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마경덕 시 모음

우물 / 마경덕 눈물이 다만,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마른 몸에서 물이 솟는 건 내 몸 어딘가에 우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 깊은 곳에 영혼이 물처럼 고여 있는 것이다. 흐르는 눈물은 내 영혼의 하얀 이마이거나 지친 발가락이거나 슬픔에 퉁퉁 불은 손가락이다. 영혼은 고드름이나 동굴의 석순처럼 거꾸로 자란다. 이것들은 모두 하향성이다. 근원을 향해 생각이 기울어 있다. 내가 나에게 찔리는 것, 슬픔이 파문처럼 번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석순처럼 자란 영혼을 손수건으로 받으면 발간 핏물이 든다. 나는 피 젖은 손수건 석 장을 가지고 있다. 그 오래된 손수건을 차곡차곡 접어 냉동실에 두었다. 꽁꽁 얼어붙은 냉동고의 영혼들은 더 많은 우물을 만들고 영혼을 생산한다. 고드름처럼 자라 맹물처럼 ..

좋은 시 2022.05.08

강적들/신미균

강적들 詩人 신미균 ​ 의자 모서리에 다리를 부딪혔다 의자 모서리는 그대로인데 내 다리가 찢어졌다 ​ 책이 발등으로 떨어졌다 책은 멀쩡한데 발등에 멍이 들었다 ​ 땅바닥에 넘어졌다 땅은 아무 이상이 없는데 내 무릎만 깨졌다 ​ 스타킹을 신다가 스타킹 고무줄은 생생한데 손을 베었다 ​ 꼭 딱딱한 것들한테만 당하는 줄 알았는데 야들야들한 것들도 칼날을 숨기고 있다 ​ 세상에 만만한 것들이 없다

좋은 시 2022.04.28

다소곳이 오 4편/이삼현

다소곳이 외 4편 / 이삼현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며 또, 이만큼 자랐구나 살았구나 이 길이만큼의 목숨을 잘라내며 기쁨도 조금 감추고 살아온 슬픔도 조금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지난 무덤덤한 날들을 미움인 줄도 모르고 섞인 흰 머리카락을 함께 자른다 동에서 서로 저무는 달처럼 아내 쪽으로 기울어 잠든 밤에도 너는 깨어 있었구나 일손을 놓지 못한 순간에도 칼바람이 뿌리를 드러낸 틈새 속에서도 너는 속도를 잃지 않았구나 키를 키웠구나 밀어 올렸던 성장판은 닫히고 가슴은 뜨거워지는 걸 잊었지만 또, 이만큼 깎는구나 버려야 하는구나 사진: 세상을 보는 또 다른눈 양파 아내의 부엌에 까다 만 눈물 한 바가지 담겨있다 나이를 과속할수록 소음이 심한 남편이지만 웃으며 동승해주는 것이 고마워 모처럼 까다만 눈물..

좋은 시 2022.04.22

나무의 꿈 / 문정영

나무의 꿈 / 문정영 내가 직립의 나무였을 때 꾸었던 꿈은 아름다운 마루가 되는 것이었다 널찍하게 드러눕거나 앉아있는 이들에게 내 몸 속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낮과 밤의 움직임을 헤아리며 슬픔과 기쁨을 그려 넣었던 것은 이야기에도 무늬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내 몸에 집 짓고 살던 벌레며, 그 벌레를 잡아먹고 새끼를 키우는 새들의 이야기들이 눅눅하지 않게 햇살에 감기기도 하고, 달빛에 둥글게 깎이면서 만든 무늬들 아이들은 턱을 괴고 듣거나 내 몸의 물결무늬를 따라 기어와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의 꿈속에서도 나는 편편한 마루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신비롭지 않을 때쯤, 나는 그저 먼지 잘 타고 매끄러운 나무의 속살이었을 뿐, 생각은 흐려져만 갔..

