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분갈이/박지현

분갈이 박지현 꽃 시장 난전에 핀 울긋불긋 봄꽃들이 지나가는 사람들 발길을 묶어둔 분갈이 흙 알갱이들 묵은 내가 알싸하다 뿌리 털어 걸러낸 겨우살이 몸살도 요리조리 햇볕에 골고루 버무린다 목울대 깊은 곳에서 쏟아지는 그을음들 못다 걸은 걸음들 한쪽으로 긁어내고 뒤쳐진 걸음들은 중심으로 앉힌다. 알뿌리 정토淨土의 봄날 물관부가 툭 터진다 - 출처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 시조. 봄꽃들이 예서 제서 난전을 차리고 있다. 그 꽃들 늘어놓고 사람들도 봄의 난전을 열고 있다. 어디서나 새로 핀 오밀조밀 화분들이 지나는 발길을 잡아챈다. 화분 하나만 바꿔도 봄이 밀려들어 오니 이참에 분갈이나 해보자고 꽃 고르는 손도 분주하다. 꽃들은 '저요, 저요'필요 없이 웃기만 잘하면 새 분으로 옮겨진다. 묵은내 털어내고 새로 ..

좋은 시 2022.02.28

잠시, 천 년이/김현

잠시, 천 년이 김현 잠시, 천년이 우리가 어느 생에서 만나고 헤어 졌기에 너는 오지도 않고 이미다녀 갓나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잠시, 천 년이 지난다 김현 1946 출처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시 깊을 대로 깊은 가을, 저무는 단풍들이 도심 고샅까지 뒤흔들며 가고 있다. 꽃보다 뜨겁게 타오르던 만산홍엽도 이제 떠나는 몸짓으로 스산하다. 앙상한 뼈대 같은 나뭇가지들만 전열을 가다듬듯 결연한 자세로 찬 바람을 맞는다. 그 사이로 아직 남아 있는 단풍 끝물이며 마른 풀잎들이 바람을 붙잡다 놓치다 몸부림을 친다. 미련 같은, 회한 같은 쓸쓸함 속으로 미처 불태우지 못한 채 입동을 맞은 어물쩍 단풍의 당혹감 같은 게 스친다. 항상 그랬던가. 하고 보면 뭔가 늘 놓치거나 뒤늦게 허둥대는 회한 따위를 더 많이 끼고 왔..

좋은 시 2022.02.28

노숙露宿 / 김사인

노숙露宿 / 김사인 ​ ​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 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은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좋은 시 2022.02.23

칼잠 / 최일걸

칼잠 / 최일걸 ​ ​ 칼잠을 자 본 사람은 알고 있다 삶이 얼마나 마모되어야 잠이 번득이는 날을 세워 칼에 이르는 건지 녹슨 양철지붕 같은 밤, 어떤 폭압이 저들을 협소한 공간에 몰아넣어 포화상태에 이르게 한 걸까 꿈마저 바닥을 드러낸 사람들이 바로 누울 수도 없는 생의 갈피갈피를 비비며 칼갈이를 하지만, 단 한 번도 칼잡이를 꿈꿔보지 못한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아 온돌이 되어 아랫목을 넓혀 가며 아궁이 보다 깊게 서로의 속을 헤아린다 부지깽이 같은 손으로 서로를 다독거리다 보면 군감자 보다 더 따스해서 입김 호호 불며 한 덩어리가 된 삶을 나누어 먹는다 겹겹의 칼날을 이룬 그들이 허기의 단속을 피해 곤한 잠으로 풀어지려면 무허가의 밤은 도대체 얼마나 울음을 삼켜야 할까

좋은 시 2022.02.23

‘아줌마’라는 말은 / 김영남

‘아줌마’라는 말은 / 김영남 일단 무겁고 뚱뚱하게 들린다 아무 옷이나 색깔이 잘 어울리고 치마에 밥풀이 묻어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은 낯설어 하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이 ‘아줌마’하고 부르면 낯익은 얼굴이 뒤돌아본다. 그런 얼굴들이 매일매일 시장, 식당, 미장원에서 부산히 움직이다가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짓는다 그렇다고 그 얼굴들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함부로 다루면 요즘에는 집을 팽 나가버린다 나갔다 하면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폭탄이 된다 유도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진 못하겠지만 뭉툭한 모습을 하고도 터지면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이웃 아저씨도 그걸 드럼통으로 여기고 두드렸다가 집이 완전히 날아가버린 적 있다 우리 집에서도 아버지가 고렇게 두드린 적 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

