

좋은 시 2021.07.12

참 좋은 날 /박경희

참 좋은 날 참 좋은 날 박경희( 은행잎이 11월 그늘을 끌어들이자 사그락사그락 햇살이 궁구르는 길 위로 진눈깨비 날렸다 벼 바심 끝난 논바닥에 내려앉은 구름이 웅덩이 속에서 흘렀고 서리 맞은 호박잎이 밭머리에 누렇게 스러져가는 바람을 흔들었다 발자국으로 내려놓은 이파리 위로 번진 노을 가슴에 담아놓고 가도 좋은 것을 벚나무 그늘이 깊어서 쓸쓸함이 박새 발가락으로 흔들렸다 나를 스치는 것들이 햇살에 부딪쳐 스러지던 날 아우, 저승길 걷기에 참 좋은 날 ―박경희(1974~ ) 기온이 내려갈 때마다 하관(下棺)을 떠올려 본 적이 있습니다. 몸뚱이 가진 모든 생은 땅 위에서 살다가 결국 혼(魂)은 날려 보내고 육신[魄]은 땅 아래로 스미게 마련이지요. 곡식들 다 익힌 햇볕도 이제 쉬어야 한다는 듯이 식어지는 ..

좋은 시 2021.07.07

손택수 시 모음

옻닭 / 손택수 1 옻나무는 지독하다 나무 그늘만 스쳐도 살갗에 소르르 소름이 돋는다 해마다 한 번씩 자신을 스쳐간 폭염과 홍수 팔을 뚝뚝 부러뜨리던 폭설의 기억을 비벼 꼬아 제 속을 치잉칭 결박하는 나무 속을 쥐어짜 잎잎이 푸르디푸른 신음을 뱉어낸다 허나 독기라면 닭도 지지 않는다 한평생을 옥살이로 보내온 그가 아닌가 톱날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벼슬과 부리, 쇠창살 사이로 모가지만 간신히 빼내어 댕강 참수를 당하는 그 순간까지 제 것이 아닌 몸뚱이를 키우며 살아온 그가 아닌가 지독에 이른 동물과 식물이 한 몸이 되기 위해 부글부글 끓고 있다 2 독기라면 나도 지지 않는다 나를 무심코 집어삼킨 세상에 우둘투둘한 옻독을 옮기리라 뚝배기 국그릇 속에 코를 쥐어박고 아버지와 함께 옻닭을 먹는다 두 편에 오만 ..

좋은 시 2021.06.29

거미줄/손택수

거미줄 거미줄 ― 손택수(1970∼ )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미터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사랑에 빠진 어린 연인들을 만나면 이야기해 주고 싶다. 아무리 화가 난대도 홧김에 “우리 헤어져!” 이런 말은 하지 말라고. 화가 났다는 표시로 ‘헤어지자’고 한 것뿐인데, 말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이별의 가능성이 끼어들게 된다. 한 번도 이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연인은 이별을 상상해 보게 된다. 말을 하면, 정말 그렇게 될..

좋은 시 2021.06.28

막고 품다/정끝별

막고 품다 ―정끝별(1964∼)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때 코가 석자나 빠져 있을 때 일갈했던 엄마의 입말, 막고 품어라! 서정춘 시인의 마부 아버지 그러니까 미당이 알아봤다는 진짜배기 시인의 말을 듣는 오늘에서야 그 말을 풀어내네 낚시질 못하는 놈, 둠벙 막고 푸라네 빠져나갈 길 막고 갇힌 물 다 푸라네 길이 막히면 길에 주저앉아 길을 파라네 열 마지기 논둑 밖 넘어 만주로 일본으로 이북으로 튀고 싶으셨던 아버지도 니들만 아니었으면,을 입에 다신 채 밤보따리를 싸고 또 싸셨던 엄마도 막고 품어 일가를 이루셨다 얼마나 주저앉아 막고 품으셨을까 물 없는 바닥에서 잡게 될 길 막힌 외길에서 품게 될 그 고기가 설령 미꾸라지 몇 마리라 할지라도 그 물이 바다라 할지라도 메모를 휘갈겨 놓은 종이쪽이니 우편봉투니 ..

