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푸른 기와/허영숙

푸른 기와 허영숙 우체부가 바람을 던져 놓고 가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집 밤이면 고양이들이 푸른 눈빛을 켜드는 오래된 빈집에 언제부터 들어와 살았나 낡은 전선줄을 타고 지붕을 새로 올리는 담쟁이 땡볕이 매미 울음을 고음으로 달구는 한낮에도 풋내 나는 곡선을 하늘하늘 쌓아올리는 저 푸른 노동 질통을 지고 남의 집 지붕을 올리던 가장家長이 끙끙 신열을 앓으며 뒤척일 때 얼핏 들여다 본 어깨의 멍자국 같은, [감상] 생각만으로 이뤄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시절을 무성하게 덮은 담쟁이 넝쿨도 땡볕이며 비바람 마다하지 않고 푸른 허공을 길어 올린 고픈 노동의 손금일 터이다 한 가정을 꾸리고 기업을 경영하고 나라를 이끌어가는 일 또한 담쟁이의 거친 손금과 닮아 있는 것을 본다 담쟁이의 푸른 기왓장에서 온갖 어려..

좋은 시 2022.07.17

간절곶/최정신

간절곶 최정신 소리 내어 울, 일이 산, 만큼 쌓이는 날이 있다 천 개의 손짓으로 천 개의 합장을 밀고 오는 간절곶에 파도가 산다 산다는 건 밀리고 밀리는 일 물살이나 뭍살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 출렁이며 지글거린다 바람이 간짓대 포구에 실없는 말을 건다 포말이 하얀 이를 들어내 대꾸를 한다 저들도 혼자는 외로웠나 보다 기척 없이 오는 봄도 제 분에 겨워 저무는 중이라고 아직도 들어야 할 짜디짠 푸념이 모래주름 현을 뜯는다 화암化巖 주상절리에 핀 겹겹 사연은 언제 가서 다 듣나 억겁을 퍼 내어도 마르지 않는 시간 앞에 삭제한 다짐이 로그인 된다 예매를 빌미로 몸은 부산하고 마음만 사나흘 주저앉아 그렁그렁 깊어진다 [감상] 산다는 일은 이리 치이고 저리 부딪히며 스스로를 몽글리는 일일 것이다. 세상과 어울..

좋은 시 2022.07.17

북엇국 끓는 아침/이영식

북엇국 끓는 아침 이영식 생목이 올라 눈뜬 아침, 아내는 북어를 패고 있다 우리 집 세간에도 패고 두드려 방짜로 펼쳐놓을 무엇이 남아 있던지 빨랫돌 위에 난장을 치고 있다 베링해에서 겨울 산정까지 가시뼈 움켜쥐고 얼리고 말리던 난바다 한 덩이, 살점 튀도록 곤장치레 당한 뒤에야 황금빛 속내 풀어놓는다 일찌거니 명란, 창란젓으로 장기臟器 내어준 보시덩어리 냄비 속 대파 몇 뿌리와 한통속으로 끓는다 기다리면, 내게도 올 것이 있다는 국 한 그릇의 희망이 뜨는 아침 어둠 벗은 길들이 환하게 일어선다. [감상] 지아비의 속풀이를 위해 북어 한 마리를 패대는 아낙의 따뜻한 마음을 읽는다 얼리고 말린 황금빛 속내에 우러나는 파란 바다와 바람 한 덩이, 술김에 벗어둔 골목이며 길들이 마침내 환하다

좋은 시 2022.07.17

막사발/김종제

막사발 구석기김종제 그래, 너희들 몇몇 가진 자들의 안방에 고이 모셔둔 백자도 청자도 아닌 것이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개똥인지 언년인지 이름도 모르고 낯도 설다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무기라던가 원하지도 않던 불구덩이에서 잔뜩 달구어져 잘못 태어난 자식과도 같이 버리기도 뭐 해서 그냥 내버려 두다가 제대로 병구완 받지도 못해 황달기 오른 얼굴에 얼룩지고 껄끄럽고 잘 부서지는 우리네 민초(民草)와 왜 이리 닮았을까 그저 막 쓰다가 밥도 못 받아 먹고 굴러 다니는 그릇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먹고 살기 위해 사기막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 우리 민족이 아니겠느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물이나 져 나르다가 진흙이나 개다가 발물레로 꼬박을 올려놓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종지 한 개를 만든다 숫돌에 간 낫..