좋은 시 2022.02.23

삼겹살에 대한 명상 / 고 영

삼겹살에 대한 명상 / 고 영 ​ ​ 여러 겹의 상징을 가진 적 있었지요 언감생심, 일곱 빛깔 무지개를 꿈꾼 적 있었지요 불판 위에서 한 떨기 붉은 꽃으로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 적 있었지요 ​ 흰 머리띠를 상징으로 삼았지요 피둥피둥 살 바에는 차라리 불판 위에 올라 분신자살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지요 육질이 선명할수록 사상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거든요 달아오른 불판이 멀리 쏘아 올리는 기름은 발가벗은 내 탄식이었지요 ​ 몸 뒤틀리고 몇 번쯤 뒤집혀지고 나면 (제발, 세 번 이상은 뒤집지 마세요) 내 사명도 끝난 줄 알았지요 노릿하게 그을린 얼굴들이 참기름을 두르고 앉아 마늘처럼 맵게 미소를 주고받을 때 소원할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저 말라비틀어진 살점들을 어찌할까요 ​ 어쩌다 간혹 안부나..

좋은 시 2022.02.23

꽃밥/엄재국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 마른 나무에 목단, 작약이 핍니다 ​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 ― 엄재국, 〈꽃밥〉 전문 ​ 담양에서 태어났지만 갓난아이 때 이사 온 후 쭉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궁이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밥을 짓는 풍경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본 게 전부. 당연히 가마솥 밥을 먹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이 시의 매력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아궁이에 마른 장작을 밀어 넣어봅니다. 불이 붙은 나무에서 함빡함빡 목단, ..

좋은 시 2022.02.22

싹튼 양파들 / 조말선

싹튼 양파들 / 조말선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통화중 신호음을 들었다 나는 한번 시도한 일은 멈출 줄 몰랐다 나는 한번 들어선 길은 돌아갈 줄 몰랐다 뚜, 뚜, 뚜, 뚜 듣지 못할 응답이 나에게로 돌아와 꽂 혔다 차창 밖으로 발개진 꽃잎들의 통화가 소란스러워졌다 세상는 모 두 통화중이었다 나는 나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안에 통화중 신 호음이 가득 차올랐다 귓바퀴가 수백 다발의 코일을 빨아들였다 나는 나의 고백을 듣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디 간 거야. 나는 나의 응답을 찾지 않았다 나는 고독해졌다 나는 팽창했다 귓속에서 입이 찢어졌다 백년은 늙은 내 입 속에서 푸르른 말들이 나를 겨냥했다 조말선: 1965년 경남 김해 출생 1998년 으로 데뷔 시집: 소통되지 않는 전화와 ..

좋은 시 2022.02.21

유안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유안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겨울에는 불광등이 여름에는 냉천동이 생각나듯 무릉도원은 도화동에 있을 것 같고 문경에 가면 괜히 기쁜 소식이 기다릴 듯하지 추풍령은 항상 서릿발과 낙엽의 늦가을일 것만 같아 춘천(春川)이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할 거라 녹다만 눈 응달 발치에 두고 마른 억새 께벗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피고 있는 진달래꽃을 닮은 누가 있을 거라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에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 봄 한 아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 가 본적은 없지 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좋은 시 2022.02.20

대통밥 / 이정록

대통밥 / 이정록 화살도 싫고 창도 싫다 마디마디 밥 한 그릇 품기까지 수 천년을 비워왔다 합죽선도 싫고 죽부인도 싫다 모든 열매들에게 물어봐라 지가 세상의 허기를 어루만지는 밥이라고 으스대리니, 이제 더는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 땔감도 못되는 빈 몸뚱어리가 밥그릇이 되었다 층층 밥솥이 되었다 칼집처럼 식식대는 사람아 내가 네 밥이다 농담도 건네며 아궁이처럼 큰 숨 들이마셔라 불길을 재우고 뜸들일 줄 알면 스스로 밥이 된 것이다 하늘 끝 푸른 굴뚝까지 칸 칸의 방고래마다 밥솥을 걸고 품바, 품바, 품바 푸르게 타오르는 통큰 대나무들

좋은 시 2022.02.20

새해라서 당신/전영관

새해라서 당신/전영관 붙박이장처럼 완고해서 당신을 숨막히게 했다 채칼 같은 단호함을 명쾌함이라며 타협도 없는 일곱 살마냥 우쭐거렸다 고장난 전기주전자여서 그칠 때를 찾지 못하고 불안하게 했다 후춧가루만큼 예민한 성격을 자상함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떨어뜨린 소금 그릇처럼 강퍅으로만 악화시켰다 가득찬 쓰레기통 속 나태를 머뭇거림의 매력으로 둔갑시켰다 내심 반성하면서, 부러워하면서 도마만큼 자명한 타인의 결단들을 무모함이라 빈정거렸다 냉동고같이 외골수로 지겹게 했다 깨진 간장 항아리로 쓰러져 당신의 통곡이 응급실을 채웠다 가족이란 천막 안에서 당신을 막막하게 했다 무관심을 고부 관계의 중립이라 착각했다 사위 노릇을 손님인 척하는 것으로 알았다 눈치 없음을 시라는 몰입의 부작용이라고 방심했다 동그란 뒷모습에서 ..

