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태 시집 [풀꽃]에서
<꽃마리>
도르르 말려 있는 꽃봉오리
마음을 닮아 연분홍인데
설레는 가슴 피어보면
아무도 보지 않는 서러움에
하늘을 좇아 파란색이다
서 있는 사람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작은 꽃
가슴 한가운데엔
그래도 버릴 수 없는
노란 꿈을 부여안고
실바람에도 꽃마리
가로눕는다
<붓꽃>
선선하니 서그러운 분초록 몸매
수수하니 수줍은 보랏빛 얼굴
누군들 원해서랴만 누추한 곳이라도
깔끔하니 끌밋하다 꿋꿋한 여인
하늘을 짝사랑하여 쪽빛으로만 살고프나
몸 속 뜨거운 피는 놔두지 않아
달빛 아래 시퍼런 칼 어제도 갈았구나
흐트러진 심사 오늘도 가다듬네
세 장 바깥 잎 부끄러워 고개 숙이고
세 장 안 잎은 손 모아 기도하네
언제 어느 곳에 어떻게 살더라도
하늘이여 비옵나니
헛된 욕심 버리고
청초한 숨결로만 살게 하소서
<봄맞이꽃>
이 땅은 너무 추워
따지기라 해도
빈 가지 잉잉 울고
아직은 덜 죽은 눈이
서걱서걱 흰자위 굴린다
이 땅은 너무 추워
봄은 대문 앞에서
고개 갸웃거리다가
옷깃을 여미고는
웅크려 앉는다
툰드라는 너의 긴
몸부림 뒤에 오는
기지개 서곡에 풀리고
놀란 봄은 후다닥
앞마당에 들어 선다
이 땅이 제 아무리 추워도
네 빛난 얼굴
뜨거운 몸짓
하늘을 온통 채운
정성이야 이기랴
<쑥부쟁이>
가난한 대장간 집
자식만 열하나
마음 착한 큰 딸
쑥 캐어 먹고 살았다
쑥 캐는 불쟁이네 애
사람들은 쑥부쟁이라 불렀다
허방다리에 빠진 사냥꾼
칡넝쿨로 구해 보니 서울 총각
늠름한 총각 얼굴
쑥부쟁이 뛰는 가슴
아가씨 올 가을엔 꼭 데릴러 오겠소
그 말 한 마디 앙가슴에 아로새겨
누비는 산골 캐는 쑥마다
신이 절로 났다
봄 여름 가 을 겨 울
이년 삼 년 오 년
선보라고 성화하시던 부모
기다리다 모두 가셨어도
사나이 그 한 마디 어찌 안 믿으랴
동생들 다 여의고
서른 넘어도 쑥만 캐네
이젠 아니 오시겠지
벌써 장가 갔겠지
오셔야 무얼 어찌할 수 있나?
시름에 산길을 헤매던 쑥부쟁이
그 허방다리에 빠져 죽었다
쑥부쟁이가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
쑥부쟁이는 들에 핀 참사랑이다
<마타리>
봄
여름
긴 세월
마련했소
오직 한 마음
작은 꿈이나마
알뜰히 피우고자
바람결에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도 좋소
모진 세상이 행여 시샘해
꺾이면 꺾인 채로 피우겠소
땅
하늘
그 사이
나 혼자의
꿈일지라도
이 땅의 정성과
저 하늘의 뜻으로
내 작은 희망 펴겠소
누가 뭐라 한들 어떻소
푸른 하늘 부끄럽지 않고
노란 그 꿈만 변치 않는다면
<동자꽃>
깊은 산 낡고 작은 절
큰스님과 어린 동자 둘 살았는데
가난한 절 살림 빤하지
겨울 양식 시주 얻으러
큰스님 산을 내려간 뒤
큰 눈에 길이 막혀 스님 못 오시고
일곱 살 어린 동자 기다리다 굶어죽어
묻힌 곳에 주홍색 꽃이 피었다는데
천지개벽하는 이십 세기 지금
시주 얻으러 갈 필요도 없고
눈에 신작로 막힐 리도 없는데
아직도 동자꽃 산 속에 피어
큰 스님 오시기를 기다린다
왜 아니 오실까
무엇에 막히셨나
<광대나물>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지만
할 일 찾아 헤매이다
주저앉은 개울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지만
실패 뒤에 다시 반기는 건
시련도 없는 절망뿐
흘러가는 저 물같이
누가 살라고 했던가
옴짝달싹 할 수 없는데
세상만 물같이 흘러간다
볼품없는 작은 꿈 하나라도
피워보고자 발돋움을 해도
스쳐보는 이 없고 하물며
거두어 주는 이조차 없다
이름 석 자만 그럴 듯하지만
돈도 명예도 집 한 채라도
남기기는커녕 가진 것도 없어
그래 세상은 어차피 어릿광대 들러리인데
못다 핀 꿈 떨구어 버리고
오늘도 바람에나 흔들려 보자
<돌단풍>
프라이드는 기름 냄새만 맡아도 가고
티코는 기름 소리만 들어도 간다는데
척박하다는 포천을 지나
자유를 불렀다는 만세교 돌아
금주산 중턱 깎아지른 절벽
돌단풍은 무엇으로 사는가
돌 먹고 살고 물소리 듣고 산다네
개팔자보다 상팔자일세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돈 먹고 살고 욕 듣고 산다네
위대한 자본주의 품 안에서는
소유가 곧 자유라네
함께 누리며 더불어 살지 못하고
혼자만 움켜쥐며 나만으로 산다네
돌단풍 열 손가락은 바람에 춤추며
주인 없는 하늘을 세는데
우리 열 손가락은 이익에 춤추며
눈 먼 세종대왕을 센다네
개똥보다 더러운 서러운 내 신세