좋은 시 2022.04.16

장조림/길상호

장조림 길상호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의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스위치를 끄면 어둠이 고여드는 방 밤은 적당히 짜고 달고 매콤하고 얽힌 손길에 더는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지금은 저 방에 나란히 갇혀야 해요 배꼽 속 지루한 인연이 모두 우러나오고 눈에 담긴 통증도 흐물흐물 풀리면 액자 속 다정했던 시절로 우리 찰칵 찰칵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요 방 안 가득했던 어둠이 졸아들면 정수리에 모여든 쓸쓸한 거품을 걷어주면서 이제 어떤 말에도 쉽게 상처받지 않는 짭조름한 심장을 갖고 살기로 해요 한없이 뒤척이게 되더라도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배어들기 위한 일 검은 밤이 너무 일찍 끝나버리면 안 되니까 심장의 불꽃을 중불로 내려주세요

좋은 시 2022.04.06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꿈/하여진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꿈 하여진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저녁의 문고리에 묶어두고 온 예순두 살 금례씨의 걱정이 교실 문턱까지 따라온다 틈만 나면 아픈 나이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희망야학 교실에는 저녁 7시가 켜진다 쪼글쪼글한 입술 괄약근이 열렸다 닫혔다 ㅏㅑㅓㅕㅗㅛㅜㅠ 비누 물방울처럼 소리가 둥둥둥 떠오르고 누리반 교실은 힘껏 달구어진다 뜨거운 물에 넣으면 원래대로 부풀어 오르는, 탁구공처럼 학생들의 찌그러진 마음이 부풀오 오른다 뭉턱뭉턱 빠져나간 젊음과 늘어나 버린 시력과 휘어지고 주름살 진 꿈을 구부리고 앉아 종이에 한 땀 한 땀 그려박는 글씨들 바다를 쓰면 바다 냄새가 나고 꽃을 쓰면 향기가 나고 새를 쓰면 새울음 소리가 나고 네모 칸 밖으로 자꾸 삐져나온 바다, 받침을 빠뜨린 태양을 지우고 다시..

좋은 시 2022.04.06

부산/ 손택수

부산/ 손택수 솥이라면 바닥이 까맣게 탔겠다, 누룽지 긁는 쾡한 숟가락에 밑바닥 구멍이라도 났겠다. 울 아버지 밥 벌러 온 땅 밥 벌러와 병을 얻고 누운 땅 대학병원 창문 밖 산과 산 사이가 말 그대로 가마솥 모양이다. 소금이라도 굽듯 산과 산 사이에 바다를 퍼담고 있다. 벚꽃이 산능선을 끓어오른다. 밥거품처럼, 무쇠솥뚜껑 들어 올리는 몇 해만 몇 해만 더 머물고 뜨자던 땅 산능선 기어오른 집 차마 떨치지 못하고 쉰 해를 더 눌러앉고 만 땅 꽃빛이 까칠한 능선 경계를 넘어간다. 제 몸을 넘어가는, 넘 어가는 저 산빛 묵직하게 내려앉은 몸을 들어올리는 산빛, 살도 아니고 뼈도 아닌데 몸은 몸이라 그친 몸을 들썩거린 다, 며칠째 깨어나지 않는 이마를 짚고 돋아난 소금별 하나.

좋은 시 2022.04.06

등받이의 발명 /배종영

등받이의 발명 배종영 의자는 누구든 앉히지만 스스로 앉아본 적은 없다 의자가 특히 이타(利他)적 사물인 것은 등받이의 발명 때문이다 사람의 앞이 체면의 영역이라면 등은 사물의 영역이지 싶다 기댄다는 것, 등받이는 혈족이나 친분의 한 표상이지도 싶다 갈수록 등이 무거운 사람들 등받이에 등을 부려놓고 비스듬히 안락을 느끼는 것이다 언젠가 본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취한 남자가 끝까지 넘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몸에 등받이 달린 의자 하나 들어 있지 싶었다 취약한 곳에는 대체로 이타적인 것들이 함께 있다 혈혈단신한테도 온갖 사물이 붙어있어 결코 혼자인 것은 아니지 싶다 등받이는 등 돌리는 법이 없듯이 나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등에서 절대적인 등을, 등받이를 배운 사람이다 계산 없이 태어난 사물은 없지만 정..