좋은 시 2021.06.25

얼마나 많은 허방다리가/강해림

얼마나 많은 허방다리가 ―강해림(1954∼ ) 산 입구 천막식당에 중년의 남녀가 들어선다 가만 보니 둘 다 장님이다 남자는 찬 없이 국수만 후루룩 말아 먹곤 연거푸 소주잔을 비워대는데 여자는 찬그릇을 더듬어 일일이 확인한 후에야 젓가락을 든다 그릇과 그릇 사이 얼마나 많은 허방다리가 푹푹 발목 빠지고 무릎 깨지게 했을까 좌충우돌 난감함으로 달아올랐을 손가락 끝 감각의 제국을 세웠을까 그곳은 해가 뜨지 않는 나라 빛이 없어 캄캄하여도 집 찾아 돌아오고 밤이면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느라 가위로 피 묻은 탯줄을 잘랐을 테고 이윽고 얼굴이 불콰해진 남자는 한 손엔 지팡이, 한 손엔 여자 손잡고 제왕처럼 식당문을 나선다 꽃구경 간다 복사꽃 날리고 꽃향기에 어둠의 빛 알갱이가 톡톡, 꽃눈처럼 일제히 터져 나와 눈..

좋은 시 2021.06.25

장독 하나 묻어 두고/이연희

장독 하나 묻어 두고 ―이연희(1973∼ ) 앵두나무 그늘 아래 장독대를 생각한다 이른 아침 커다란 독 뚜껑을 다른 장독 위에 올려놓고 고추장 몇 숟가락 탁탁 소리 나게 퍼 담던 굵은 손마디 찬바람 속에서 한 해 먹을 고추장을 담그며 말하지 못한 속내를 어머니는 장독 속에 묻었다 새빨간 고추장에 싹싹 비빈 밥을 입속에 퍼 넣을 때 할머니와 아버지 언니와 나는 흔적 없이 잘 삭은 어머니 속내를 먹었다 더러는 짜고 더러는 매웠던 소리 내지 않는 한 시절을 온가족이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푸른 잎 사이에서 소리 없이 앵두가 익어가던 장독대의 봄날처럼 베란다 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 덜 삭은 마음들이 맵고 짠 맛을 내며 가슴에서 밀려올 때 붉고 따뜻한 몸 안의 길을 따라 늙은 어머니는 오늘도 나를 다녀가신다 화자..

좋은 시 2021.06.25

구부러진 상처에게 듣다/길상호

구부러진 상처에게 듣다 ―길상호(1973∼ ) 삼성시장 골목 끝 지하도 너는 웅크리고 누워 있었지 장도리로 빼낸 못처럼 구부러진 등에 녹이 슬어도 가시지 않는 통증, 을 소주와 섞어 마시며 중얼거리던 누더기 사내, 네가 박혀 있던 벽은 꽃무늬가 퍽 아름다웠다고 했지 뽑히면서 흠집을 냈지만 시들지 않던 꽃, 거기 향기를 심어주는 게 너의 평생 꿈이었다고 깨진 시멘트벽처럼 웃을 때 머리카락 사이로 선명하게 찍혀 있던 망치 자국, 지하도는 네가 뽑힌 구멍처럼 시큼한 녹 냄새가 났지 길상호 시집 ‘모르는 척’(천년의시작)에서 옮겼다. 시집의 화자는 대도시 서울의 구석진 곳에서 죄 지은 듯 겁먹은 듯 몸을 사리고 있는 존재들을 ‘모르는 척’ 앓는다. 자기를 방기하거나 유기된 사람과 동물과 사물의 그 눈물겨운 허름..

