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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모과의 위치/ 조정인

에세이향기 2021. 11. 19. 15:59

모과의 위치



조정인




그 윗가지 그 옆가지 그 아래가지에 문득문득 새처럼 날아 앉은
푸른 모과들


깃 치는 소리 낮게, 더 낮게 내려앉은 모과의 동쪽은 지금
스스로 벅차오르는 기쁨의 위치


사물이 지닌 기쁨의 흘수선을 파드득 치고 날아오르는 조무래기 천사
발뒤꿈치를 좇다가 놓치고 들어온 이후


잎사귀 사이 모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과 쪽으로 얼굴을 돌려
모과만을 보여주었다 풀밭에 내려앉은 까치가 호젓한 하느님에서
훌쩍, 까치 쪽으로 건너뛴 이후처럼


선반 위의 퉁명한 모과는 어느 날 불쑥 한 덩어리 의혹을 내밀며
갈색 반점으로 뒤덮인 살덩이 쪽으로 옮겨 앉는다


지층의 그늘을 표면으로 다 우려낸 지상의 마지막 얼굴 같은 모과는 지금
갈애를 품은 심장의 위치 또 어느 날의 모과는 요절한 시인의 초상처럼
외로 기울어 너머의 시간을 다 이해한다는 식인데


한 고요가 한 고요에게 건너오는 이 수평적 평온은 어디서 오나


온몸으로 서쪽인 모과와 함께 어떤 어슴푸레한 꿈속을 천천히 건너가는
매우 가볍고 황홀한 춤의 저물녘


빛이 싹트는 방향 멀리, 눈 쌓인 나목 그 윗가지 그 옆가지 아래 가지에
모과의 동쪽이 벌써 와 있다








감상평


한가로운 풍경 속에 내재된 갈등




마경덕(시인)


사회적인 지위나 역할을 중시하는 인간들처럼 ‘생사’가 달린 문제가 바로 ‘위치’이다. 짐승도 영역을 지키고 서열에 밀리지 않으려고 피를 흘리며 싸운다. 식물에게도 위치는 절대적이다. 광합성이 필요한 식물들은 햇빛을 좀 더 받으려고 태양을 향해 일제히 목이 기울어진다. 음지의 식물들이 한결같이 수척한 것은 빛에 굶주렸기 때문이다. 내한성이 약한 모과나무는 추운 곳에서는 꽃을 보지 못한다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햇볕은 식물들의 어미인 셈이다.
내면적 상처를 반성하고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한 작품이 좋은 시라고 한다. 그 조건에 부합한 “모과의 위치”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단면을 우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모과나무가 보여주는 동쪽은 어떤 곳일까. 그곳엔 일정한 계층이 있고 그 계층 너머엔 소외된 슬픔이 모여있다. 얼핏 보기엔 평화로운 풍경 속에 층위가 다른 갈등이 내재해있다.
문득문득 새처럼 깃을 치며 날아앉은 “모과의 위치”는 동쪽이다. 맨 먼저 해가 뜨는 동쪽은 길지(吉地)인 셈이어서 “모과의 동쪽”은 스스로 벅차오르는 “기쁨의 위치”이다.
새처럼 날아온 것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어 빠르게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다. 없던 것들이 하룻밤 사이에 문득문득 나타난다. 마치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깃 치는 소리 낮게 더 낮은 곳까지 내려와 결국은 모과나무를 독점하고 있다.
‘선체’가 물에 잠기는 한계선이 ‘흘수선’이다. 허용된 최대의 ‘흘수선’을 초과하면 배는 물에 잠기게 된다. ‘흘수선’은 최적의 ‘안전선’이다. ‘흘수선’을 알고 있는 동쪽의 모과들은 볕을 과식하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그 ‘흘수선’을 파드득 치고 날아오르는 조무래기 천사는 참새 떼일 것이다. 파문은 금세 가라앉고 뒤꿈치를 좇다가 놓치고 돌아온 화자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모과나무는 태연한 얼굴이다. 단단하게 매달린 모과들은 참새들의 날갯짓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호젓하게 풀밭에 내려앉은 평화를 물고 까치가 훌쩍, 까치 쪽으로 건너뛴 이후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좋은 위치를 선점한 모과들은 단단하게 움켜쥔 주먹을 닮았다. 누군가 저 모과를 따서 내팽개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이익을 누릴 무소불위의 존재들이다. 자리를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와의 대결은 서로 견줄만한 힘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동쪽을 차지한 모과에게 위협을 가할 그 무엇도 없기에 동쪽의 모과는 절정을 누리며 노랗게 익어간다. 자유경쟁이 허용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기업의 승자독식처럼 예측된 결말이다. 그러나 삶에도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어느 날,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한 모과들, 내려만 보던 그 바닥이 마지막 몸을 눕힐 지점이었다. 무르익어 더는 할 일이 없어진 모과들을 나무는 버리기로 결심한 것일까.
때가 차면 그 어떤 힘으로도 버틸 수가 없어 자리를 내주어야 하듯이 쿵, 소리를 유언처럼 남기며 나무를 떠난 모과의 마지막 소임은 남은 향기를 내주는 일이다. 향기를 움켜쥔 모과는 도저히 이 자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퉁명스런 표정으로 선반에 덩그마니 앉아있다. 비바람에도 모과를 잡아주던 믿었던 꼭지가 그렇게 허망하게 손을 놔버릴 줄 누가 알았으랴. 어느 날 높은 곳에서 추락한 자의 얼굴처럼 불쑥 내민 한 덩어리 의혹은 갈색 반점이다.
은폐된 의혹이 드러나듯이 모과의 몸속에 고인 어둠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향기는 점점 퇴색하고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갈색으로 변해간다. 소리없이 시나브로 목을 조이는 기운을 뿌리치지 못한 채.
조정인 시인은 모과가 변해가는 모습을 “지층의 그늘을 표면으로 다 우려낸 지상의 마지막 얼굴 같은 모과”라고 표현했다. 볕을 갈애하던 모과의 심장은 차디차게 식어가는 중이다. 또 어느 날의 모과는 요절한 외로운 시인의 초상처럼 기울어간다. 너머의 시간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이제 체념의 몸짓인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을 때 시끄럽던 생애는 고요해지고 수평적 평온이 찾아온다. 이 평온은 현생이 아닌 저 너머의 시간이기에 한 생애를 마감한 죽음으로 읽힌다.


