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마당이라는, 개의 이름/박해람

마당이라는, 개의 이름 박해람 마당은 녹슨 철조망에 갇혀 있고 철조망은 냄새도 없이 썩는다 마당은 가장 낮은 곳의 넓이이고 천적의 식성으로 정원은 아름다웠다 허송세월이라면 마당만 한 곳이 없겠으나 개의 등에는 이제야 꽃이 피었다. 작약 꽃과 엉겅퀴, 개나리는 형량이 정해진 꽃. 개는 여러 명의 주인이 있겠지만 끈, 끈은 봄엔 초록으로 철조망을 넘다가 가을엔 누렇게 마른다 막론하고 개는 줄기식물과에 가깝다 저녁을 먹고 난 개의 배같이 둥그런 마당, 대문 하나가 오래 열리지 않았을 뿐인데 천적들과 훼방들이 무성하다 개가 몸을 털어낼 때마다 개나리와 살구꽃이 떨어졌다 겨울, 누렇게 털이 말라죽은 개를 본 적 있다 밥을 먹지 못한 개는 틈으로 번져나간다 세상의 풀씨들이란 개의 털에서 쏟아졌을 것이다 이 집에 살..

좋은 시 2022.08.02

陽洞詩篇 2―뼉다귀집/ 김신용

민달팽이 ​ ​ 김신용 ​ ​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좋은 시 2022.07.30

폐가 앞에서/김신용

폐가 앞에서 김신용 폐가 앞에 서면, 문득 풀들이 묵언 수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떠올릴 말 있으면 풀꽃 한 송이 피워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람 떠나 버려진 것들 데리고, 마치 부처의 고행상苦行像처럼 뼈만 앙상해질 때까지 견디고 있는 것 같은 풀들 인적 끊겨 길 잃은 것들, 그래도 못난이 부처들처럼 세월을 견디는 그것들을 껴안고, 가만히 제 집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흙벽 무너지고 덩쿨풀 우거진 폐가 사람살이 떠나 풍화에 몸 맡긴 집, 그 세월의 무게 못 견뎌 문짝 하나가 떨어져도, 제 팔 하나 뚝 떼어 던져주고 홀로 뒹구는 장독대의 빈 항아리, 마치 소신공양하듯 껴안고 등신불이 되는 풀들, 그렇게 풀들의 집으로 고요히 돌아가고 있는 폐가. 그 폐가 앞에 ..

좋은 시 2022.07.30

상처 난 것들의 향기/조호진

- 조호진 빛나고 반듯한 것들은 모두 팔려가고 상처 난 것들만 남아 뒹구는 파장 난 시장 귀퉁이 과일 좌판 못다 판 것들 한 움큼 쌓아놓고 짓물러진 과일처럼 웅크린 노점상 잔업에 지쳐 늦은 밤차 타고 귀가하다 추위에 지친 늙은 노점상을 만났네. 상한 것들이 상한 것들을 만나면 정겹기도 하고 속이 상하는 것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떨이로 몽땅 가져가시오!" 떨이로 한 움큼 싸준 과일들 남 같지 않은 것들 안고 돌아와 짓물러져 상한 몸 도려내니 과즙 흘리며 흩뿌리는 진한 향기 꼭 내 같아서 식구들 같아서 한 입 베어 물다 울컥거렸네. ​ - 조호진 목숨보다 더 뜨거울 것처럼 길길이 뛰다 비루먹은 개처럼 꽁무니 빼는 詩 원숭이 똥구멍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詩 비겁과 거짓으로 뻔뻔해진 詩 도마에 올려 진 ..

좋은 시 2022.07.30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김사인 ​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며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니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

좋은 시 2022.07.30

저녁길/김신용

저녁길 김신용 그들의 함성에 중장비의 엔진은 호흡을 멈추었다. 현장 본부 앞마당에서, 머리에 띠를 두르고 답답한 가슴을 치듯 주먹 쥔 손을 흔들며 노동해방가를 부를 때, 파헤쳐진 공사장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우리는 손뼉을 쳤다. 이 땅의 곳곳에서 또 하루의 품을 팔기 위해 모여든 일용 인부들 그들의 힘찬 구호의 외침에 눈물마저 글썽였다. 이 하루, 공쳐도 좋았다. 그 수많은 나날 무릎 꺾여 살아온 노동의 하루쯤 무너져도 좋았다. (……) 그들의 몸부림에 손톱 하나 보탤 수 없는 우리는 들풀처럼 부끄러웠다. XX토건, 노란 회사 마크가 새겨진 그들의 곤색 잠바 유니폼은 얼마나 부러웠던가…… 이윽고 며칠간의 파업은 끝났다. 그들의 고정급은 올랐고, 시간차 수당도 받게 되었다. 모든 중장비의 심..

