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전영관
오후 네 시의 햇살은 손이 느리다
옆집 숟가락까지 챙기는 산촌의 오지랖처럼
호박이며 무와 가지까지 매만진다
당신은 등 돌리고 앉아 오가리들과 자분자분
비밀이라도 있는 듯 들췄다가
남이 들을까 가만히 덮고
여고 동창생 표정으로 내가 모를 것을 나눈다
겉마르기 전에는 탱탱했으니
사소한 것들도 내남없이 화려했던 날은 있는 것이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귀촌한다고 우쭐대면서
진지한 척 머리로만 예행한다
조붓한 당신 뒷모습을 콩밭에 앉혀놨다가
주방으로 가는 걸음걸이를
파스 사러 읍내 나가는 길 위에 올려본다
서울 새댁 곱다느니 머리숱도 많다느니
허리 굽은 인사말을 붙이며 노인네들도 동행하겠지
읍내 나갔으니 중국집까지 들르겠지
아내는 콩밭에 앉히고 읍내 심부름이나 시키고
녹슨 보습만큼 게으른 나는
밭고랑과 씨름하다가 삽자루 팽개치고 씩씩거리겠지
멀찍이서 구경하는 이장에게 너스레나 떨겠지
군대에서도 삽질은 잘했는데
돌밭이라 삽이 먹히지 않는다고
도시에서 남용했던 핑계를 꺼내겠지
걸음 느린 햇살 아래 손부채질을 해대겠지
정선 몰운대/전영관
나무와 사람은 슬픔의 속도가 다를 것
투신할 것도 아니면서
새들의 높이에서 아래를 보면
사랑의 문장이 바람에 흩어지는 것 같아
아프다
나무의 슬픔은
천 갈래로 몸이 갈라지고 뒤틀리면서
백 년 동안 천천히 머무는데
어제의 상실과 몰락 따위를 한탄하였다
벼랑을 움켜쥐고 선 소나무는
몸피를 키우는 일보다
쓰러지지 않으려 뿌리만 더 굵어졌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것들이나 차지하려고 악력을 키웠다
건성으로 타인의 역경을 칭찬하듯
드러난 뿌리들을 감탄하였다
애련(愛戀)을 앓는 이에게 여기를 권하겠다
하늘을 우러르면 슬픔도 흩어질 것
백년 소나무 곁에 앉은 채로 풍장을 치러달라고
바람에게 부탁했다
지진/전영관
진앙으로부터 열다섯 걸음 안팎의
초록에 균열이 간다 예감한 듯
뭉게구름을 걷어내며 두어 걸음 물러나는
허공의 이마는 깊은 물빛이다
골목을 질주하던 작달비도 허벅지의 힘을 빼고
회화나무 꽃들이 한꺼번에 떨어진다
균열이란
철물점 차양 안에 고여 있는 낮잠을
몸 낮춰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땡볕과
밤마다 가로수에 붉은 빛을 숙성시키는 나트륨등의
은밀한 움직임이 드러나는 틈이다
이 강력한 사변에 대해 준비하는 자세란 다만,
진앙의 귀뚜라미를 생각하는 것
균열로부터 시작될 붉음을 기록하기 위하여
첫 행을 비워두는 일
-詩 전문 계간지『포엠포엠』2012년 겨울호
느릅나무 양복점/전영관
물에 불려도 다림질해도
불거진 무릎은 제 모습을 찾지 못한다
책상에 문드러진 팔꿈치도 매끈함을 잃었다
펴지지 않는 어깨는 누가 두드려주나
봄에 적어놨던 산철쭉 주소와
기러기 울음을 채록한 악보를 주머니에 넣었는데
밑이 터져 버렸다 좋은 날 쓰려고 아껴두었던
함박웃음 몇 조각도 간 곳 없다
안색을 거들어주던 깃은 주저앉았고
단춧구멍은 채워도 삐걱거릴 만큼 헐겁다
아버지가 달아주신 채로 오십 년을 지나쳤으니
수시로 기워주시던 어머니도 팔순을 넘겼으니
알아서 새로이 장만할 때가 된 거다
느릅나무 그늘에 한나절 기다렸다가 맞춤으로
그림자 한 벌 챙겨 입고 돌아갈 참이다
파랑주의보/전영관
묵호항 어판장 지붕이나 두드릴까 죽변항 가서
포장마차 천막 들추고 난바다 이야기나 출렁거릴까
바람은 뭍으로 돌아가야 할 길을 엎어버린다
바람과 파도의 가계도 위에서는
나도 당신도 허약한 승객이라서
도동항 어느 방에 보퉁이처럼 무릎 맞대고
식은 칼국수 같은 오후나 달그락거린다
낡은 이불을 몇 번 더 덮어야 할지
소용없는 가늠이나 한다
바람과 파도처럼 남남이었다가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사람이 되기까지
누구를 흔들고 하냥 기다리게 했는지
서로 시선을 섞으면서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되짚어 보느라 조용조용 황망한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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