좋은 시 2022.07.17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 박제영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 박제영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초등학교도 다 채우지 못했으니 한글 쓰는 일조차 어눌하시다. 아들이 시 쓴답시고 어쩌다 시를 보여드리면 당최 이게 몬 말인지 모르겠네 하신다. 당연하다. 어머니는 참 억척이시다. 17살, 쌀 두 가마에 민며느리로 팔려와서, 말이 며느리지 종살이 3년 하고서야 겨우 종년 신세는 면하셨지만, 시집도 가난하기는 매한가지요, 시어미 청상과부라 시집살이는 또 얼마나 매웠을까, 그래저래 직업군인인 남편 따라 서울 와서 남의 집살이 시다살이 파출부살이 수십년 이골 붙여 자식 셋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 보냈으니, 환갑 넘어서도 저리 억척이시다. 이번에 내 시집 나왔구만 하면, 이눔아 시가 밥인겨 돈인겨 니 처자식 제대로 먹여 살리고는 있는겨 하신다. 당연하다...

좋은 시 2022.07.17

종/윤명수

종 / 윤명수 하늘에 목을 매고 맞는다 속을 텅 비운 채 맞는다 영문도 모르고 맞는다 맞는 줄도 모르고 맞는다 살가죽이 벗겨지도록 맞는다 아픈 곳만 계속 맞는다 상처 위에 상처가 쌓이도록 맞는다 맞아야 할 때 맞지 않으면 불안하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면 불안하다 맞으면 맞을수록 청아해지고 내가 아프면 아플수록 세상은 가벼워진다 기꺼이 매를 맞는다 죽도록 매를 맞는다 웃으면서 맞는다 ********************** 퇴근길에 유난히도 내 그림자가 흐느적이는 날, 솜뭉치 같은 몸이 그래도 가벼운 것은 나로 인해 쑥쑥 커가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종,이라는 소재를 통해 이 땅의 가장들의 애환을 위로해 준다. 왠지 음미할수록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힘이 불끈 난다. 자칫 자학적으로 보일지..

좋은 시 2022.07.04

꽃살문/이정록

꽃살문/이정록 꽃에는 정작 방년(芳年)이란 말이 없다네 그래, 천년만년 꽃다운 얼굴 보여주겠다고 누군가 칼과 붓으로 나를 피워놓았네만 그 붓끝 떨림이며 칼자국, 바람에 다 삭혀내야 꽃잎에 나이테 서려 무는 방년 아니겠나 꽃이란 게, 향과 꿀을 퍼내는 출문이자 열매로 가는 입문이라 나도 고개 돌려 법당 마루에 오체투지하고 싶네만 마른 주둥이 훔치는 햇살 천년 바람 천년, 법당 마당의 싸리비질 자국만 돋을 새김하고 있네 그렇다네, 이 문짝에 염화(拈華) 없다면 어찌 어둔 법당에 미소(微笑) 있겠는가? 풍경소리며 목탁소리에도 나이테가 있는 법, 날 쓰다듬고 가는 저 달빛 구름 그림자처럼 씨앗 쪽으로 잘 바래어 가시게나

좋은 시 2022.07.01

막돌도 집이 있다/홍신선

막돌도 집이 있다 홍신선 주워 모은 잡석들로 터앝 배수로 돌담을 쌓는다. 막 생긴 놈일수록 이 틈새 저 틈새에 맞춰본다. 이렇게 저렇게지만 뜻 없이 나뒹굴던 돌멩이가 틈새를 제집인 듯 척척 개인으로 들어가 앉는 순간이 있다. 존재하는 것치고 쓸모없는 건 없다는 거지 그렇게 한번 자리 찾아 앉은 놈은 제 자리에서 요지부동 끄덕도 않는다. 사람도 누구나 어디인가 제 있을 자리에 가 박혀 오 돌담처럼 견고한 70억 이 세상을 이룬다

좋은 시 2022.06.01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손택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손택수 명절 앞날 세탁소에서 양복을 들고 왔다 양복을 들고 온 아낙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내 양복 주름이 모두 아낙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 범일동 산비탈 골목 끝에 있던 세탁소가 생각난다 겨울 저녁 세탁, 세탁 하얀 스팀을 뿜어내며 세탁물을 얻으러 다니던 사내 그의 집엔 주름 문이 있었고 아코디언처럼 문을 접었다 펴면 타향살이 적막한 노래가 가끔씩 흘러나왔다 치익 칙 고향역 찾아가는 증기기관차처럼 하얀 스팀을 뿜어내던 세탁소 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들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다고 생각했던 집 세탁소 아낙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이 접혔다 펴지며 아련한 소리를 낸다