좋은 시 2021.06.25

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천서봉

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 ―천서봉(1971∼) 골 진 알밤, 무딘 칼날 세워 보늬 긁는다. 겨의 주름 깊이 길이 나 있다. 더위가 물러가는 길, 길을 따라 또 길이 돌아오는 길. 죽은 할미도 달의 오래된 우물도 모두 내 안구 속으로 돌아와 박힌다. 깊어가는 수심의 습지에서 남보다 더 오래 우는 개구리의 턱이 깊다. 지나간 애인들의 뒤통수가 전봇대마다 건들건들 매달려 있다. 울음소리를 참아온 나무들이 투명한 손바닥을 여름의 뒷등에 비빈다. 앵앵거리는 추억은 다만 비틀어져갈 뿐, 하나도 안 아프다. 그런 모기의 주둥이처럼 저녁이 오고, 한두 겹의 내력을 더 견디며 나는, 고요의 중심으로 천천히 내려가리라. 더위가 물러가는 길, 파르라니 깎은 몇 개의 알밤을 바가지에 담그면 달의 손바닥들이 내 오래된 뇌(腦..

좋은 시 2021.06.25

잠시/박승자

잠시 /박승자(1958∼) 저녁을 짜게 먹었다 싶어 슬리퍼 끌고 슈퍼 가는 길 환하게 불 밝힌 슈퍼 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주인 백 팻말이 손잡이에 걸려 있다 잠시라는 문구에 등 돌리지 못하고 발자국으로 보도블록 위에 꽃판을 만들고 있는데 잠시 만에 돌아올 수 있는 무언가를 많이도 버려 둔 것만 같기도 하고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시절에 저 팻말을 잠시 빌려 걸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데 시린 발끝으로 꼭, 꼭, 꽃판을 수 겹으로 만들어도 주인은 오지 않고 잠시만으로 턱없이 부족한,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발걸음을 한없이 머물게 하고 고개를 드니 슈퍼 안이 환했다가 어두워지는 것을 다 지켜봤을 회화나무, 쉬지 않고 물을 퍼 날랐을 물관도 어느 나무 속의 아늑한 습기를 잠시라도 방문하고 싶었..

좋은 시 2021.06.25

찬밥/전남용

찬밥 ―전남용(1966∼) 즐거움을 함께하지 못한 ― 찬밥이 있다 즐거움이 끝나고 더는 즐거움이 없을 때 찾는 ― 찬밥이 있다 뜨거운 시간을 홀로 식혀온 ― 찬밥이 있다 안방에서 친구들과 법석을 떨며 놀다 보면 아랫목 이불 속에 묻혀 있던 밥주발이 나동그라지곤 했다. 어머니가 알세라 찔끔해서 혀를 날름 내밀며 황급히 수습했던, 보온밥통이 없던 시절의 한겨울. 삼시 세끼 식구들에게 더운밥을 먹이고 싶은 게 어머니 마음이다. 그래서 식은 밥은 쌓여 어머니 차지가 된다. 간혹 다른 식구들 앞에는 갓 지은 밥이, 내 앞에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묵은 밥이 놓일 때면 열등한 식구 취급을 받은 듯 서러운 기분에 발끈하기도 했다. ‘밥’에는 ‘차별’에 대한 원초적 감각이 담겨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더운밥이 넘쳐나..

좋은 시 2021.06.25

돌의 활동/박지웅

돌의 활동 마침내 한줌이 되었다 얼마 만인가 이렇게 날아본 날이 돌멩이가 날아가고 있다 돌은 한동안 큰 돌 속에 틀어박혀 있다가 다 버리고 손 일부만 남겨 우리를 불러 세운다 한 방 먹이려고 우리가 집어든 것이 아니다 물수제비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물론 우리가 아니다 돌이 내 손을 붙잡은 것이다 솔숲 낮달 지나 밑도 끝도 없는 넓이를 지나 눈 부릅뜨고 펄럭펄럭 날아가는 돌 왜가리가 수면을 딛고 날아오르듯 돌멩이는 긴 다리를 꺼내어 물의 이마를 탕, 탕 힘껏, 밟는다 이 비상을 돕기 위해 수면은 바싹 엎드린다 납작하게 엎드리면 비로소 돌의 물갈퀴가 보인다 수만 년에 걸쳐 띄엄띄엄 행성을 도는 돌의 지동설을 믿게 되는 것이다 돌멩이라는 최초의 조류(鳥類)​를 발견하는 것이다 돌 속은 돌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다..

