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피재현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피재현 아버지는 가을이 깊어지면 감 따러 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나는 감 따는 게 싫어 짜증을 냈다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아느냐고 감 따위 따서 뭐 하냐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다시 가을이 왔을 때 엄마는 내게 말했다 니 애비도 없는데 저 감은 따서 뭐 하냐 나는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톱을 내려놓고 오래도록 울었다-피재현(1967∼) 시를 읽으러 오신 분들은 모두 시의 손님이다. 손님께는 물 한 잔이라도 정성껏, 맑은 차라도 계절에 맞게 드리는 법. 그래서 봄에는 꽃과 나비의 시를, 겨울에는 흰 눈과 쓸쓸함을 준비하곤 했다. 그러니 오늘, ‘별이 빛나는’ 시를 준비한 것이 어색하지 않다. 늦게까지 별을 올려다보는 계절은 여름날이니까. 나아가 감나무 이야기를 준비한 것도..

좋은 시 2021.12.19

가을 손/이상범

가을 손 가을 손 이상범 두 손을 펴든 채 가을 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 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이상범(1935∼ ) 땅 파서 장사하는 사람 없고, 남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인생을 보라. 가는 게 있어도 오는 게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분명히 줬는데 남들은 기억도 못 하는 경우는 더 많다. 준 것과 받을 것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미움이 깃든다. 내 마음과 시간, 재물과 ..

좋은 시 2021.12.17

돌아오는 길/김강태

돌아오는 길/김강태 ……춥지만, 우리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 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보기 희망 한 단에 얼마예요? ―김강태(1950∼2003) SF(Science Fiction) 영화에는 외계인도 나오고 우주선도 나오니까 황당한 거짓말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SF의 묘미는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같은, 더 낯선 상상력에 있지 않다. 이 장르의 본질은 인간 바깥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라는 명제에 있다. 사람 아닌 자의 눈에 비친 사람은 어떠한가, 혹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걸 탐색하는 것이 SF 장르다. 차가운 AI와 인조인간 사이에서는 뜨거운 인간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런 심정으로, 우리는 추운 겨울날을 맞이하여 따뜻한 것들을 그리워하고 ..

좋은 시 2021.12.17

꿈 다 잊으려고/정양

꿈 다 잊으려고 정양 밤마다 꿈을 꾸어도 아침마다 대개는 잊어버리고 어쩌다 한 토막씩 말도 안 되게 남아 있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나 잊어도 좋은 꿈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고, 꿈꾸며 살 날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잊었나 사는 게 잊어버리는 연습이라면 말도 안 되게 남은 꿈들은 언제 다 잊을 것인가 그 꿈 다 잊으려고 아침마다 잠이 모자라나보다 아침마다 말도 안 되는 몇 토막 그리움으로 모자란 채로 나는 남는다 정양(1942년∼) 박태원의 소설 중에 ‘적멸’이라는 작품이 있다. 1930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소설인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인생은 꿈이다. 그리고 인생이 좇고 있는 것도 꿈이다.” 무려 90년 전에 박태원은 이미 알았던 것이다. 인생..

좋은 시 2021.12.14

바람 부는 날/윤강로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윤강로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만을 보면서 오래 오래 기다려 보았나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로 세상에 매달려 보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에 시달려 보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이 되어 스친 것들을 잊어 보았나 삶이 소중한 만큼 삶이 고통스러운 만큼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개의 낡은 잎새를 사랑해 보았나 윤강로(1938∼) ‘감응’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만난 결과, 우리 마음이 따라 변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 만나면 변하기도 하겠지’ 싶지만 시에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시는 감응을 마법같이 대단한 힘으로 보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시인은 오롯이 저 혼자서 시를 빚어내지는 못한다. 오늘 만난 타인, 말, 장면, 심지어 지나가는 바람마..

좋은 시 2021.11.29

칠월/허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좋은 시 2021.11.26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류시화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 류시화 -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

좋은 시 2021.11.26

십일월/이재무

십일월 -이재무 십일월은 의붓자식 같은 달이다. 시월과 십이월 사이에 엉거주춤 껴서 심란하고 어수선한 달이다 난방도 안 들어오고 선뜻 내복 입기도 애매해서 일 년 중 가장 추운 달이다 더러 가다 행사가 있기는 하지만 메인은 시월이나 십이월에 다 빼앗기고 그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허드레 행사나 치르게 되는 달이다 괄호 같은 부록 같은 본문의 각주 같은 산과 강에 깊게 쇄골이 드러나는 달이다 저녁 땅거미 혹은 어스름과 잘 어울리는 십일월을 내 영혼의 별실로 삼으리라

좋은 시 2021.11.23

앞치마를 두르고/조말선

앞치마를 두르고 ​ 조말선 앞치마를 두르고 시를 쓴다 앞치마를 두르고 독서를한다 전문가들은 앞치마를 두른다 앞치마를 두른 생선장수 앞치마를 두른 생닭장수 앞치마를 두른 화가 앞치마를 두른 엄마 앞치마를 두르면 피를 튀긴다 피 튀기게 열중이다 앞치마를 두르면 함부로 버젓이 칼을 휘두른다 앞치마를 두르고 하는 짓은 앞치마가 다 받아준다 피를 보고야 말 사람들은 앞치마를 두른다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죽어 있는 것을 또 죽이고 죽어서 살아가는 전문가의 작품들 전문가용 앞치마는 뒤가 트여 있다 전문가용 앞치마는 간혹 눈요기용 프릴이 있다 전문가용 앞치마는 팽개치기 간편하다 피가 잔뜩 묻은 앞치마 오물이 깊이 있게 얼룩진 앞치마 앞치마를 벗으면 시는 사라진다 ​ 시 감상평 ​ ​작업의 용도에 맞게 모양이나 재질도..