좋은 시 2022.03.28

가을 무렵 악기 한 소절/박성현-

-가을 무렵 악기 한 소절/박성현- ​ ​ 담장 밑 버려진 소주병에 바람이 들었습니다 볕이 내려앉아 알맞게 데우고 갔습니다 날벌레 몇 마리도 깊숙이 들어갔다 걸어 나왔습니다 조용히 숨죽이며 날개를 접었습니 다 어디선가 금 간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모락모락 부풀고 느릿느릿 퍼졌습니다 악보가 수집하지 못한 소리라 생각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음표와 음표 사이에 고여 있는 말들이 었습니다 멀어서 늦은 당신처럼 기록되기를 잠시 멈춘 가을, 그 무렵의 악기 한 소절이 늦은 달을 틀어 놓고 있었습니다

좋은 시 2022.03.24

입 없는 돌/유안진

입 없는 돌 유안진 돌은 입이 없어 먹이사슬에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아득한 저 시대에는 돌도 입을 가져 먹고 살았는가. 돌이 먹은 수억만 년 전의 동식물들이, 소화되지도 못한 채 미 라가 되어 박물관에 모였다. 입을 가진 돌은 아직도 먹어야 사는가. 전시장 수석(壽石)에는, 먹어 온 천둥과 번 개 강물과 바닷물, 달과 별빛 눈 서리와 비 안개가 보인다. 물과 바람과 짐승의 소리 까지, 더러는 소화되고 더러는 변형된 채 훤히 내비친다 얼비친다. 온 몸으로 삼켜 먹고도 입 없는 듯 입을 감춘 돌. 보리매미 울음조차 핥아 빨아 마 시고, 시침떼며 살찐 몸에 자욱진 문양. 돌의 몸 돌의 색깔도 그의 식욕이었다. 고 요는 아니었다.

좋은 시 2022.03.18

돌/손진은

돌 손진은 노당리 뒷산 ​홍수 넘쳐 물살 거친 계곡 밑으로 ​쪼그만 돌들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노당리의 산과 들 ​지난 수십 년의 계절과 햇빛 바람 다져넣고도 ​동으로 혹은 서으로 머릴 누이고 ​낯익은 백양나무 강아지풀 개구리 울음 뒤로 한 채 ​이 마을 사람들 대처로 대처로 나가듯 ​물살의 힘 어쩌지 못하고 떠내려간다. ​떠내려가서 ​형산강 하구나 안강 쪽 너른 벌판 ​낯선 땅에서 발붙이며 ​지푸라기 다른 돌들과 섞여 부대끼거나 ​길이 막히면 ​굽이진 어느 구석 외진 도랑에서 비를 긋거나 ​구름자락 끌어 덮으며 길들여지다가 ​비가 오면 또 떠밀려갈 것이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그냥 안주하기도 하는 돌들의 행려(行旅)여. ​몇몇 친숙한 식구가 떠난 뒷산 계곡의 남은 돌들 ​더 깊은 시름에 잠기..