좋은 시 2022.02.19

부왕산터에서/전영관

부왕산터에서 기단도 버젓한데 기둥 없다고 기와가 스러졌다고 공간까지 무너진 건 아닙니다 바람은 누대의 습성대로 추녀에 달려 있던 쇠붕어를 찾습니다 잔해를 헤치고 마루판까지 뜯어간 산촌 필부들도 쉽게 아궁이에 던지지는 못했을 일입니다 사천왕이 출타 중이니 승병인 양 불두화가 법당 협시를 지속합니다 동지까지는 달포도 남지 않았는데 초록 발심(發心)을 견지합니다 나의 문장은 삽날에 찍힌 뱀의 몸짓 계절병으로 흔들리다 풍경에 밑줄을 긋습니다 구름이 백운대 이마를 훤하게 씻어놓았습니다 터라는 어휘는 과거형이면서 다가올 것에 대한 예감이기도 합니다 종결과 착수가 맞물리는 11월 폐업과 개업이 하나의 화환에 나란한 문구로 걸린 11월 끝까지 폐허라고 말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도 있음을 부언하지 않겠습니다 (전영관 시..

좋은 시 2022.02.19

약속도 없이/전영관

약속도 없이 전영관 하룻밤 물에 불린대도 멥쌀의 찰기로는 허기를 채우지 못할 거 같아 찰밥 해드려야 안심이지 싶은 사람 하나 있다 수수꽃다리가 조청만큼 달달하니 서둘러 왔는데 늦었다 해도 넘겨줄 수 있겠다 찬 없는 두레상에 모셔도 결례는 아니려니 어스름 무렵에야 찹쌀 뼈가 다 무르면 만월과 겸상으로 올려드리련다 비린 것 한 토막을 앞으로 밀어놓고 잔가시 없는 등 쪽으로 떼어드리련다 숭늉 권하는 동안도 꽃은 피고 봄은 뜸 들고 여름을 당겨올 것처럼 눈빛이 짙어지리라 창밖으로 만발한 이팝나무 숭어리가 보인다 바람으로 씻고 늦은 안개에 불려 헛밥이나 짓는다 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봄을 다잡아보려 찰밥이라 고집 부리는 것이다 내 것인지네 것인지도 모르게 뒤엉겨 어쩔 수 없으니 주저앉자고 생떼라도 써볼 사람을 기..

좋은 시 2022.02.19

볶은 콩/마경덕

볶은 콩 ​ 마경덕 ​ ​ 날콩을 볶는다 비린 피가 고소해지도록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콩, 뜨거운 냄비를 주걱으로 휘저어도 아직 비리다 타닥타닥 튀어오른다 콩의 말을 한 번도 배운 적 없어 참 다행이다 내가 아는 말은 도르르, 콩콩, 데굴데굴, 겨우 그 정도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흩어지지 않게 자루에 넣거나 봉지에 담는 정도 둘러앉아 콩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들 콩 한 줌에 벌어지는 입들 고소한 피 냄새가 거실까지 날아간다 콩대는 콩잎을, 콩잎은 꽃을 피워 방방마다 콩을 낳고 꼬투리 꼭 닫아건 ​콩, 오늘 내 손에 죽었다 콩의 말을 알지 못해 참 다행이다

좋은 시 2022.02.16

저녁의 나이/마경덕

저녁의 나이 ​ 마경덕 ​ 해질 무렵 허물어진 돌담을 서성거리는 저녁을 보았지 어둑한 굴뚝을 빠져나와 그을음이 묻은 ​ 손으로 문지르면 까맣게 번지는 저녁의 나이 ​ 이끼 낀 돌담 사이 썩은 밑동을 보려고 먼길을 달려온 저녁의 뒤꿈치가 나무뿌리보다 질겼네 ​ 길목을 지나며 나무에게 들려준 산 너머 마을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매미를 섞어 그늘을 잇던 나무는 둥근 의자가 되어버렸네 ​ 한철 그늘을 빌려 쓴 노인들이 나무 아래서 시드는 것처럼 ​나무도 그늘을 짜다가 늙어갈 줄만 알았는데, ​ 사라진 느티나무 얼굴은 느티나무보다 오래 살아남은 저녁만 알고 있네 ​ 시작 노트 ​ 시간 밖에서 바라보다 ​ 강가에 구르는 작은 돌멩이, 길가에 핀 풀꽃 한 송이도 예사롭지 않다. 돌멩이가 되기까지, 꽃이 되기까지의 시간..

