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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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컵/조경선

에세이향기 2021. 12. 24. 17:10

컵/조경선


옆에 놓여 있는 컵이 하나여서 다행입니다

나도 그 감정이어서 다행입니다
둥글다는 것은 입술을 편하게 하고
일정하게 맛 들여진 곡선의 촉감들은
손끝으로 읽어 주고 싶어집니다
뜨거운 차를 수십 번 입에 댔다 떼는 사이
외풍이 옆자리를 떠올리다 스스로 식어지곤 해요
양손을 떠받힌 사기그릇이 처음부터 뜨겁지는 않아요
홀로 급하게 먹어 치우는 점심이 갈증을 불러와도
한 번에 들이키면 기억까지 데이고 말죠
매번 불투명한 속에 얼굴을 채워도
내 얼굴은 투명하게 보이지 않아요
살다보면 컵 속의 가라앉은 자들이 얼굴을 내밀지요
뜨겁고 차갑고 쓰고 달착지근한 입김들이
바닥에 엎드려 눌러 붙어 있습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컵 밑은
이유 없는 생채기로 흔들렸어요
컵하고 발음하고 나면 상처도 저 혼자 아물 것 같아
매일 순한 밤 속에 정갈하게 엎어놓지요
그래서인지 문양이 새겨진 바깥쪽이
자꾸만 청승맞은 빛이 되어 나를 봅니다
컵 하나만 기다려줘서 다행입니다
외로움을 마시지 않습니다 고요를 마십니다

 

 

 

오래된 가방/조경선

 


조용한 암자 뒷벽에 가죽 가방이 걸려 있다

끌에 걸리어 살을 내주고 박음질은 터져 나갔다

때로는 쇳덩이처럼 무거웠을 연장들

그의 어깨에서 나뭇결이 움직인다

산사는 어둠을 세워 날을 닦아 품에 넣는다

가방은 칼을 움켜쥔 채 풍경 소리 쓸어 담는다

 

 

목력 / 조경선

 

 

자르기 전 쓰다듬으며 나무를 달랜다
생의 방향 살핀 후 누울 자리 마련한다
첫 날(刀)은 이파리마저 놀라지 않게 한다

나이테 한 줄 슬금슬금 잘려 나가니
뱉어낸 밥 색깔이 뼛가루처럼 선명하다
백 년의 단단한 숨소리 한순간에 무너지고

한없이 차오르던 숨길은 물길이었을까
안쪽으로 파고들면 내력은 촘촘해지고
울음을 간직한 옹이가 더욱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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