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나이
마경덕
해질 무렵
허물어진 돌담을 서성거리는 저녁을 보았지
어둑한 굴뚝을 빠져나와 그을음이 묻은
손으로 문지르면
까맣게 번지는 저녁의 나이
이끼 낀 돌담 사이
썩은 밑동을 보려고
먼길을 달려온 저녁의 뒤꿈치가 나무뿌리보다 질겼네
길목을 지나며
나무에게 들려준 산 너머 마을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매미를 섞어 그늘을 잇던 나무는
둥근 의자가 되어버렸네
한철 그늘을 빌려 쓴 노인들이
나무 아래서 시드는 것처럼
나무도 그늘을 짜다가 늙어갈 줄만 알았는데,
사라진 느티나무 얼굴은
느티나무보다 오래 살아남은 저녁만 알고 있네
시작 노트
시간 밖에서 바라보다
강가에 구르는 작은 돌멩이, 길가에 핀 풀꽃 한 송이도 예사롭지 않다. 돌멩이가 되기까지, 꽃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내가 알 수 없는 시간이다. 발등에 내려앉는 먼지는 언제부터 먼지였을까. 죽은 자의 마지막 호흡에도 먼지가 있었다. 그 하염없음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것들이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계산할 수 없는 온전히 그들만의 시간이고 나는 시간 밖에 서 있었던 셈이다. 누가 이 세상을 다 안다고 하랴. 그저 몸을 빌리고 이름을 빌려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을. 하여 이 세상에서 나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 닳고 해지고 사라진다. 시간만 죽지 않는다. 낮이라는 시간, 밤이라는 시간, 아무도 그들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어 그저 지금도 낮이고 밤이다.
이 불변의 진리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기억의 한계를 넘어서면 모두 잊힌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기에 우리는 상처를 잊고 아무렇지 않게 아침을 맞는다. 아침은 잠이 낳은 선물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루치의 그 몫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꽃도 나무도 모두 안간힘으로 살아간다. 비록 잘려나간 밑동이라도 뿌리를 놓지 않는 것이다. 누가 저녁의 나이를 알 수 있을까. 문지르면 까맣게 그을음이 번지는 나이를… 나무뿌리처럼 질긴 저녁은 죽지 않고 또 산을 넘어 우리에게 오고 하루를 소모한 우리는 조금씩 늙어간다. 오래전에 사라진 느티나무 얼굴은 느티나무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저녁만 알고 있을 것이다.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속도 없이/전영관 (0) | 2022.02.19 |
---|---|
볶은 콩/마경덕 (0) | 2022.02.16 |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외 4편/김남권 (0) | 2022.02.15 |
김종태 시집 [풀꽃]에서 (0) | 2022.02.08 |
속수무책 / 김경후 (0) | 2022.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