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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치마를 두르고/조말선

에세이향기 2021. 11. 20. 09:57

앞치마를 두르고

조말선

 

 

앞치마를 두르고 시를 쓴다 앞치마를 두르고 독서를한다 전문가들은 앞치마를 두른다 앞치마를 두른 생선장수 앞치마를 두른 생닭장수 앞치마를 두른 화가 앞치마를 두른 엄마 앞치마를 두르면 피를 튀긴다 피 튀기게 열중이다 앞치마를 두르면 함부로 버젓이 칼을 휘두른다 앞치마를 두르고 하는 짓은 앞치마가 다 받아준다 피를 보고야 말 사람들은 앞치마를 두른다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죽어 있는 것을 또 죽이고 죽어서 살아가는 전문가의 작품들 전문가용 앞치마는 뒤가 트여 있다 전문가용 앞치마는 간혹 눈요기용 프릴이 있다 전문가용 앞치마는 팽개치기 간편하다 피가 잔뜩 묻은 앞치마 오물이 깊이 있게 얼룩진 앞치마 앞치마를 벗으면 시는 사라진다

시 감상평

 

​작업의 용도에 맞게 모양이나 재질도 다양한 앞치마, 고대 이집트에서는 왕이나 사제(司祭)들이 권위의 상징으로 입었다는 앞치마가 이제 노동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몸에 두르는 순간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이것이 앞치마의 힘이다. 얇은 앞치마 한 장이 오물이나 얼룩을 받아주어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앞치마를 두른다는 것은 치열해진다는 것,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는 것, 생닭의 모가지, 생선의 몸통, 끈적거리는 악취도 겁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시를 잡으려면 시인도 앞치마를 둘러야한다. 시의 전문가는 독자의 눈을 만족시킬 눈요기용 프릴까지 달아야한다. 밋밋한 시에 풍성한 생각을 매달면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시 쓰기는 보기와는 달리 다량의 기를 소진하는 고된 노동이다. 산 것을 죽이고 이미 죽은 것을 또 죽여야 하는 시인들, 누군가 사용한 소재를 잡아다가 맛이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야하니 결심과 각오 없이 작업을 할 수 있으랴. 피와 오물은 시인의 땀이며 열정일 것이다. 앞치마를 두르고 지은 시는 맛이 쫄깃하고 새롭다. 언어를 세공하는 그 과정이 얼마나 치열했을까. 시를 잡기 위해 피를 흘린 밤은 또 얼마일까. 전문가의 앞치마는 갖가지 얼룩이 묻어있다. 언어의 부스러기와 파지(破紙)로 가득한 밤이 있다. 뒤가 터진 앞치마, 벗어 팽개치기 좋다. 생업이 되지 않으니 언제든 시를 버릴 수도 있다. 시인이 되기는 어렵지만 시인을 포기하기는 쉽다. 앞치마를 벗는 순간, 시에서 벗어난다. 아니, 감쪽같이 시가 사라진다.

 

 

-마경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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