좋은 시 2021.11.20

10월/기형도

10월 -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좋은 시 2021.11.19

모과의 위치/ 조정인

모과의 위치 ​ 조정인 그 윗가지 그 옆가지 그 아래가지에 문득문득 새처럼 날아 앉은 푸른 모과들 깃 치는 소리 낮게, 더 낮게 내려앉은 모과의 동쪽은 지금 스스로 벅차오르는 기쁨의 위치 사물이 지닌 기쁨의 흘수선을 파드득 치고 날아오르는 조무래기 천사 발뒤꿈치를 좇다가 놓치고 들어온 이후 잎사귀 사이 모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과 쪽으로 얼굴을 돌려 모과만을 보여주었다 풀밭에 내려앉은 까치가 호젓한 하느님에서 훌쩍, 까치 쪽으로 건너뛴 이후처럼 선반 위의 퉁명한 모과는 어느 날 불쑥 한 덩어리 의혹을 내밀며 갈색 반점으로 뒤덮인 살덩이 쪽으로 옮겨 앉는다 지층의 그늘을 표면으로 다 우려낸 지상의 마지막 얼굴 같은 모과는 지금 갈애를 품은 심장의 위치 또 어느 날의 모과는 요절한 시인의 초상처럼 외로..

좋은 시 2021.11.19

두부의 공식/마경덕

두부의 공식 마경덕 저것은 네모난 공식 문제를 풀면 네 개의 각을 얻을 수 있다 ​사방을 나누고 눈어림으로 재는 중량 해답은 말랑해서 비닐봉지에 담기거나 팩에 담긴다 ​첫 문장은 함부로 구르고 튕겨나가는 딱딱한 공식 변수가 있어 정량의 물을 더하고 거품을 뺐다 ​회오리처럼 휘돌다가도 뜨거운 불길만 무사히 건너면 잘 될 거라 믿었던 사내 완성품을 기다리며 허기진 시간을 견뎠다 간수를 넣는 과정만 통과하면 쓸 만한 물건이 될 거라고 부글거리는 잡념까지 걸러내었다 ​순두부처럼 몽글거리는 아들에게, ​반듯하게 살아라 물러터지면 아무 짝에도 못 쓴다 네모난 틀은 아버지의 공식 거름포를 깔고 뭉친 마음을 부었지만 반듯한 각을 얻지는 못했는지, ​구치소 앞 두부를 들고 기다리는 아버지 ​저기 물렁한 두부 한 모 걸어..

좋은 시 2021.11.19

꽃 보자기/이준관

꽃 보자기 ―이준관(1949∼ ) 어머니가 보자기에 나물을 싸서 보내왔다 남녘엔 봄이 왔다고. 머리를 땋아주시듯 곱게 묶은 보자기의 매듭을 풀자 아지랑이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남녘 양지바른 꽃나무에는 벌써 어머니의 젖망울처럼 꽃망울이 맺혔겠다. 바람 속에선 비릿한 소똥 냄새 풍기고 송아지는 음메 울고 있겠다. 어머니가 싸서 보낸 보자기를 가만히 어루만져 본다. 식구들의 밥이 식을까봐 밥주발을 꼭 품고 있던 밥보자기며, 빗속에서 책이 젖을까봐 책을 꼭 껴안고 있던 책보자기며, 명절날 인절미를 싸서 집집마다 돌리던 떡보자기며, 그러고 보면 봄도 어머니가 보자기에 싸서 보냈나 보다. 민들레 꽃다지 봄까치풀꽃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꽃 보자기에 싸서. 겨울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봄은 한 걸음..

좋은 시 2021.11.16

가을 손/이상범

가을 손 이상범 두 손을 펴든 채 가을 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 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이상범(1935∼ ) 땅 파서 장사하는 사람 없고, 남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인생을 보라. 가는 게 있어도 오는 게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분명히 줬는데 남들은 기억도 못 하는 경우는 더 많다. 준 것과 받을 것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미움이 깃든다. 내 마음과 시간, 재물과 돈을 가져..