좋은 시 2022.07.30

환상통 幻想痛 /김신용 (1945~)

환상통 幻想痛 /김신용 (1945~)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 몸의 수족들 중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처에서 끊임없이 통증이 베어나오는 그 한상통. 살을 꼬집으면 멍이 들 듯 아픈데도, 갑자기 없어져 버린 듯한 날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木質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언젠가 그 지게를 부수어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리치고 뒤돌아섰을 때 내 등은, 텅 빈 공터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임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상실감일까? 새가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허리 굽은 할머니가 재활용 폐품을 담은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 끝으로 사라진다 발자국은 없고, 바퀴 자..

좋은 시 2022.07.30

아버지의 이/강경호

아버지의 이 뿌리 드러낸 고목처럼 하나 남은 아버지의 이, 우리 가족이 씹지 못할 것 씹어주고 호두알처럼 딱딱한 생 씹어 삼키기도 했던 썩은이 하나가 아직도 씹을 무엇이 있는지 정신을 놓아버린 채 든 잠속에서도 쓸쓸하게 버티고 있는가 (이빠진 아버지 초라한 모습에서 시인은 아버지들의 고단한 세상을 들여다 보며 아버지의 육체는 언제나 슬픔이라고 아버지들의 필생의 삶이 덜렁히 마지막 남은 대문 이 하나에 외롭고 쓸쓸히도 높게 남아 있다)

좋은 시 2022.07.30

넝쿨의 힘 / 김신용

넝쿨의 힘 / 김신용 집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 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비계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 여름 내내 모래자갈 져 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좋은 시 2022.07.30

호박 보름달/김영애

호박 보름달/김영애 21층 베란다에 늙수그레한 손님이 오셨어요 옮겨 앉으시면 속상하신다기에 별빛 잘 드는 곳에 모셔두고 늦가을 여문햇살 초겨울 시린 하늘 흠뻑 드시고 달달한 후생을 주십사 간청 드렸지요 가끔씩 똑똑똑 공손하게 안부를 여쭙는 동안 햇볕은 조금씩 김포공항 쪽으로 비켜서 주었어요 땅기운 깔고 앉았던 엉덩이가 얇아지고 토실토실하던 황금 피부도 푸석해지셨어요 오늘은 햇살 좋은 길일 만고풍상 다 겪은 노파처럼 충분히 달아올랐을까 엄마 엉덩이같이 접힌 골짜기에 심호흡을 대고 거부하는 칼날로 쾅쾅쾅 만삭의 배를 쪼갰어요 두 동강 난 몸 움싹으로 가득한 황금색 자궁 속에서 소름처럼 울컥 양수가 튀었어요 불쑥 내뱉은 어릴 적 생리통처럼 노란별꽃 뙤약볕우레 처서귀뚜리가 뛰어나왔어요 소스라쳤을 태아들, 나는 ..

좋은 시 2022.07.27

어둠을 더듬다/최정신

어둠을 더듬다/최정신 언어의 보고寶庫에 과부하가 걸린 이즘 가을보다 서둘러 당도한 모 문학지 청탁 엽서를 받는다 고료라야 고작 한 술 밥물도 못 안 칠 책 몇 권이지만 요기가 동해 거미줄 쳐진 글고를 뒤적인다 빈 쭉정이 풀석이는 멍석에 낱알 한 톨 건질 게 없다 잘 보이고 싶던 구레나루 턱선이 오월 다래순 같던 갓 부임한 총각 선생, 눈동냥도 알아야 한다는 말매가 생각킨다 고단수 소비자를 사로잡을 재료를 어디서 구하나 현대풍이라는 젊은네를 뒤적인다 정녕, 저 문맥이 모스부호가 아니라면 허랑방탕 까먹은 시간이 무색한 청맹과니다 과거는 뽕짝, 작금은 K팝, 미래는 암호, 어중간한 표절을 해봐야 우스꽝스러운 피에로 뛰뚱걸음이다 에만 자판을 밀어 던지고 낚을 컨닝 거리를 찾아 마우스커셔를 즐겨찾기에 디민다 모든..

