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외 4편/김남권
김치를 담그려고 마트에서 사온 배추를
다듬다가 수세미처럼 줄기만 남은
배추 이파리를 보았다
얼마나 달고 고소했길래 이파리의
뼈대만 남기고 갉아 먹었을까
어두컴컴한 배춧잎 속에서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
지금쯤 가을 하늘을 날고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날개를 달아준 일이 없지만
오늘 사온 배추 한 포기 속에서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을 생각하면 가슴속에 등불 하나가 생긴다
배추벌레들이 먹고 남은 것들을 겨우내 몸속에 채워 넣고 나면
내년 봄, 내 몸에도 푸른 날개가 돋아나지 않을까
지상의 마지막 종점에서 도움닫기를 하며 푸른창공을 향해 달려갔을
배추벌레들의 날갯짓, 11월의
푸른 허공에 하얗다
고철이 고철에게
고철 시인이 고철을 팔러 왔다가 짜장면을 사줬다
1kg에 280원하던 고철 값이
130원밖에 안한다며 고철 판 돈 절반을 헐어
평창시장 골목 칠천각에서 짜장면을 사주고
고철이 다 된 1톤 트럭을 타고 멧둔재를 넘어 갔다
도로공사를 하다 그라인더 날이 튀는 바람에
여섯 바늘이나 꿰맨 다리에 시의 붕대를 감고 절룩거리며
가난한 나를 찾아온
고철 시인은 고철 판 돈 절반을 헐어 짜장면 곱빼기를 사주었고
덕분에 가난한 허기를 때운 나는 원동재를 넘어 영월로 갔다
내다 팔 고철도 없고 내다 팔 시도 없는
나는 ‘내가 자주 가는 집’에 들러 외상으로
막걸리에 산초 두부나 시켜놓고
노가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고철 시인을 불러 늦은 저녁
세상사는 이야기나 들어보는 수밖에,
그나저나 내 시는 1kg에 얼마나 받으려나
내일은 그동안 써놓은 원고 뭉치를 들고
고물상 저울에 통째로 올라가
더 쓸모없어지기 전에 비만한 몸뚱이나
팔아야겠다
배추 흰나비의 여행
서울행 케이티엑스 3호차에
배추흰나비 한 마리 탑승했다
강릉에서 무임승차한 배추흰나비는
당최 내릴 생각이 없다
승무원이 불러도 본체만체,
승객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뜻 모를 미소를 던진다
3호차가 특실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수영복 차림으로 승차했는지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바다 냄새가 났다
여름 한낮, 하루 종일 배추밭에 엎드려 지냈던
젊은 날의 어머니는 정작 배추 한 잎 먹어보지도 못한 채
장다리꽃이 다 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뿌리에 바람이 들고 이파리가 노랗게 물들었지만
씨앗을 보러 오지도 않았다
이미 오십 수년 전의 일이었다
배추흰나비는
차창 밖에서 날개에 푸른 물이 든 채로
나를 따라왔다
케이티엑스 3호차 객실 가득
배추흰나비들이 몰려와 아직 여물지 않은 어머니의
배추를 뜯어 먹고 있었다
사진 <네이버 포토앨범>
별이 죽었다
한 사람을 가슴에 품는 순간부터
사랑은 시작된다
어머니가 처음 나를 세상에 내보내던 순간
당신의 체온과 맥박으로 안심시키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말없이 안아주었던 것처럼,
누군가를 가슴 한켠에 들여놓으려면
그 사람의 상처까지 내 살갗의
무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숨결은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한 번도 끊어진 적 없는 인연의 들숨과 날숨이
한 사람의 영혼에 깃들고
또다시 지상의 키 작은 꽃송이를 만나
호흡이 완성되는 것이다
우주의 높은 분이 밤마다 별 하나를 내려보낼 때,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이어온
몸에 뜨거운 숨결이 맥박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외로운 가슴을 열어 한 사람을
죽는 날까지 품는다면 상처로 꽃 피웠던
모든 순간들은 새로운 핏줄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오늘 밤 나는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어둠 속을 지나
허공으로 난 푸른 사다리를 기어 올라 마지막일지도 모를
애달픈 그리움 하나 만지고 돌아올 것이다
사진<네이버 포토갤러리>당나귀(jin7771)님
화엄경을 읽다
돌아서서 가는 그 사람의 등을 보았다
입술의 무늬보다
눈동자의 무늬보다
더 따뜻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로 굽이쳐 내려오는 어깨의 능선 아래로
세월의 무게가 구름처럼 걸려 있었다
경추를 지나 요추로 향하는 갈비뼈를 덮고 있는
단단하게 굽은
날개와 날개 사이로 오랫동안
참아온 슬픔이 덮여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정면으로 마주칠 때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사연들이
어느 날 나를 돌아서 가는 겨울처럼
쓸쓸한 뒷모습을 보다가 알게 되었다
그 허전한 등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무늬를,
말보다 깊은 경전을 혼자 써 내려가느라
다 닳아진 어깨를,
이순의 강을 혼자 건너오느라
툭, 툭, 불거진 울음주머니가
갈비뼈 마디마다
무디어가는 봉분처럼 숨어 있었다는 것을,
고요하게 들썩이며 잠든
그 사람의 등을 한 번 만져 보아라
법정 스님의 법문보다 더 깊은
화엄의 무니가 보일 것이다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볶은 콩/마경덕 (0) | 2022.02.16 |
---|---|
저녁의 나이/마경덕 (0) | 2022.02.16 |
김종태 시집 [풀꽃]에서 (0) | 2022.02.08 |
속수무책 / 김경후 (0) | 2022.02.08 |
둑길/함명춘 (0) | 2022.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