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김치찌개 평화론/곽재구

곽재구(1954 - ) ‘김치찌개 평화론’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춧잎을 닮은 딸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 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 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 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 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 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 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 염병할,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 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 식구들은 눈..

좋은 시 2022.01.26

저녁이면 돌들이/박소란

저녁이면 돌들이[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30〉 저녁이면 돌들이/서로를 품고 잤다 저만큼/굴러 나가면/그림자가 그림자를 이어주었다 떨어져 있어도 떨어진 게 아니었다 간혹,/조그맣게 슬픔을 밀고 나온/어린 돌의 이마가 펄펄 끓었다 잘 마르지 않는 눈빛과/탱자나무 소식은 묻지 않기로 했다 ―박미란(1964∼) 저녁이면 돌들이 서로를 품고 잤다.” 첫 구절만으로도 이 시에 대해서는 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맛집에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은 법이다. 저녁에 서로를 품고 자는 돌들이라니. 이 말을 들은 순간 우리는 그것들을 본 적도 없으면서 이미 본 듯도 하다. 사실 우리는 저 돌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궁금하면 어두운 밤중에 깨어 있으면 된다. 피곤에 찌든 남편은 방구석에서 이를..

좋은 시 2022.01.25

박소란시모음 20편

박소란시모음 20편 《1》 감상 박소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 《2》 고장 ..

좋은 시 2022.01.24

그늘 제조법/전영관

그늘 제조법 외 4편 불 꺼진 시장통로는 삼우제 끝난 상가 같다 어둠이 발목을 휘감으며 질겨진다 고양이가 떡집 좌판 밑에 웅크리고 이쪽을 응시한다 예민함이란 공포를 미화한 방패임을 들킨 듯 날카로운 동공을 세운다 손님이 놓고 간 생선가게 비린내가 통나무 도마 틈새에 남아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바람풍선은 척추를 접은 채 잠들어 있다 내복가게 마네킹과 눈이 마주쳤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의 굳은 표정이 낯설지 않다 아침햇살 분주한 건널목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어둠에 익숙한 나는 습관대로 머뭇거리다가 낙타처럼 눈을 가늘게 떠본다 그늘이란 비겁한 경계나 완충지대가 아닌 마음의 빗장을 풀어도 괜찮은 침대 같은 곳이다 뒷골목으로 들어서며 번번 실패한 그늘 제조법을 아쉬워한다 어둠과 빛을 배합하는 연금술로 구전되었으..

좋은 시 2022.01.22

약속도 없이/전영관

약속도 없이 전영관 하룻밤 물에 불린대도 멥쌀의 찰기로는 허기를 채우지 못할 거 같아 찰밥 해드려야 안심이지 싶은 사람 하나 있다 수수꽃다리가 조청만큼 달달하니 서둘러 왔는데 늦었다 해도 넘겨줄 수 있겠다 찬 없는 두레상에 모셔도 결례는 아니려니 어스름 무렵에야 찹쌀 뼈가 다 무르면 만월과 겸상으로 올려드리련다 비린 것 한 토막을 앞으로 밀어놓고 잔가시 없는 등 쪽으로 떼어드리련다 숭늉 권하는 동안도 꽃은 피고 봄은 뜸 들고 여름을 당겨올 것처럼 눈빛이 짙어지리라 창밖으로 만발한 이팝나무 숭어리가 보인다 바람으로 씻고 늦은 안개에 불려 헛밥이나 짓는다 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봄을 다잡아보려 찰밥이라 고집 부리는 것이다 내 것인지네 것인지도 모르게 뒤엉겨 어쩔 수 없으니 주저앉자고 생떼라도 써볼 사람을 기..