좋은 시 2022.07.20

첫눈/장석주

첫눈 장석주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이루어졌거든 뒤뜰 오동나무에 목매고 죽어버려라 사랑할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실패했거든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눈길을 맨발로 걸어가라 맨발로 그대를 버린 애인의 집까지 가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끝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첫눈이 온다 그대 쓰던 편지마저 다 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들에 나가라 온몸 얼어 저 첫눈의 빈 들에서 그대가 버린 사랑의 이름으로 울어 보아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한 그대의 순결한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라 [감상] 첫사랑, 생각만 해도 왠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명치 끝이 먹먹해지는 그런 단어다. 사람들은 철부지 시절의 풋풋한 ‘첫사랑’을 왜 쉬이 잊지 못하는 걸까 러시아의 심리학자는 이와 같..

좋은 시 2022.07.18

나무말뚝/마경덕

나무말뚝 마경덕 지루한 생이다. 뿌리를 버리고 다시 몸통만으로 일어서다니, 한 자리에 붙박인 평생의 울분을 누가 밧줄로 묶는가 죽어도 나무는 나무 갈매기 한 마리 말뚝에 비린 주둥이를 닦는다 생전에 새들의 의자노릇이나 하면서 살아온 내력이 전부였다 품어 기른 새들마저 허공의 것, 아무것도 묶어두지 못했다 떠나가는 뒤통수나 보면서 또 외발로 늙어갈 것이다 -시집 『글로브 중독자』 중에서 [감상] 한 그루 나무말뚝으로 늙어가는 생을 읽는다 푸른 그늘 드리울 때는 새들의 놀이터가 되고 쉼터가 되었지만 날개달린 것들이란 훨훨 허공으로 날아가면 그뿐 더 이상 내줄 것도 없는 늘그막, 그래도 몸통만으로 일어서서 주어진 숙명이듯 밧줄에 몸을 건다 그게 인생이다 (양현근/시인)

좋은 시 2022.07.18

쑥부쟁이 / 박해옥

* 사진 : Heosu님 쑥부쟁이 / 박해옥 저녁놀 비끼는 가을언덕에 새하얀 앞치마 정갈히 차려입은 꼬맹이 새댁 살포시 웃음 띤듯하지만 꽃빛을 보면 알아 울음을 깨물고 있는 게야 두 귀를 둥글게 열어 들어보니 내 고향 억양이네 정성스레 냄새를 맡아보니 무명적삼서 배어나던 울엄니 땀내 울먹대는 사연을 들어보니 무망중에 떠나온 길이 마지막이었다는 고향집 언저리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쑥부쟁이야 쑥부쟁이야 층층시하 시집살이가 고달픈 거니 오매불망 친정붙이들 그리운 거니 옮겨 앉은 자리가 정 안 붙고 추운 것은 돌아갈 옛집을 갈 수 없기 때문이야 [감상] 가을 볕 고운 어느 날, 하얀 웃음인 듯 울음인 듯 남모를 슬픔을 살포시 베어 문 쑥부쟁이의 모습이 어머니의 결 고운 슬픔이랑 맞닿아 있는 것을 봅니다. 시인의 ..

좋은 시 2022.07.17

구슬을 꿰다/조경희

구슬을 꿰다 조경희 아침부터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나는 구슬을 꿰기 시작한다 둥근 상심들을 모조리 한 곳에 끼우고 있는 시간 처마 끝을 타고 똑똑 떨어지는 투명한 구슬들은 무슨 상심이 그리 많은 지 꿰어도 꿰어도 끝이 없다 한알 두알 구슬은 무게를 더해가는데 비는 좀처럼 그칠 줄 모르고 툭,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저절로 실이 끊어진다 도르르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구슬들 저것들을 다시 꿰어야하는 일상들이 장롱 밑으로 숨는다. [감상] 부질없는 걱정을 달고 사는 것이 어쩌면 삶인지도 모르겠다 처마 끝에 내리는 빗방울을 보면서도 구슬을 꿰듯 걱정을 한데 모은다 이런 저런 걱정과 근심으로 생각이 깊은 사이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그 무게를 차마 감당하지 못해 툭 끊어지는 저 일상의 실타래는 또 어찌할까 (양현근..