좋은 시 2022.06.01

2층 다락방/권경자

2층 다락방/권경자 가 닿을 곳 없는 구름덩이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갔다 들판 위를 휘돌던 바람이 문을 두드리다 돌아갔다 투명한 달빛이 밤이면 창에서 한참씩 쉬어갔다 언니의 첫사랑을 몰래 읽었다 국어선생님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공부보다 무언가 생각하는 일이 더 좋았다 일기장엔 혼자만 알 수 있는 기호가 늘어갔다 감추고 싶은 것들이 자꾸 쌓여갔다 하늘과 가까운 2층 다락방 엄마가 부르면 달빛에 얼굴을 묻고 잠든 척하였다

좋은 시 2022.06.01

관계 혹은 사랑/이재무

관계 혹은 사랑/이재무 못 박는다 벽은 한사코, 들어오는 막무가네의 순애보 밀어내고 튕겨낸다 그러나 망치 잡은 두툼한 손의 고집 벽은 끝내 막을 수 없다 일자무식하게 꽝꽝 박을 때마다 진저리치는 벽, 아주 인색하게 몸 열어 관계 받아들인다 단단한 살 헤집어 가까스로 뿌리내린 자의 저 단호하고 득의에 찬 표정을 보아라 벽은 못 품고 살아간다 들어올 때 아퍼서 울던 울음 뒤 생긴 상처 아물면서 못은 비로서 벽의 일부로 살아갈 수 있게 된것이다 아주 먼 후날 못은 벽 떠날 날 올지 모른다 그날의 벽은 이제 제 안에 깊숙히 박힌 사랑 내주지 않으려 끙끙 앓으며 또 한 번 검붉은 녹물의 설음 찔찔 짜낼 것이다

좋은 시 2022.06.01

이월의 우포늪 / 박재희

이월의 우포늪 / 박재희 우포늪은 보이는 것만의 늪이 아니다 어둠 저 밑바닥 시간의 지층을 거슬러 내려가면 중생대 공룡의 고향이 있다 원시의 활활 타오르던 박동이 시린 발끝에 닿기까지 일억 사천 만년 무수한 공룡발자국이 쿵쿵 가슴으로 밀쳐 들어온다 억겁을 버틴 가슴 벅찬 것들 나는 어느 백악기의 밀림을 걷고 있는 것일까 화석 속에 갇혔던 공룡이 어둠의 사슬을 풀면 왕버들 숲 어디쯤 나도 먼 중생대를 꿈꾸는 한 마리 공룡일까 감았던 눈을 뜨며 한 순간 전율했던 백악기를 빠져 나오자 물 속에 녹은 풀의 뼈마디와 각시붕어의 비린 향기가 물살 간질이며 깨어나고 있었다 늪, 어딘가에 있을 세월의 우체국 그 우체국에 부칠 사연을 이월의 찬바람이 쓰고 있는가 오랜 역사의 능선에 한점 불 밝히는 빙하기에 잠긴 공룡발자..

좋은 시 2022.05.31

담쟁이덩굴의 독법 / 나혜경

담쟁이덩굴의 독법 / 나혜경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 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닿는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 볼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출처] 담쟁이덩굴의 독법 / 나혜경 |작성자 마경덕

좋은 시 2022.05.31

대장간의 유혹/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김광규 제 손으로 만들지 않아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좋은 시 2022.05.29

빈 의자/나희덕

빈 의자 나희덕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준다 손 위에 번져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좋은 시 2022.05.25

골목세탁소 / 송향란

골목세탁소 / 송향란 그 작은 간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서동에서 범내골 넘어가는 골목어귀 오랜 세월 멈춰 선 시곗바늘처럼 늘 그자리에 서 있는 한낮에도 반쯤 꺾인 햇살 고여 있는 창 너머 때 절은 시간이 거미줄처럼 걸려 있다 낮은 담벼락 둘러친 찢겨져 나간 벽보 덧난 상처처럼 번져 간다 나뭇잎 배처럼 떠돌던 사람들 휘어진 골목 안으로 흘러든다 끝없는 폐허의 숲을 지나온, 살아가면서 구겨지고 뭉개진 것들 날마다 찾아들어 끈질기게 붙어있는 먼지 떨쳐내기 위해 몸살 앓는다 통증 털어낸 솔기마다 달아오른 다리미 뜨거운 입김을 뿜어낸다 반듯하게 다려진 옷들 서둘러 길 떠날 때까지 순한 양처럼 길가에 내걸려 허공을 끌어당긴다 페인트칠 떨어져 나간 간판 아래 무언가 말하려다 입 다문 유리창 붉은 글씨들 쓸쓸한 골..