좋은 시 2022.01.22

세업 / 최태랑

세업 / 최태랑 아버지의 몸에서 언제나 돌 깨는 소리가 났다 그 차디찬 돌에도 뜨거운 피가 흐르는지 쩡쩡, 손끝에서 불꽃이 일었다 눈이 밝은 아버지, 돌 속에 숨은 거북이도 꺼내시고 사자, 호랑이도 불러냈다 먼지 푸석이는 소리로 밥을 짓던 아버지 열손가락을 다 버리시더니 돌을 반죽하기까지 칠십 년이 걸렸다 열 개의 지문을 다 핥아먹고 돌덩이들은 비로소 몸을 열어주었다 돌의 혈관을 찾고 심장을 찾아 숨을 터주는 것을 천직이라고 믿으셨을까 막힌 혈을 찾아 엎드린 아버지 새벽잠을 털고 일어설 때면 소리도 함께 일어섰다 한 자 한 자 각을 세운 비문의 이름들 어느새 묘비는 이끼가 끼고 어디론가 엉금엉금 기어간 거북이들은 어느 정원에 탑이 되어 앉아있을 것이다 평생 남의 이름만 쓰다가 당신 이름 석 자도 새기지 ..

좋은 시 2022.01.22

아버지의 연필 /전영관

아버지의 연필 전영관 풍구의 회오리가 가슴께를 후려친다 갈탄의 낭자한 선혈 사이로 피 맛을 본 강철이 달아오른다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강철연필은 학력편차가 크다 몇 자의 비문만 학습한 경우가 있고 공덕문을 줄줄이 암기하는 실력파도 있다 까막눈 돌쟁이는 단지 내장된 글자들을 강철연필로 파내는 것뿐이다 거북이나 두꺼비를 만나 호되게 당하기도 한다 환절기에는 떠나는 사람들 많다 해마다 반복되는 덕분에 그의 한문 실력도 지명이나 이름자에 두각을 나타냈다 담금질로 단단해지는 것은 강철뿐 돌쟁이의 가슴은 반비례로 물렁해졌다 구부리는 법을 터득한 까닭에 굽실거렸어도 칠십 평생 부러지지 않았다 그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덕분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 적 있다 아버지는 물푸레나무들과 뒷산으..

좋은 시 2022.01.22

귀촌/전영관

귀촌/전영관 ​ 오후 네 시의 햇살은 손이 느리다 옆집 숟가락까지 챙기는 산촌의 오지랖처럼 호박이며 무와 가지까지 매만진다 당신은 등 돌리고 앉아 오가리들과 자분자분 비밀이라도 있는 듯 들췄다가 남이 들을까 가만히 덮고 여고 동창생 표정으로 내가 모를 것을 나눈다 겉마르기 전에는 탱탱했으니 사소한 것들도 내남없이 화려했던 날은 있는 것이다 ​ 마음 단단히 먹어야 귀촌한다고 우쭐대면서 진지한 척 머리로만 예행한다 조붓한 당신 뒷모습을 콩밭에 앉혀놨다가 주방으로 가는 걸음걸이를 파스 사러 읍내 나가는 길 위에 올려본다 서울 새댁 곱다느니 머리숱도 많다느니 허리 굽은 인사말을 붙이며 노인네들도 동행하겠지 읍내 나갔으니 중국집까지 들르겠지 ​ 아내는 콩밭에 앉히고 읍내 심부름이나 시키고 녹슨 보습만큼 게으른 나..

좋은 시 2022.01.22

생선을 구으며/전영관

생선을 구으며 전영관(1950~2016) 중간불로 뒤집고 약한 불로 다시 뒤집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일상의 알몸을 통째로 굽는다. 노릇노릇 구워져 하루의 밥상에 오를 때까지 타오르는 열기 속에서 뒤집히고 또 뒤집힌다. 탁탁 소리 내며 반항하고 싶은 젊은 날도 있었지. 큰 불만 고집하다가 상처까지도 모두 태운 때도 있었지. 비린내가 풍긴다. 비린내가 묻는다. 한 끼의 맛있는 밥상을 위해 인내를 해야 하는 많은 시간들이 훨훨 날지 못하는 시든 지느러미 날개가 되어 불꽃 속으로 사라진다. 내가 피웠을 냄새와 연기 지금쯤 어느 자리에 엉겨 붙어 부끄러운 모습으로 녹슬어 가고 있는지. 어느 가슴에 남아 아프게 하고 있는지. . 시인은 생선을 구우며 시 한편도 같이 구웠으니 그는 다만 아침상을 차린 것이 아..