좋은 시 2022.07.17

채석강/서정임

채석강 서정임 그동안 틈만 나면 떡살을 얹어 온 대를 잇는 떡집이다 비 오는 날 거대한 떡이 익어가는 김이 오른다 먼 백악기부터 공룡들과 따개비와 고속도로를 달려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갯강구 같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시간을 사서 들고가는 저 오래된 떡집 떡이 익어가는 냄새를 맡는다 내 어머니의 어머니를 읽는다 차마 멀리 썰물에 쓸려 보내지 못한 채 한 알 한 알 알갱이로 가슴에 박힌 사연을 켜켜이 쌓아둔 그리하여 끝끝내 변산반도(邊山半島)에서 떡시루에 김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그 뼈아픈 회한을 읽는다 두 팔 걷어 올리고 오늘도 거대한 시루에 떡살을 안치는 누군가의 손길이 바쁘다 [감상] 채석강에 가면 누천만년의 시간이 쌓아올린 떡시루 같은 거대한 바위의 결을 만난다. 바람과 파도와 시간의 합작품에 무수히 ..

좋은 시 2022.07.17

가을, 곡달산 / 유현숙

가을, 곡달산 / 유현숙 퍼붓던 비 그쳤다 산등성이로부터 쏴아 바람 밀려온다 내 목이 꺾인다 간밤 내내 비에 젖으며 묵언 정진하던 잣나무들, 말할 거야 말해버릴 거야 다투어 소릴 지른다 황토등성이에 불 질러 갈아엎은 퍼런 젊음이 그 혈거시대를 살았던 정염이 곽란을 일으키며 수만 색깔 단풍을 게운다 함석지붕 위에서는 바람이 쿵쾅거리다 굴러 떨어지고 낡은 대소쿠리 하나 걸린 흙 벽담, 그 소리에 놀라 자빠진다 밤새워 제 속을 비워내고도 아직 가슴살이 붉은 저 땡초 문지르는 손바닥에 벌겋게 단풍 물 묻어난다 -유현숙 시집 ‘서해와 동침하다’ 어느덧 가을이다. 온몸을 휘감아오는 바람은 서늘하고 그동안 가꾼 수확의 기쁨을 맛보며 활동하기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가을이 어떤 이에게는 허무와 쓸쓸함으로 다가와 잠 못..

좋은 시 2022.07.17

감꽃 1 / 양현근

감꽃 1 / 양현근 마당에 감꽃을 내려놓고 안산 너머 보리밭 사이로 바람이 길을 내며 건너가면 서쪽 하늘이 홍시처럼 익어갔다 엎질러진 계절을 주머니에 주워 담던 손끝에 해마다 감물이 들었다 붉은 기억의 저편 골목길을 지키는 감나무에 풋감처럼 매달린 기억들 높이 올라가면 푸른 하늘에 닿을 거라고 긴 장대를 휘젓던 아이 그날의 풋내 나는 미소를 깔고 앉아 홍시처럼 물러 떨어진 꿈을 생각했다 유년의 뒤란에 다닥다닥 매달린 떫은 시간들 해거름 배고픈 송아지 울음이 감꽃에 앉았다가 후두둑 쏟아진다 묵은 감나무 그늘이 출렁거린다 -양현근 시집 「기다림 근처」 기억은 아직 소화되지 않은 맛이다. 덜 익은 감을 씹었을 때 입안에 달라붙어 쉽게 사라지지 않는 타닌 성분처럼 혀끝을 다시 한 번 굴려보게 하는 것이다. 그 ..

좋은 시 2022.07.17

못 / 권덕하

못 / 권덕하 옥탑 다시 환하다 어느 이주자 불 들인 모양인데 웃풍에 설핏 잠 깨면 하얀 입김에 낮은 천장 꽃무늬 실려 있어 처음엔 낯설 것이다 시린 햇살의 국경 넘어 와 벽지에 이울던 남십자성 별빛, 막막할 때 눈길 머물던 그 자리 벽 먼지가 그려놓은 사진틀이 숨표로 변한 못 자국에 걸려 생의 얼개만 남았는데 실 평수에 들지 못한 꿈에 박혀 한 땀 한 땀 십자수 놓아갈 형틀 파인 몸, 몇 바퀴 더 틀면 가족사진 걸 힘도 생길 것이다 - 권덕하 시집 ‘생강 발가락’ 전세난이 심각하다. 전셋값이 상승하면서 깡통전세에 대한 우려도 커지는 추세다. 이에 생활고를 겪는 사람들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어느 이주자가 옥탑에 불을 들였다. 누군가 잠시 살다 이사를 한 방, 잠을 자다 웃풍..

좋은 시 2022.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