좋은 시 2022.03.17

햇살요양사/손준호

햇살 요양사 / 손준호 뭉그적뭉그적, 해종일 저러고 있다.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에 푸져 앉아 혼잣말을 무슨 알약처럼 복용하고 있다. 먼길 오느라 솔찬히 욕봤소, 합죽한 노파는 함부로 반말을 던지지는 않았다. 기력 잃은 대문은 입을 헤벌쭉하고 민무늬 불록담은 군데군데 관절이 나갔다. 빨래집게는 틀니로 헐겁게 바람을 물었고 툇마루를 수발 중인 섬돌은 등허리가 반질반질했다. 해진 소매 끝단에 겨운 졸음 매달고 빈 들녘 볏단같이 모짝모짝 말라가는 노구. ​ 어디 좀 봐요, 햇반은 잘 데워 드시나요? 볕살 몇 장 꺼내 정수릴 쓰담쓰담하자 터앝머리 모과나무가 참새 떼 한 됫박 쏟아붓고 왁자해진 독거에 마당은 혈색이 확 도는데, 외려 먹구름처럼 그늘지는 안색. 문득 눈물길로 차올랐을 것이다. 손금을 툭 놓친 사람, ..

좋은 시 2022.03.13

율포의 기억/문정희

율포의 기억/문정희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좋은 시 2022.03.11

돌/함민복

돌 매끈한 강돌이 있다 돌의 나이테는 돌 바깥에 있다 돌의 나이테는 닳아 없어진 만큼 있다 돌의 나이테 속에 돌이 있다 점점 시야가 흐려진다 - 함민복(1962~ ) "강돌에는 흘러간 물의 물살이 기록되어 있다. 빠르고 센 물살은 동의 얼굴을 매끈하게 만들었다. 나무는 나이를 알 수 있는 둥근 테를 몸 속에 만들지만, 돌은 나이테를 겉면에 새긴다. 작아진, 더욱 매끈해진 돌일수록 나이가 많 다. 점점 몸집이 작아지고 겉쪽이 반드럽게 되면서 돌은 고령에 이른다. 돌의 나이테는 무었일까? 시 '돌에'를 읽어보면 시인은 '돌에는/ 세필 가랑비/ 바람의 획/ 육필의 눈보라/ 세월 친 청이끼// 덧씌운 문장 없다/ 돌엔/ 부드러운 것들이 이미 써놓은/ 탄탄한 문장 가득하니' 라고 썼다. 아마도 돌 의 나이테 문양..

좋은 시 2022.03.08

늦가을 문답 ― 임영조(1943∼2003)

늦가을 문답 ― 임영조(1943∼2003) 그동안 참 열심히들 살았다 나무들은 마지막 패를 던지듯 벌겋게 상기된 이파리를 떨군다 한평생 머리채를 휘둘리던 풀잎도 가을볕에 색 바랜 몸을 뉘고 편하다 억척스레 살아온 저마다의 무게를 땅 위에 반납하는 가벼움이다 가벼워진 자만이 업을 완성하리라 허나, 깨끗하게 늙기가 말처럼 쉬운가 … (중략) … 잎 다 진 청미래 덤불 가시에 찢긴 저녁 해가 선혈이 낭자하게 저문다 잡목숲 질러 식은 조각달 물고 가는 저 부리 길고 뾰족한 홀아비 새는 거느리는 식솔이 몇이나 될까 내 빈 속이 문득 궤양처럼 쓰리다 어서 그만 내려가자, 더 늦기 전에 가을의 정취는 쓸쓸함이고, 정취의 최고조는 늦가을이 제격이다. 꽃도 지고 잎도 지고 이제는 가을마저 지려고 하는 때다. 이제, 이 ..

좋은 시 2022.03.07

홍어/김선태

홍어 - 김선태 ​ ​ 한반도 끄트머리 포구에 홍어 한 마리 납작 엎드려 있다 폐선처럼 갯벌에 처박혀 있다 스스로 손발을 묶고 눈귀를 닫아 인고와 발효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 아무도 없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 다만 이 어둡고 비린 선창 골목에서 저 혼자 붉디붉은 상처를 핥으며 충만한 외로움을 누리고 있다. ​ 그리하여 비바람 눈보라는 쳐서 그 신산고초에 제맛이 들 때 오래 곰삭아 개미*가 쏠쏠할 때 형언할 수 없는 알싸한 향기가 비로소 천지간에 가득하리라. ​ ​ *개미 : 곰삭은 맛 ​ ​ ​ 홍어를 잡숴 보셨는가? "형언할 수 없는 알싸한 향기”를 풍기는 홍어,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것의 “알싸한 향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 그 곰삭은 냄새가 역겹기 때문이다. ​ 아무튼 이 시에서 홍어의 이미지..