좋은 시 2022.01.22

울음의 인연/손창기

울음의 인연 손창기 왕릉 곁에서 손을 펴고 있으면 생명선의 어느 마디가 죽은 자의 입김이라도 받은 듯 손금에 얼마큼 보태지고 있는 느낌 지긋이 손금의 인상을 흐뭇해하지만, 죽은 자는 내 손금을 꼭 무인상武人像의 손금과 닮았다고 말한다 손바닥에 전생이 흘러왔을지도 모른다 이미 내 안에 얼마간 살고 있는 고구려 안시성을 지킨 도부수이거나 신라왕을 호위한 아랍인이거나 친일파를 척결한 아나키스트이거나 서글픈 귓불을 만지면 토막 난 삼생의 길을 잇는 새소리, 천 년 전에 조율되고도 다시 울리는 현들 구부정 소나무 속 수억 광년 떨어진 후투티 울음의 인연을 나는 모른다 무인의 칼날 위를 스쳤던 새의 조상으로부터 어떤 새는, 무인의 목청을 새겨두고 있었을까 새소리 전에는 전생이거나 새소리 후에는 후생이거나

좋은 시 2022.01.22

매화/한광구

매화 한광구 창가에 놓아둔 분재에서 오늘 비로소 벙그는 꽃 한 송이 뭐라고 하시는지 다만 그윽한 향기를 사방으로 여네 이쪽 길인가요? 아직 추운 하늘문을 열면 햇살이 찬바람에 떨며 앞서가고 어디쯤에 당신은 중얼거리시나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 하나가 매화꽃으로 피었네요. 매화꽃으로 피었네요. 이쪽 길이 맞나요? ―한광구(1944∼) 좋은 것 중에서도 드문 것에 대하여 우리는 ‘귀하다’고 표현한다. 매화도 그중의 하나다. 봄날의 꽃은 많아도 혹한을 이기고 피는 꽃은 드물다. 옛 선인들은 백매화를 보면 깨끗하다 칭송했고 홍매화는 보면 신비롭다고 사랑했다. 그들에게 매화는 결코 물체가 아니었다. 그 속에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화분 안에 심겨 있는 것은 분재가 아니라 일종의 마음이었다. 역사상 매화..

좋은 시 2022.01.10

발에 관한 시 모음

+ 발 나는 발이지요. 고린내가 풍기는 발이지요. 하루종일 갑갑한 신발 속에서 무겁게 짓눌리며 일만 하는 발이지요. 때로는 바보처럼 우리끼리 밟고 밟히는 발이지요. 그러나 나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빈 대동여지도 김정호 선생의 발. 아우내 거리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 누나의 발. 장백산맥을 바람처럼 달렸던 김좌진 장군의 발.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발. 그러나 나는, 모든 영광을 남에게 돌리고 어두컴컴한 뒷자리에서 말없이 사는 그런 발이지요. (권오삼·아동문학가, 1943-) + 웃는 발 동생 발을 씻겨준다. 미끈미끈 비누칠을 하니까 간질간질 까르르 발가락도 꼼지락거리며 웃고 뽀글뽀글 뽀르르 거품들도 웃다가 배 터진다. (함기석·아동문학가) + 빗방울의 발 바닥으로 떨어지는 ..