좋은 시 2021.11.08

손목 /고은진주

손목 /고은진주 손목은 어떤 상징인가 최후의 결심이 생채기를 내는 곳이거나 톡톡 튀는 피의 압력이 움켜쥐는 힘을 손으로 보내는 곳. 안으로 접으면 드러나는 몇 줄 골 깊은 주름을 숨기고 있는 곳. 마음 없이 끌려갔던 손목. 그 경험을 뿌리쳤던 손목. 개인용 시간을 부리는 곳 또는 소매를 덧대고 걷어 올리던 곳. 한 십 년쯤 된 가출이 돌아와 서성거리던 골목 어귀 같기도 하고 햇살을 등에 업고 가는 아버지의 뒷짐 같은 것. 생의 맥박이 또박또박한 지점 이쪽과 저쪽 날씨 짚어주기도 한다 부질없이 걷어붙이다가 오해를 사기도 하고 철들면 여지없이 공손해지는 곳. 손목 비틀리기 전까지 실토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손목으로 모이고 두 손목이 묶이면 발목까지 엉키는 자리 대체로 가늘어서 만만하게 다가가게 되는..

좋은 시 2021.10.25

차력사/유홍준

차력사[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7〉 돌을 주면 돌을 깼다 쇠를 주면 쇠를 깼다 울면서 깼다 울면서 깼다 소리치면서 깼다 휘발유를 주면 휘발유를 삼켰다 숟가락을 주면 숟가락을 삼켰다 나는 이 세상에 깨러 온 사람, 조일 수 있을 만큼 허리띠를 졸라맸다 사랑도 깼다 사람도 깼다 돌 많은 강가에 나가 나는 깨고 또 깼다 ―유홍준(1962∼) 얼마 전에 북한군이 차력을 선보였다는 뉴스가 있었다. 강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맞다. 차력은 놀랍고, 차력사는 강하다. 요즘에 차력은 무예보다는 묘기에 가깝지만 그래도 힘이 센 사람만이 행할 수 있다. 이런 것은 강한 자의 차력, 그리고 소수의 차력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약하디 약한 차력사도 있을까. 소수가 아닌 다수가 하는 차력도 있을까. 나는 ..

좋은 시 2021.10.18

앉은뱅이 밥상/정영선

앉은뱅이 밥상 ​ 정영선 ​ 오늘은 식탁을 놔두고 낡은 상에 밥을 차려 먹는다 청암동 비탈진 곳 구멍가게 뒷집 문간방과 가난해도 좋았던 나의 신혼과 함께 먹는다 연탄불에 갓 지은 냄비 밥과 석유곤로에 끓인 국과 소찬 몇 가지 정갈하게 앉히고 서른 살 신랑 앞에 다소곳이 내놓았던 작은 밥상 밥은 설고 국은 짜고 반찬은 싱거웠지만 밥상 앞에 마주 앉은 신혼 입맛은 딱, 두 가지여서 고소하거나 달콤했다 탱탱했던 내 얼굴이 늘어지고 골이 생겼듯, 옻칠 발라 반질거렸던 상 얼굴도 찰과상에 다리 관절은 삐걱거린다 우린 사이좋게 나란히 늙어간다 훤칠한 6인용 식탁에 곳간 열쇠 다 내주고 조용히 뒷방으로 물러난 그는 알고 보면 집안 내력 다 꿰는 우리 집 상床 노인이다

좋은 시 2021.10.14

소멸에 대하여/이성복

?소멸에 대하여? - 이성복 ​ ​거실 화장실 수건은 늘 아내가 갈아두는데 그중에는 근래 직장에서 받은 입셍로랑이나 란세티 같은 외국물 먹은 것들도 있지만, 1983년 상주구계서원 중수 기념수건이나 (그때 아버지는 도포에 유건을 쓰고 가셨을 거다) 1987년 강서구 청소년위원회 기념수건도 있다 (당시 장인어른은 강서구청 총무국장이었다) 근래 받은 수건들이야 올이 도톰하고 기품있는 태깔도 여전하지만, 씨실과 날실만 남은 예전 수건들은 오래 빨아 입은 내의처럼 속이 비친다 하지만 수건! 그거 정말 무시 못할 것이더라 1999년, 당뇨에 고혈압으로 장인어른 일년을 못 끌다 돌아가시고, 2005년 우리 아버지도 골절상으로 삭아 가시다가 입안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셨어도, 그분들이 받아온 낡은 수건들은 앞으로도..

좋은 시 2021.10.07

업어준다는 것/박서영

업어준다는 것/박서영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하략) ―박서영(1968∼2018) 무릇 세상에는 안 해보면 모르는 일이 아주 많다. 업는 것도, 업히는 것도 그렇다. 업혀보지 않았다면, 혹은 업어보지 않았다면 이 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서로 업어주고 업혀주는 것..

좋은 시 2021.10.05

일요일의 문장들/최해돈

일요일의 문장들 ​ ​ 최해돈 ​ ​ 미풍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떨림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담벼락에 사는 벽돌의 나이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걸어오는 봄의 머리카락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행렬의 속도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적색 신호등이 살아있는 시간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온종일 비행하는 먼지의 행방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쓸쓸히 멀어져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까만 볼펜 뚜껑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주고받은 언어들의 동그란 모양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굴러가다 멈춘 바퀴들의 그늘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도서관 2층과 3층 사이, 계단의 묵언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방으로 들어오는 빛의 따스함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여백을 채우는 사각 유리창에 대하여 생각하..

좋은 시 2021.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