좋은 시 2022.05.21

양파/이삼현

양파 / 이삼현 아내의 부엌에 까다 만 눈물 한 바가지 담겨있다 ​ 나이를 과속할수록 소음이 심한 남편이지만 늘 웃으며 동승해주는 것이 고마워 모처럼 까다만 눈물을 대신 깐다 ​ 거친 흙 속에 걸음을 뻗고 쑥쑥 자라 오른 흔적 이순으로 접어드는 우리 부부도 이제 뿌리와 줄기는 말라붙고 주먹만 한 결실로 남았다 ​ 툭, 던진 한마디에도 쉬 부스러지는 겉껍질 앞만 보며 참고 쌓아온 모래알 같은 기억 때문이다 식구들을 보듬었던 단단히 엉긴 흉터 딱지를 벗겨내니 웅크린 아내의 속살이 비치고 울컥, 눈이 아려온다 ​ 제 안으로 깊숙이 남편과 자식들을 껴안은 한 겹 또 한 겹 벗겨낼수록 작아만 가는 ​ 오늘 저녁 아내는 한 끼 행복을 위해 무슨 밥상을 준비하려 했을까 다 드러내지 못한 속내를 까며 어떤 그늘에 잠겨..

좋은 시 2022.05.21

한뎃잠/문성해

한뎃잠 문 성 해 장례식에서 돌아와 아침에야 밤잠을 잔다 돌아온 잠이 있고 돌아오지 못한 잠도 있다 병풍 앞에 둘러앉아 누군가의 한뎃잠을 지킨 사람들 그가 낯설게 뒤척이는 잠 속에 앉아 늦은 육개장을 집밥처럼 말아 먹어주고 (밤잠이 이리 환해도 될까!) 그가 켜둔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꽂혀 있었다 장례식이란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한뎃잠을 지척에서 지키는 일 돌아올 수 없는 잠에 대해 함구하는 일 생전 그와 같이 한 번도 누워본 적 없는 이들이 길고 지루하고 온전하게 (오, 하루치의 잠을 보시한 채) 한 개의 한뎃잠을 조문한 뒤 이 아침 방으로 돌아와 끊어진 밤잠을 다시 잇고 있다

좋은 시 2022.05.19

돼지 키우기/마경덕

돼지 키우기 마경덕 “돼지를 키워 학교에 가거라” 엄마의 한마디에 나는 돼지 세 마리의 철없는 어미가 되었다 집집마다 수챗가에 구정물통을 갖다 놓고 해거름에 거두러 다녔다 불어터진 밥알, 비린 생선대가리, 무 껍질, 시큼한 잔반냄새ⵈ 그것들이 몇 푼의 등록금이 되어주었다 동네 우물이 있던 윗집 턱수염이 거뭇한 자취생들이 우글거렸는데 내게 편지를 보내던 남학생도 끼어 있었는데 내가 그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휘파람을 불던 남학생들이 마루 끝에 앉아 키득키득 고1짜리 여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갈까 말까 수없이 망설이던 그 집 먹새 좋은 돼지를 굶길 수는 없어 침착하게, 아니 뻔뻔하게 눈빛을 갈아 끼우고 멀건 구정물을 따르고 무거운 양동이를 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섰다 그때마다 사춘기의 뒤통수가 따가웠다 ..

좋은 시 2022.05.13

어리굴젓/김경윤

어리굴젓/김경윤- 아침 밥상에 굴젓이 올라왔다 흰 보시기에 담긴 굴젓이 울다 지친 눈동자 같다 뻘밭 같은 생生을 살아온 울 엄매를 닮았다 남들 앞에선 늘 굴껍데기처럼 강해보였지만 당신의 생애도 팔 할은 눈물이었다 스물둘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칠순이 넘도록 갯바위에 쪼그려 앉아 굴을 까는 울 엄매 수심愁心 깉은 바다에는 얼마나 많은 파도가 울다 갔을까 그 얼얼한 세월 동안 생굴 같은 가슴 속도 죄 삭았으리 썰물 진 아침나절부터 밀물 드는 저녁 무렵까지 죽은 막내 생각 부도난 둘째 걱정 전화 한 번 없는 무정한 큰 놈 원망하다 혼자서 글썽해졌을 그 눈동자, 생각느니 내 오십 생애도 울 엄매 눈물을 파먹고 산 세월이었구나! 울다 지친 눈동자 같은 어리굴젓 아침 밥상 위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좋은 시 2022.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