좋은 시 2022.01.03

<라면에 관한 시 모음>

<라면에 관한 시 모음> + 라면을 끓이면서 물을 데운다 라면을 끓일 요량으로 봉지를 뜯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이 한때 허기진 오후, 외출 중인 아내의 빈자리가 공복처럼 쓰리다. 멀리 낮기차 지나가는 소리에 맞춰 냄비엔 물이 끓고 가지런히 누운 대파를 숭숭 썰어 넣는다. 잘 익은 김치를 밥상 위에 올리면 더 이상 부러울 것 없는 시간 사람들아, 무지한 식욕을 부끄러워 말자 산다는 것, 정말 산다는 것은 허기를 다스리는 일 권력도 富도 라면 한 개의 포만감보다 못한 것을. (정구찬·시인) + 라면·1 쉽게 잠 못 드는 밤이면 작고 은빛 나는 법랑냄비에 라면을 삶는다. 세상 사는 재미도 함께 끓여보면 어떨까? 뜨거운 라면가락 속에 살다 얻은 슬픔을 녹여 담을 수 있다면 매운맛 수프는 뿌리지 않아도 되겠지...

좋은 시 2021.12.31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길상호

그녀의 실 감기 ​ 어두운 방에서 그녀 실을 감는다 실타래 끝을 마른 발로 버티고 이편에서 건너편 세월을 오가며 기억을 정리중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손에 하얀 실뭉치는 배가 부르다 ​ 그러나 가끔 손가락에 힘을 주어도 엉키어 따라오지 않는 기억도 있다 그때마다 실밥처럼 끊겨 나간 세월이 얼굴에 깊은 주름으로 남는다 주름이 얼굴에 수를 놓는다 ​ 한 올 한 올 가닥을 더듬어 보아도 풀리지 않는 그리움 같은 것, 그 뭉친 자리를 삭은 이로 끊으며 그녀 잠시 허리를 편다 그리고 끊은 자리 매듭으로 이으면서 삶의 상처 하나씩 딱지로 아문다 ​ 그녀의 살에 새롭게 돋아난 별들 어느새 창문으로 노을이 번지고 그녀, 생의 내면을 가로지르듯 실뭉치에 빛나는 바늘 하나 꽂는다 ​ ​ ​ ​ 곶감을 깎는 일 ​ 햇볕 ..

좋은 시 2021.12.29

동강할미꽃의 재봉틀 / 김태경

동강할미꽃의 재봉틀 / 김태경 솜 죽은 핫이불에 멀건 햇빛 송그린다 골다공증 무릎에도 바람이 들이치고 재봉틀 굵은 바늘이 정오쯤에 멈춰있다 문 밖의 보일러는 고드름만 키워내고 숄 두른 굽은 어깨 한 평짜리 가슴으로 발틀에 하루를 걸고 지난 시간 짜깁는다 신용불량 최고장에 묻어오는 아들 소식 호강살이 그 약속이 귓전에 맴돌 때는 자리끼 얼음마저도 뜨겁게 끓어올랐다 감치듯 휘갑치듯 박음질로 여는 세밑 산타처럼 찾아주는 자원봉사 도시락에 그래도 풀 향기 실은 봄은 오고 있겠다

좋은 시 2021.12.25

대바구니에 빛살 담듯/이가은

대바구니에 빛살 담듯/이가은 습작하는 불면은 살아 있음의 확인이다 빗장 굳게 잠글수록 흔들리며 타는 갈증 끝없는 미로 속으로 가물가물 잠긴다 엉겅퀴꽃에 달라붙는 진딧물 저 진딧물 나만이 만질 수 있는 끈적이는 언어들로 웅크린 세상의 날을 무디게 할 순 없을까 성긴 바람 다독이며 촘촘히 엮은 소망 대바구니에 빛살 담듯 줄줄이 샐지라도 더러는 강물에 찰방찰방 은비늘로 뜨고 싶다