좋은 시 2022.03.03

흑산도/김선태

흑산도 김선태 상한 짐승처럼 절뚝거리며 스며들고 싶었다 더는 갈 수 없는 작부들의 종착역 슬픔은 더 깊은 슬픔으로 달래라 했던가 늙은 작부 무릎에 슬픔을 눕히고 그네의 서러운 인생유전을 따라가고 싶었다 삭을 대로 삭은 홍어 살점을 질겅질겅 씹으며 쓰디쓴 술잔을 들이켜고 싶었다 그렇게 파란만장의 시간을 가라앉혀 제대로 된 슬픔에 맛이 들고 싶었다 때론 누추한 패잔병처럼 자진 유배를 떠나고 싶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천형의 유배지 절망은 더 지극한 절망으로 맞서라 했던가 후미진 바닷가에 갯고둥 하나로 엎어져 흑흑 파도처럼 기슭을 치며 울고 싶었다 다시는 비루한 싸움터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애간장 까맣게 타버린 한 점 섬이 되고 싶었다

좋은 시 2022.03.01

염장고등어/우은숙

딱 한번 우은숙 가슴에 달빛 하나 옮겨 심지 못한 내가 뼈에 밴 눈물의 독소 뽑지도 못한 내가 딱 한번 물들겠다고 노을 끝에 서있다 염장 고등어 우은숙 뱃속의 짠내는 그만의 무기다 심해를 기억하는 등푸른 솔기들이 숨겨둔 결기를 깨워 천지간에 활을 쏜다 밀쳐낸 파도만큼 단련된 몸의 언어 저 혼자 깊어지는 뜨거운 침묵 속에 허기진 두 눈 굴리며 비린내로 흔든다

좋은 시 2022.03.01

벽, 시래기 국밥/이남순

벽/이남순 경의선 지척에 두고 돌고 돌아온 백두산 대못 친 가슴팍이냐, 혈흔 같은 말뚝 앞에 한참을 그냥 선채로, 찬비에 젖어 왔다 시래기 국밥 이남순 그 집 귀신 되라하신 아버지 명을 따라 죽을 둥 살 둥으로 나물 팔아 연명하던 당고모 시집살이가 구전처럼 이어진다 전쟁은 끝났는데 돌아오지 않는 남편 시부모 봉양하며 유복자 키우느라 일생을 먹어왔다는 저 국밥 이야기

좋은 시 2022.03.01

오늘의 두부/이영식

오늘의 두부 이영식 짐작하겠지만 취하고 나면 먹어치우는 게 상책이다 왁자한 시장 좌판에 발가벗고 나앉은 아라한(阿羅漢), 제 몸 갈라 먹을 중생 앞에서도 몸가짐 초연하시다 떼구름처럼 엉겼던 잡념일랑 모판에 눌러 짜서 삼베 천으로 걸러냈다 좌우, 어느 쪽 색깔이나 사상에 기울어지지 않는 맛으로 무엇을 도모하지 않는다 두부의 ‘부(腐)’는 썩었다는 뜻이 아니고 뇌수(腦髓)처럼 연하고 물렁물렁하다는 전갈이니 보시라! 네모반듯하게 각이 졌지만 안과 밖 한결같이 순한 생각만 한다 삶의 비린내 진동하는 틈에서도 제가 건너온 불보다 더 뜨겁게 칼 디밀고 들어올 순명(順命)의 시간을 초연히 기다리고 있는 오늘의 두부, 어제의 뼈저린 후회나 내일의 걱정으로 콩새만한 생각에 갇힌 당신께 기원전부터 전해오는 진국의 경전 한..

좋은 시 2022.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