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실 감기
어두운 방에서 그녀 실을 감는다
실타래 끝을 마른 발로 버티고
이편에서 건너편 세월을 오가며
기억을 정리중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손에
하얀 실뭉치는 배가 부르다
그러나 가끔 손가락에 힘을 주어도
엉키어 따라오지 않는 기억도 있다
그때마다 실밥처럼 끊겨 나간 세월이
얼굴에 깊은 주름으로 남는다
주름이 얼굴에 수를 놓는다
한 올 한 올 가닥을 더듬어 보아도
풀리지 않는 그리움 같은 것,
그 뭉친 자리를 삭은 이로 끊으며
그녀 잠시 허리를 편다 그리고
끊은 자리 매듭으로 이으면서
삶의 상처 하나씩 딱지로 아문다
그녀의 살에 새롭게 돋아난 별들
어느새 창문으로 노을이 번지고
그녀, 생의 내면을 가로지르듯
실뭉치에 빛나는 바늘 하나 꽂는다
곶감을 깎는 일
햇볕 잘 익은 마루에 모여 여인들이
처마에 매달아 둘 감을 깎는다
좀처럼 떫은맛을 버릴 줄 모르는
단단한 기억들을 가지고 나와 사르륵
깎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칼날을 빠져 나온 껍질은 어느새
기억을 더듬는 뒷길 되어 몸을 뒤튼다
가끔 빈 소리로 농담이 오고 갈 뿐
누구도 자신의 길에 눈을 떼지 않는다
메말랐다고 생각했던 눈물샘이 다시
터질 것 같은 자그마한 떨림이
그들의 가슴을 지나갔기 때문이리라
손마디 까맣게 물들고 저녁이 와서
깎은 감을 실에 꿰어 일어날 때
그들의 손에 들려진 것은 더 이상
떫은 감이 아닐 것이다, 처마 밑은
한 사람씩 준비한 연등으로 환해지리라
가을 햇살 숨어들어 검붉게 불을 밟히는,
스스로의 눈물로 밟아지는 등
여인들은 어두웠던 기억을 밝히기 위해
저마다의 연등을 깎고 있는 것이다
국화가 피는 것은
바람 차가운 날
국화가 피는 것은,
한 잎 한 잎 꽃잎을 펼 때마다
품고 있던 향기 날실로 뽑아
바람의 가닥에 엮어 보내는 것은,
생의 희망을 접고 떠도는 벌들
불러 모으기 위함이다
그 여린 날갯짓에
한 모금의 달콤한 기억을
남겨 주려는 이유에서이다
그리하여 마당 한편에
햇빛처럼 밝은 꽃들이 피어
지금은 윙윙거리는 저 소리들로
다시 살아 오르는 오후,
저마다 누런 잎을 접으면서도
억척스럽게 국화가 피는 것은
아직 접어서는 안 될
작은 날개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잎 지는 날
은행나무 밑에서 더 이상 나는
세월에 대하여 할 말이 없네
제 속에 묻은 시간 먼저 화석이 되도록
가지 끝 수천 개 부채로 바람을 불러
활활 생의 불꽃 이어온 나무,
언젠가 그대 곁에 갈 수 있다고
지리한 장대비가 지나던 여름
그 불꽃 꺼질까, 꺼질까 마음 졸이며
안간힘으로 빗물 막아내던 나무,
그래 한 장 잎도 접지 못하고
뻐근하게 굳어 버린 그 나무 생각을 하면
그리움으로 혼자 만든 열매들
투둑, 투둑 내 가슴에 떨어지네
눈물로 피식, 쉽게 깨뜨리고 마는
나이 기다림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오늘처럼 우수수 부채 떨어뜨리며
은행나무 겨울의 불씨 가슴에 담는 날
나는 가슴 한 구석이 싸늘해지네
낡은 부채만 몇 잎 주워 들고서
식은 불씨만 자꾸 휘젓고 있네
늦은 답장
이사를 하고 나서야 답장을 씁니다
늦은 새벽 어두운 골목을 돌아 닿곤 하던 집
내 발자국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깨어
바람 소리로 뒤척이던 나이 많은 감나무
지난 가을 당신 계절에 붉게 물든 편지를
하루에도 몇 통씩 마루에 올려 놓곤 했지요
그 편지 봉하기 위해 버려야 했던 잎들은