좋은 시 2021.06.16

30cm / 박지웅

30cm / 박지웅 ​ ​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거리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거리 눈빛이 흔들리면 반드시 들키는 거리 기어이 마음이 동하는 거리 눈시울을 만나는 최초의 거리 심장 소리가 전해지는 최후의 거리 눈망울마저 사라지고 눈빛만 남는 거리 눈에서 가장 빛나는 별까지의 거리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거리 눈감고 있어도 볼 수 있는 거리 숨결이 숨결을 겨우 버티는 거리 키스에서 한 걸음도 남지 않은 거리 이 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누가 30cm 안에 들어온다면 그곳을 고스란히 내어준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시 2021.06.16

삼나무 떼 / 이영옥

삼나무 떼 / 이영옥 한때 모든 길들은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삼나무 떼들이 떠나려는 길의 양켠을 붙들고 있었다 뜬금없이 머리채 잡힌 삼나무 사이로 바람의 일행들이 절뚝거리며 지나갔다 술 취한 아버지가 삼나무 옆구리에 자전거를 박았다 큰언니가 가방을 꾸려 객지로 떠나던 날 내 안에서 우는 마른 바람소리를 들었다 흔들고 있던 손바닥이 삼나무 잎처럼 버석거렸다 떼를 지어 막아도 잡을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것은 모두 한때라고 나는 우두커니 서서 흘러가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삼나무들은 그림자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키를 줄였다 늘이면서 제 외로움을 견디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소식 없던 작은언니 꿈을 꾸었다 삼나무는 밤새 한 뼘이나 키를 더 키웠다 세상의 바람이 다 불어간 다음에는 곤두세우고 있던 검은 머리채를 ..

좋은 시 2021.06.16

빈집 / 이영옥

빈집 / 이영옥 바람벽의 광대뼈가 불거져 있는 빈 농가 감나무 야윈 품안에 시린 낮달이 얼굴을 묻는다 허리를 비틀던 흙담은 기어이 주저앉아 버렸다 간신히 서있는 세탁기 속으로 후줄근한 바람이 몸을 구겨 넣자 겨울 해의 마지막 동력이 녹슨 플러그에 접속된다 일시 정지된 동작들이 기억을 짜 맞추고 숫자가 희미해진 타이머는 오래된 예약시간을 깨닫는다 이삿짐에도 따라가지 못한 한쪽 다리가 부러진 빨래집게가 눅눅한 어스름을 물고 늘어진다 이불 홑청 같은 저녁이 까슬까슬 말라간다 탈수가 끝난 세탁기가 빗물을 찔끔 내보낸다 탈탈 털어 낸 달빛이 삶은 기저귀같이 새하얗다 달려온 바람의 눈동자가 창호지를 뚫자 놀란 문풍지들이 소스라치게 울어댄다 이빨 나간 독 안에 채워진 달빛이 넘친다 적막한 마음들이 흘러내린다 빈집은 ..

좋은 시 2021.06.16

울돌목 / 문숙

울돌목 / 문숙 둘이 합쳐지는 곳엔 언제나 거친 물살과 울음이 있다 서해와 남해가 만나 수위를 맞추느라 위층이 시끄럽다 늦은 밤 쿵쿵 발자국 소리와 새댁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한쪽이 한쪽을 보듬는 일이 아프다고 난리다 마음 섞는 일이 전쟁이다 우루루 우루루 가슴 밑바닥으로 바위 구르는 소리를 토해낸다 돌덩이들이 가슴에 박혀 암초가 되어가는 시간이다 수면을 편편하게 하는 일 부드러운 물길만이 아니어서 부딪혀 조각난 것들 가라앉히는 시간만큼 탁하고 시끄럽다 저 지루한 싸움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 익사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좋은 시 2021.06.16