좋은 시 2022.02.16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외 4편/김남권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외 4편/김남권 김치를 담그려고 마트에서 사온 배추를 다듬다가 수세미처럼 줄기만 남은 배추 이파리를 보았다 얼마나 달고 고소했길래 이파리의 뼈대만 남기고 갉아 먹었을까 어두컴컴한 배춧잎 속에서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 지금쯤 가을 하늘을 날고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날개를 달아준 일이 없지만 오늘 사온 배추 한 포기 속에서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을 생각하면 가슴속에 등불 하나가 생긴다 배추벌레들이 먹고 남은 것들을 겨우내 몸속에 채워 넣고 나면 내년 봄, 내 몸에도 푸른 날개가 돋아나지 않을까 지상의 마지막 종점에서 도움닫기를 하며 푸른창공을 향해 달려갔을 배추벌레들의 날갯짓, 11월의 푸른 허공에 하얗다 고철이 고철에게..

좋은 시 2022.02.15

김종태 시집 [풀꽃]에서

♠ 김종태 시집 [풀꽃]에서 ​ ​ 도르르 말려 있는 꽃봉오리 마음을 닮아 연분홍인데 설레는 가슴 피어보면 아무도 보지 않는 서러움에 하늘을 좇아 파란색이다 서 있는 사람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작은 꽃 가슴 한가운데엔 그래도 버릴 수 없는 노란 꿈을 부여안고 실바람에도 꽃마리 가로눕는다 ​ ​ 선선하니 서그러운 분초록 몸매 수수하니 수줍은 보랏빛 얼굴 누군들 원해서랴만 누추한 곳이라도 깔끔하니 끌밋하다 꿋꿋한 여인 하늘을 짝사랑하여 쪽빛으로만 살고프나 몸 속 뜨거운 피는 놔두지 않아 달빛 아래 시퍼런 칼 어제도 갈았구나 흐트러진 심사 오늘도 가다듬네 세 장 바깥 잎 부끄러워 고개 숙이고 세 장 안 잎은 손 모아 기도하네 언제 어느 곳에 어떻게 살더라도 하늘이여 비옵나니 헛된 욕심 버리고 청초한 숨결로만..

좋은 시 2022.02.08

속수무책 / 김경후

속수무책 / 김경후 내 인생의 단 한 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 척하고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 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 절벽에 가서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 독서중입니다. 속수무책 산다는 것, 속수무책의 페이지들을 읽어 내려간다는 것. 대책도 없이 대책을 모색할 시간에 속수무책의 페이지들이 넘어간다. 타들어간 꽁초들과 함께,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을 지나 진흙참호 속을 지나 당신은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바다절벽으로 향한다. 속수무책, 이것이 당신이 세운 유일..

좋은 시 2022.02.08

둑길/함명춘

또 갈 곳 잃어 떠도는 나뭇잎이랑, 꼭 다문 어둠의 입속에 있다 한숨처럼 쏟아져 나오는 바람이랑, 상처에서 상처로 뿌리를 내리다 갈대밭이 되어버린 적막이랑, 지나는 구름의 손결만 닿아도 와락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별이랑, 어느새 잔뿌리부터 하염없이 젖기 시작하는 풀잎이랑, 한 줌의 흙 한 그루의 나무 없인 잠시도 살 수 없는 듯 어느 결에 맨발로 내려와 둑길을 걷는 달빛이랑 ㅡ함명춘(1966-- ) 책의 옛 사진을 보다가 지금의 내 사는 동네를 만나 반가웠습니다. 반쯤 부서진 살곶이 다리 풍경이었는데요, 돌다리 저편 뚝섬 언덕 위가 아름다운 ‘둑길’이었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곡선으로만 이어진 그 생명 가득한 길 위에 어린아이들이 노는지 걷는지 아득한 몇 점으로 보였는데 보나마나 신이 났겠습니다. 그 둥긂..

좋은 시 2022.02.04

빈집에 대한 시

빈집 / 복효근 ​ 큰딸 집에 간 할머니 지난 겨울 죽은지도 모르고 마당엔 동백꽃이 한창 ​ - 복효근,『꽃 아닌 것 없다』(천년의시작, 2017) ​ ​ ​ ​ 빈집 / 이상국 ​ 박정희 때 이은 슬레이트 지붕이 마분지처럼 낡아 바람에 미어질 것 같은데 삭아 테두리만 겨우 걸린 도라무깡 굴뚝 위에 새 한 마리 앉아 집을 보고 있다 ​ - 이상국, 『집은 아직 따뜻하다』(창작과비평사, 1998) ​ ​ ​ ​ 빈집 / 고광헌 ​ ​저 산에 홀로 피어 발길 붙드는 꽃들 이쁘다 ​ 저 빈집에 홀로 피어 발길 붙드는 꽃들 눈물난다 ​ - 고광헌, 『시간은 무겁다』(창비, 2011) ​ ​ ​ ​ 빈집 / 기형도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으로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

좋은 시 2022.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