모아 태워도 마당 가득 또 쌓여 있었습니다
나 그 마음도 모르고 편지 받아 읽는 밤이면
점점 눈멀어 점자를 읽듯 무딘 손끝으로
잎맥을 따라가곤 했지요 그러면 거기
내가 걸었던 길보다 더 많은 길 숨겨져 있어
무거운 생각을 지고 헤매기도 하였습니다
당신, 끝자리마다 환한 등불을 매달기 위해
답답한 마음으로 손을 뻗던 가지와
암벽에 막혀 울던 뿌리의 길도 보였습니다
외풍과 함께 잠들기 시작한 늦가을 그 편지는
제 속의 불길을 꺼내 언 몸을 녹이고
아침마다 빛이 바래 있었습니다 덕분에 나
폭설이 많았던 겨울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집에 돌아오는 길가 마늘밭에서
지푸라기 사이로 고개 내민 싹들을 보았습니다
올해는 누가 당신의 편지 받아 볼는지
나는 이제 또 다른 가지를 타고 이곳에 와서
당신이 보냈던 편지에 답장을 합니다
저수지에 갔었네
날이 풀리기 시작한 오후
그 저수지에 갔었네
허름한 식당 뿌연 창을 통해
나룻배 한 척 출렁이고 있었네
빈 배의 노를 저어
저쪽 산기슭에 가 닿는 상상을 하다
얼음 벌판에 막혀 돌아와 보니
산이 제 그림자 모서리를 깨뜨려
이쪽으로 밀어 보내 놓았네
그림자는 지난 계절 산이 모아 둔
고통스런 마음들이었네
나뭇가지에 긁힌 산새의 가슴이며
음지에 말라 간 풀포기의 뿌리며
힘없이 떨어지던 나뭇잎의 이별까지
산은 제 뒷모습 속에 감추고
이 겨울 얼음 속에 삭혀 내고 있었네
물결이 얼음 조각 핥아 녹여 내는 동안
내 가슴에도 언 그림자 몇이
시린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네
호-호- 입김을 불어 보아도
쉽게 녹지 않는 그림자,
내 가슴 가장자리에도 살얼음
얼고 있었네
바람의 무늬
산길 숨차게 내려와
제 발자국마다 단풍잎 붉게 물들이는
잎들뿐 아니라 오래도록 위태롭던
내 마음의 끝까지도 툭툭 부러뜨리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향천사香川寺 깊은 좌선坐禪 속에서
풍경은 맑은 소리로 바람을 다르고
나의 생각들도 좇아갔다가 이내
지쳐 돌아오고 마네
이 골짜기 전설傳說만큼이나 아득하여서
마음을 접고 서 있네 그랬더니
아주 떠난 줄 알았던 바람 다시 돌아와
이제는 은행나무를 붙잡고 흔들며
노란 쪽지들을 나에게 보내네
그 쪽지들을 펴 읽으며 나는
바람과 나무가 나누는
사랑을 알게 되었네, 가을마다
잎을 버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나무의
흔적,
나무는 깊은 살 속에
바람의 무늬 새겨 넣고 있었네
그 무늬로 제 몸 동여매고서
추운 겨울 단단히 버틴 것이네
풍경 소리가 내 마음의 골짜기에서
다시 한 번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네
물의 마음
봄이 되어서야 물가에
얼음 얼었던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 시린 말로 어떤 뿌리도 적실 수 없다고
그 차가운 물살 어떤 가슴도 씻길 수 없다고
물은 저 자신을 묶어 두었던 것이지요
자갈이나 모래 사이에 숨어서
겨우내 자신의 흐름을 지켜보다가
일렁이는 결들 속에 유리처럼 날카로운
소리들 하나씩 건져 올려서
흐르지 못하도록 매어 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차가운 소리들 얼어붙고
물은 제 속을 관통하여 속으로
흘렀던 것입니다 그 소리가
어떤날은 울음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기다림이 되기도 했지요
저마다 목마른 봄이 되어서야
그 소리의 칼날 볕에 녹이며 물은
다시 세상의 뿌리들에게 말을 걸지요