동쪽과 달리 서쪽은 해가 지는 쪽이어서 짧은 늦볕이 다녀간다. 서쪽의 모과나무들은 아침부터 해를 받는 동쪽에서 가장 먼 곳에 살고 있다. 빛이 오기까지 기다림으로 살아야 하는 서쪽은 “하루의 끝”이다. “끝에서 출발하는 처음”은 얼마나 고달플까. 그렇게 한 번도 처음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마지막 저녁볕에 슬픔을 말리며 그늘진 곳에 모여 살아간다.
동쪽의 모과가 온몸으로 서쪽인 모과와 함께 어슴푸레한 꿈속을 천천히 건너가는 때는 노을에 물든 저물녘이다. 동쪽과 서쪽이 손을 잡고 공존하는 것, 그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지만 꿈속의 이야기처럼 요원한 일이다.


한때 모과가 차지한 자리는 “빛이 싹 트는 자리”이다. 마른 나무에 물이 오르고 새로운 움이 트려면 ‘봄’이 와야 한다. 물경, ‘봄’은 혁명이다. 누가 저 메마른 들판을 연둣빛으로 일으키는가. 나무 한 그루가 일어서는 것은 바람이 깃들고 햇살이 내려앉고 새가 둥지를 틀 집 한 채를 짓는 일이어서 ‘봄’은 거저 오지 않는다. 세찬 추위와 매서운 바람을 견디듯이 산통을 겪고 좁은 산도를 거쳐 세상은 첫밗을 맞는다.
그런데 봄이 오기 전 벌써 그 위치를 노리는 것들이 위, 아래 옆을 노리고 벌써 동쪽에 와있다. 동쪽을 차지한 모과들, 기름이 반지르르 실한 모과들은 볕을 탐욕스럽게 삼키며 자리를 굳혀갈지도 모른다.


옛말에 모과를 보면 네 번 놀란다고 한다. 울퉁불퉁 못생겨서 놀라고, 못생겼는데 뜻밖에 향기가 좋아 놀라고, 노랗게 익어 먹음직한데 깨물어보면 단단해서 놀라고, 못생긴 것이 약효가 좋아 놀란다고 한다. 외모지상주의에 물든 이 시대에 모과는 얼마나 많은 것을 시사(示唆)하는가. 시인은 시를 짓기 위해서는 관념화된 언어와의 싸움을 불사해야 한다. 모과가 지닌 상투성 이미지를 깨뜨린 「모과의 위치」는 오히려 신선하게 읽힌다.
동쪽에서 출발한 태양의 도착지는 서쪽이듯이 태어나는 순간 서쪽을 향해 가는 세상의 모든 것들, 반드시 서쪽으로 기울게 되어있는 결말은 이미 신이 정해놓았는데 우리는 남보다 좋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지름길을 찾고 남의 길을 가로막고 빼앗지는 않았을까.
김무웅 시인은 시 「말코손바닥사슴뿔」 에서 “수사슴 두 마리가 힘을 겨루다가 엉킨 뿔을 풀지 못하고 함께 죽어 뿔만 남아 굴러다닌다”고 하였다. 한 덩어리로 엉겨 땅에 뒹구는 두 개의 뿔, “공격과 방어”로 힘을 상징하던 뿔이 오히려 두 마리의 목숨을 공격한 것이었다. 과유불급을 언급한 작품이다.


시는 현실의 변화를 예감하고 그 변화에 참여하며, 나아가 그 변화의 의미를 집요하게 질문하는 것이라고 한다. “시적인 것”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된 「모과의 위치」 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고요한 풍경 속에 넘치는 에너지가 숨어있다. 정답을 알면서도 지나친 욕심이 오답을 선택하지는 않았을까?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모과나무 가지에 다닥다닥 매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詩』 2021.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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