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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나이/마경덕

에세이향기 2022. 2. 16. 16:31

저녁의 나이

마경덕

해질 무렵

허물어진 돌담을 서성거리는 저녁을 보았지

어둑한 굴뚝을 빠져나와 그을음이 묻은

손으로 문지르면

까맣게 번지는 저녁의 나이

이끼 낀 돌담 사이

썩은 밑동을 보려고

먼길을 달려온 저녁의 뒤꿈치가 나무뿌리보다 질겼네

길목을 지나며

나무에게 들려준 산 너머 마을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매미를 섞어 그늘을 잇던 나무는

둥근 의자가 되어버렸네

한철 그늘을 빌려 쓴 노인들이

나무 아래서 시드는 것처럼

​나무도 그늘을 짜다가 늙어갈 줄만 알았는데,

사라진 느티나무 얼굴은

느티나무보다 오래 살아남은 저녁만 알고 있네

 

 

 

 

 

 

 

 

 

시작 노트

시간 밖에서 바라보다

 

강가에 구르는 작은 돌멩이, 길가에 핀 풀꽃 한 송이도 예사롭지 않다. 돌멩이가 되기까지, 꽃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내가 알 수 없는 시간이다. 발등에 내려앉는 먼지는 언제부터 먼지였을까. 죽은 자의 마지막 호흡에도 먼지가 있었다. 그 하염없음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것들이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계산할 수 없는 온전히 그들만의 시간이고 나는 시간 밖에 서 있었던 셈이다. 누가 이 세상을 다 안다고 하랴. 그저 몸을 빌리고 이름을 빌려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을. 하여 이 세상에서 나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 닳고 해지고 사라진다. 시간만 죽지 않는다. 낮이라는 시간, 밤이라는 시간, 아무도 그들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어 그저 지금도 낮이고 밤이다.

이 불변의 진리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기억의 한계를 넘어서면 모두 잊힌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기에 우리는 상처를 잊고 아무렇지 않게 아침을 맞는다. 아침은 잠이 낳은 선물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루치의 그 몫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꽃도 나무도 모두 안간힘으로 살아간다. 비록 잘려나간 밑동이라도 뿌리를 놓지 않는 것이다. 누가 저녁의 나이를 알 수 있을까. 문지르면 까맣게 그을음이 번지는 나이를… 나무뿌리처럼 질긴 저녁은 죽지 않고 또 산을 넘어 우리에게 오고 하루를 소모한 우리는 조금씩 늙어간다. 오래전에 사라진 느티나무 얼굴은 느티나무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저녁만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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