한 잔 술로 잊고 일어서는데
주인은 또 외상이라 투정하네
<잡초는>
춥다 덥다 울지 않는다
배고프다 목마르다 조르지 않는다
못생겼다 가난하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난초를 꿈꾸지 않는다
벌나비를 바라지 않는다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는 것을 버거워하지 않는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도 탓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주어진 것으로만 억척으로 산다
버려진 곳 태어난 곳에서 모질게 버틴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
살기 위해 먹는 수단은 언제나 신성하다
뜯기고 먹히는 것은 먹이 피라밋의 섭리이고
뽑히고 밟히고 채이는 것은 존재의 숙명
살아있다는 것은 은혜이고
죽는다는 것은 섭리이다
잡초는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섭리를 따를 뿐이다
<초록을 찾아서>
그때가 좋았지
코흘리개 철부지는
병아리 노란 꿈만이었지
펄펄 피가 끓던 시절엔
그래도 희망은 많아
파아란 하늘을 좋아했지만
그때는 사실 눈이 멀었어
세상을 휘두를 것 같아
속는 줄도 모르고 황새 쫓아가며
돈과 세월 사이를 누벼도 봤지만
그때는 사실 귀가 먹었다
어느 날 밤 귀가 열리고
못 볼 것 보고 난 뒤 눈이 띄었지만
보이는 것은 신기루
들리는 것은 아우성뿐
살아있다는 것답게 살고 싶다
살아있는 것을 찾아 뒤져보지만
회색 모두 회색
어쩌다 반겨보면
칙칙하고 거무튀튀한
위장한 카키색뿐
장밋빛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살고 싶다
살아있다는 것답게 시퍼렇게
풋내기여도 좋다
풋풋한 가슴으로만
너풀너풀 살고 싶다
베풀고만 사는
버려진 푸서리의 잊혀진 푸새처럼
죽어버린 것들을 뚫고 치솟는
푸렁이의 초록으로만 살고 싶다
<둥굴레>
김매는 어머니께
배밭 언덕배기 풀이 뭐예요
둥굴레란다
잎사귀가 동그스름하지
잎이 더 자라면 무거워
줄기가 둥글게 절을 한단다
너도 큰 사람 되려면
모나지 말고 둥글게 살아야 한다
사십을 살면서
둥글게 살아왔는지는 몰라도
모나지는 않았다고 자신 있는데
둥근 사람이 크게 된다는 것은
모질지 못한 사람의 희망사항이다
제 몸에서 돋아난 잎도
추스르지 못하고 굽는 둥글레
그 어머니는 아직 살아계셔
팔십을 향해 꼬부라지고 있는데
언제 한번 따져봐야겠다
그 옛날부터 오늘까지
둥근 사람이 잘된 적 있냐고
둥글고 둥글었던 사람은
제 몸 하나도 가누지 못하고
목과 등이 둥글게 휘었고
모질이 트레바리 깍정이는
등치고 간 빼먹고 코 베어가
배가 맹꽁이로 둥글게 되었으니
둥글레 꽃피는 오월
피워 보고자 처절하게 대롱대롱
매달린 너댓 방울 눈물 종
천하가 알게 두들겨 치고 싶다
둥글게 살지 마라
모진 놈이 크게 되는 거꾸로란다
이 세상에 믿을 거라고는 오직
오늘 네가 보고 있는 현상뿐이란다
<환삼덩굴>
돌격 앞으로
앞만 볼 것
뒤처지면 죽는다
빨리 빨리
높이 높이
많이 많이
앞선 놈은 딴족을 걸어라
뒤선 놈은 짓밟고 올라갈 것
모든 길은
최고로 통합니다
구름을 낚으려면
이슬을 모아야 합니다
앞서기 위해
눈 한번 딱 감으세요
영원을 위해
잠시 모른 척 하십시오
하지만 부처님 손바닥인 것을
버리지도 못하고
따를 수도 없는
인식의 울타리
하늘을 욕하고
땅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했다
좋은 세월 다 보내놓고
자기가 쌓은 울타리에 갇혀
살려 달라 아우성
두 손 열 손 백 손
허우적거리며
살려 달라 아우성
<쇠비름>
신랑방에 불 켜라
각시방에 불켜라
뿌리 뽑아 문지르면
먼저 빨개지던 분이 볼
심지 낮춘 등잔불에도 그때는
대낮처럼 밝았는데
광명천지 훤하다는 지금
세상이 너무 어두워
갈 길을 잃었다
개 팔아 두 냥 반
한 냥은 아 대한민국 골프장 사고
한 냥은 목구멍 풀칠할 쌀 한 되 사니
반 냥은 서러운 선술집 쉰 술 한 잔 사자
예수 부처 바겐쎄일
한 냥은 화장품 사고
한 냥은 환각제 사니
반 냥은 입 다물 마스크 사자
선생은 재고 정리
한 냥은 엮을 끈 사고
한 냥은 눈치 볼 시간을 사니
반 냥은 아이구 배고파 라면 사자
어두워라
어두워라
신랑방에 불켜라
각시방에 불켜라
[출처] 김종태 시집 <풀꽃>에서|작성자 어처구니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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