좋은 시 2021.12.25

막사발/이남순

막사발/이남순 왜바람과 맞서느라 금이 간 허리 안고 이저리 차이다가 이 빠지고 살 터진 채 이름도 개명을 했다, 꼼짝없이 '이도 다완' 선비들의 찻상에도 의젓하게 올라갔고 비가 새는 난달 부엌 흙바닥에 엎드려서 저 백민 간당한 목숨도 숨죽이며 지켜봤다 장독 위에 별을 띄워 정화수 받아 놓고 퇴락한 왕조 앞에 그래도 살아보자고 어쩌다 비겁한 목숨도 그렁그렁 달래었다 개밥그릇 냉가슴도 참을 말이 따로 있지 분에 넘친 대접하며 기고만장해 봤댔자 우리네 도공 품에서 주먹 쥐고 태어났다

좋은 시 2021.12.25

컵/조경선

컵/조경선 옆에 놓여 있는 컵이 하나여서 다행입니다 나도 그 감정이어서 다행입니다 둥글다는 것은 입술을 편하게 하고 일정하게 맛 들여진 곡선의 촉감들은 손끝으로 읽어 주고 싶어집니다 뜨거운 차를 수십 번 입에 댔다 떼는 사이 외풍이 옆자리를 떠올리다 스스로 식어지곤 해요 양손을 떠받힌 사기그릇이 처음부터 뜨겁지는 않아요 홀로 급하게 먹어 치우는 점심이 갈증을 불러와도 한 번에 들이키면 기억까지 데이고 말죠 매번 불투명한 속에 얼굴을 채워도 내 얼굴은 투명하게 보이지 않아요 살다보면 컵 속의 가라앉은 자들이 얼굴을 내밀지요 뜨겁고 차갑고 쓰고 달착지근한 입김들이 바닥에 엎드려 눌러 붙어 있습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컵 밑은 이유 없는 생채기로 흔들렸어요 컵하고 발음하고 나면 상처도 저 혼자 아물 것 같아..

좋은 시 2021.12.24

꽃사과 꽃이 피었다/황인숙

1. 한국시단의 독특하고 경쾌한 상상력, 황인숙 시인의 자선 대표시집! 『꽃사과 꽃이 피었다』는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했고, 동서문학상(1999)과 김수영문학상(2004) 등을 수상한 황인숙의 첫 시선집이다. 1988년부터 2007년까지 30년간 황인숙 시인이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 시집들에 수록된 시들 중 시인이 가려 뽑은 시선집 『꽃사과 꽃이 피었다』에는 발랄하고 경쾌한 상상력을 통해 사물에 아름다움을 불어넣어주는 황인숙 시인 특유의 깔깔거림과 쓸쓸함의 시어들로 가득 넘친다. 시인은 일상과 사물에 부여된 낡은 옷과 생각을 벗기고 새로운 옷을 입히며 답답한 현실을 새로움의 충동으로 만들어놓는다. 그리하여 시인의 통통 튀는 개성적인 문체와 ..

좋은 시 2021.12.24

사람 지나간 발자국/이경림

사람 지나간 발자국 사람 지나간 발자국 이경림 아름다워라 나 문득 눈길 머물러 그것의 고요한 소리 보네 누군가가 슬쩍 밟고 갔을 저 허리 잘록한 소리 한참 살다 떠난 부뚜막 같은 다 저문 저녁 같은 ―이경림(1947∼) 사랑시에서 고독은 좋지 않은 것이다.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마주 보는 둘이 있어야 하니까, 홀로 있는 고독이 좋을 리 없다. 고독한 연인은 이별 앞의 연인이다. 혼자서 하는 사랑은 슬픈 사랑이다. 그렇지만 사랑시를 제외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시와 고독은 오래전부터 유명한 짝꿍이었다. 슈타이거라는 이론가가 정리하기를, 서정시는 대체로 고독의 공간을 다룬다고 했다. 혼자 고요히 앉아, 삶과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은 분명 ‘시적인 시간’이다. 이것이 단 오 분이라도 주어지면 우리는 좀 충..

좋은 시 2021.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