봄이 오는 물가에 앉아 있으면
버들강아지 솜털로 퍼어나는 물의 마음과
만날 수가 있지요
뿌리에 대한 단상
베어진 자리 속가슴 다 드러내 놓고
뿌리는 혼자 무얼 할까
거미줄처럼 짜 놓은 나이테 헤아리며
진한 눈물 송진으로 흘리는지
마음대로 뻗어 가던 가지들 토막토막
제 발 아래 쌓여 있는데
삐죽하게 마른 바늘잎으로 추억 한 장
지어 내지 못하는 소나무
하늘에 한 발짝 더 다가서기 위해
어둠을 헤매던 뿌리는 이제
바위 깊이 흐르는 물소리에 귀 적시며
조용히 눈감고 있겠지, 머릿속
수많은 생각의 갈래 모두 막히고
막막한 가슴으로만 듣고 있겠지
할 일 없는 바람만 가끔 기웃거리며
그 빈자리를 스치고 갈 뿐
더 이상 뿌리만으로는 나무가 아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
호박琥珀처럼 단단한 꿈 키우고 있을
뿌리의 아직 끝나지 않은 생애
그리하여 아픈 상처의 기억까지도
움켜잡고 더 슬피 우는 거겠지
봄이 보내 온 편지
참새들 담벼락 위에 종알대다가
바람 타고 어디론가 사라진 뒤
우체부 오토바이 소리에 나가 보니
우편함 가득 환하게 쌓여 있는
햇. 살. 들.
닭장 속의 닭처럼
이제는 갇혀 사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림자 끌고 다니다가 하루가 가면
어두운 꿈 밖에도 보초 하나 세워 두고
나는 잠에 든다, 홍도 동사무소 건너편
닭장 속의 닭처럼 울음도 잊은 지 오래
먹이에 길들여진 시간이 깨울 때까지
나는 윤기 잃은 깃털을 덮고 구석에
웅크리고 자리라, 새벽 늦게 발자국들이
나의 꿈자리를 밟고 다가와 드르럭
철문을 열기도 한다, 그때마다 옆에 누웠던
지친 그림자 하나씩 데리고 간다
이미 나는 더 빼앗길 것이 없으므로
잠꼬대처럼 뒤척이고 말뿐 깨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날은 새하얀 무정란을 품고
앓기도 하였다, 나는 살아 있는 것인지
툭툭 나의 껍질 두드려 보기도 하였다
마늘처럼 맵게
생각 없이 마늘을 찧다가
독한 놈이라고, 남의 눈에 들어가
눈물 쏙 빼내고 마는 매운 놈이라고
욕하지 말았어야 했다
단단한 알몸 하나 지키기 위해
얇은 투명막 하나로 버티며 살아온
나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어야 했다
싹도 틔우지 못한 채 칼자루 밑에
닭살처럼 소름 돋은 통 속에서
짓이겨진 너의 최후를 떠올려야 했다
네가 밀어 올렸던 줄기들 뽑혀 가던 날
거세당한 사내처럼 속으로 울던
뿌리들의 고통 잊어버리고
기껏 눈물 한 방울이 무엇이기에
누구를 욕하고 있단 말인가
독하면 독할수록 맛이 나는 게
그런 게 삶이 아닌가, 저 마늘처럼
모든 껍질 벗겨지고 난 뒤에도
매운 오기로 버티는 게 삶이 아닌가
바지락 맛을 잃다
소금물에 담가 둔 바지락들이
꾸역꾸역 해감을 뱉고 있다
갯벌 기던 바다의 기억을 오늘
육지의 식탁 앞에 토하고 있다
제 삶의 맛을 단단한 껍질 속에
채우며 걷던 부드러운 혀,
몸이 혀 하나로 이루어진 듯
맛을 찾아 기며 그려내던 길,
마음 오가는 파도로 지우고 있다
모래 알갱이 사이에 마련했던
하루하루의 집들, 그 비좁던
안식도 허물어지고 있으리라
생각해 보면 나는
바지락을 통해 바다를 맛보려는
욕심을 갖고 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지락들 뱉어낸 해감이
서서히 나를 채우고 있다
나는 내일 아침이면 맛을 잃은
질긴 살점들 씹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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