버드나무 길/박용래

버드나무 길 박용래 맘 천근 시름겨울 때 천근 맘 시름겨울 때 마른 논에 고인 물 보러 가자. 고인 물에 얼비치는 쑥부쟁이 염소 한 마리 몇 점의 구름 紅顔의 少年같이 보러 가자. 함지박 아낙네 지나가고 어지러이 메까치 우짖는 버드나무 길. 마른 논에 고인 물. ―박용래(1925~1980) 꽃 한창 지나고 이제 연두가 밀립니다. 차례대로 오고 또 가는 빛깔들입니다. 겨우내 색이 그리웠던 산천의 부름을 받고 천천히 거드름을 피우면서 나타나는 연두, 그다음은 초록의 무리가 좀 급한 듯 넘보겠지요. 버드나무의 치렁치렁한 자세에 돋아나는 연두는 단연 눈길을 끕니다. 바람이 지나면 휘어져서 부끄러운 고백의 자세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벌써 오래전에 가셔졌던 연애의 감정을 불러냅니다. 그 질서를 그대로 따라가면 좋으..

좋은 시 2021.06.16

내 몸을 관통하는 쓸쓸함에 동의하며/마경덕

사진 내 몸을 관통하는 쓸쓸함에 동의하며 ​ 시집『그녀의 외로움은 B형』서두에 나는 이렇게 썼다. 이것들은 슬픔의 협력자 서글픔에 기대어 시를 쓴다 막무가내 내 몸을 관통하는 쓸쓸함에 동의하며. 외로움은 공격적이고 방어할 힘이 없는 나는 나를 방치했다. 저녁노을이 지고 서서히 번져오는 아릿한 어둠의 농도에 먼 산의 능선이 사라지고 마당의 분꽃이 어슴푸레 피기 시작하면 견딜 수 없는 간절한 것들이 가슴에서 꿈틀거렸다. 조금은 저릿하고 조금은 서럽고 조금은 설레는 그 정도의 통증을 “나는 아직 살아있다”라고 해석했다. 그때 나는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은밀하게 키우고 있었다. 밤하늘을 홀로 날아가는 새, 우수수 마른 수수밭을 헤집는 갈바람소리, 뻘밭에 버려진 폐선, 파도에 밀려온 구두 한 짝, 밭둑에 우두..

좋은 시 2021.06.14

앉은뱅이 밥상/정영선

앉은뱅이 밥상 ​ 정영선 ​ 오늘은 식탁을 놔두고 낡은 상에 밥을 차려 먹는다 청암동 비탈진 곳 구멍가게 뒷집 문간방과 가난해도 좋았던 나의 신혼과 함께 먹는다 연탄불에 갓 지은 냄비 밥과 석유곤로에 끓인 국과 소찬 몇 가지 정갈하게 앉히고 서른 살 신랑 앞에 다소곳이 내놓았던 작은 밥상 밥은 설고 국은 짜고 반찬은 싱거웠지만 밥상 앞에 마주 앉은 신혼 입맛은 딱, 두 가지여서 고소하거나 달콤했다 탱탱했던 내 얼굴이 늘어지고 골이 생겼듯, 옻칠 발라 반질거렸던 상 얼굴도 찰과상에 다리 관절은 삐걱거린다 우린 사이좋게 나란히 늙어간다 훤칠한 6인용 식탁에 곳간 열쇠 다 내주고 조용히 뒷방으로 물러난 그는 알고 보면 집안 내력 다 꿰는 우리 집 상床 노인이다

좋은 시 2021.06.14

신호등 / 고두현

신호등 / 고두현 너 두고/돌아가는 저녁/마음이 백짓장 같다./신호등 기다리다/길 위에/그냥 흰 종이 띠로/드러눕는다. ―고두현(1963∼ ) 몸이 괴로우면 푹 쉬어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마음이 괴로울 때, 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황망할 때, 슬플 때, 화가 치밀 때는 오히려 걸어야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정신없이 걷고 있을 때 감정은 좀 가라앉는다. 빠른 걸음에 집중해서 괴로움을 잊어보려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이럴 때 마주치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은 결코 이롭지 않다. 그것들은 억지로 우리의 발길을 붙잡는다. 발길이 붙잡히면 마음도 붙잡히는 법, 괴로움은 이때다 싶어 다시 돌아온다. 횡단보도 앞에서 겨우 참았던 눈물은 터져 나오고, 겨우 멈췄던 생각도 봇물처럼 쏟아질 것이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

좋은 시 2021.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