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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어둠을 더듬다/최정신

에세이향기 2022. 7. 20. 11:31
어둠을 더듬다/최정신







언어의 보고寶庫에 과부하가 걸린 이즘 가을보다 서둘러 당도한 모 문학지 청탁 엽서를 받는다
고료라야 고작 한 술 밥물도 못 안 칠 책 몇 권이지만 요기가 동해 거미줄 쳐진 글고를 뒤적인다



빈 쭉정이 풀석이는 멍석에 낱알 한 톨 건질 게 없다 잘 보이고 싶던 구레나루 턱선이 오월 다래순
같던 갓 부임한 총각 선생, 눈동냥도 알아야 한다는 말매가 생각킨다


고단수 소비자를 사로잡을 재료를 어디서 구하나 현대풍이라는 젊은네를 뒤적인다 정녕, 저 문맥이
모스부호가 아니라면 허랑방탕 까먹은 시간이 무색한 청맹과니다

과거는 뽕짝, 작금은 K팝, 미래는 암호, 어중간한 표절을 해봐야 우스꽝스러운 피에로 뛰뚱걸음이다
에만 자판을 밀어 던지고 낚을 컨닝 거리를 찾아 마우스커셔를 즐겨찾기에 디민다
 
모든 시련이 다 꽃이 될 리 만무지만 세월의 썰물이 훑고 간 마른 계곡에서 눈부신 비늘이 퍼덕이는

육질을 건져낼 재간이 없어 포기하고 만다 
 
귀 닳은 반닫지 속 한물간 연애편지처럼 촌티 나는 너스레나 어루만지는 하얀 밤이다
 
 
푸른 날 한때 연애편지를 숨겨주던 공범이 너와 닮았다
       부제 - 단상(斷想)-


늙고 추해진 것에는 수거되지 않는 추억이 산다

뒤 베란다 유리문이 펼쳐놓은 공원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그가 삐딱한 자세로 며칠째 서성인다

청춘을 지탱해주던 한쪽 다리는 관절이 꺾이고
절절하던 사랑이 식은 가슴에 시시때때로 던지는 바람의 추파
쓰고 버린 휴짓조각 철 늦은 계절을 배회하는 활엽 부스러기가
터진 속살을 제 멋대로 더듬는다

주름진 갈피마다 간직하던
기다림의 전생은 퇴색한 기억으로 휘장을 내리고
도도하고 품위 있던 간극의 시간이 이별이란 종례도 없이 실종되었다

한 시절 기름지고 황홀했던 샹들리에 불빛 아래
비발디의 사계가 이명으로 들리는지 둔탁한 첼로음이 삐꺽인다  

가끔 길고양이 한 마리 품에 안겨 고단한 하루를 말아
제 살을 핥으며 미지근한 햇살을 당겨 덮는다

충직한 개처럼 네 다리를 세워 주인의 오만과 안락을 위해 바쳐졌을
병든 생애가 거추장스러운,
야음을 빙자한 양심에 배신당한 공복의 허기를 이우는 노을이
쓸쓸히 매 만진다

푸른 날 한때 연애편지를 숨겨주던 공범이 너와 닮았다.

 

 

 

신발


우리 콩 두붓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이 안 보인다
종일 끌고 다니던 짐짝을 잠시 내려놓고 제 주인이 돌아오길 얌전히 기다
리다 낯선 짐을 싣고 어디로 간 걸까 헤 벌린 입으로 한 마디 항변도 못하
고 익숙하지 않은 거동에 얼마나 불편했을까

매사에 허둥대는 나의 눈에 띄지 않던 '잃어버린 신발은 책임지지 않습니
다' 신발장 옆 단호한 팻말에 상한 의중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버려진 신
을 신고 돌아오는 길, 이 낯선 신발도 느닷없이 바뀐 걸음에 못마땅한 심
중을 드러낸다

마지못해 따라나선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자꾸만 안쪽으로 기운다
세상 일이 어디 꼭 제 성에 차도록 살게 된다더냐 만  
육신 가장 낮은 변방에서 고린내 나는 삶을 지켜주던 너에게 살가운 눈길
한 번 던져주지 못했구나

내 사랑은 편편이 등 뒤에 외치던 회한의 엔딩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어떤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랑은 주는 거니까, 그저 주는 거니까,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
  그렇다. 사랑은 그저 주는 거니까 기약없이 누군가의 밑둥을 지키며 고독해도, 숨어 자기를 낮추어 무언가의 배경이 되는 일은 힘들어도 행복한 것이다. 그늘이란 그런 것이다. 햇볕 뒤에 자기를 숨기고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편안한 쉼이 되어주는 것.

   이 시에서 그늘이라는 상징을 통해 표출된 어머니의 블랙홀이란, 우리 모두 동경하는 그리움으로, 이 세상 그 어떤 사랑보다 위대한 사랑을 말한다. 이것이 무한한 희생을 바탕으로 한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임을 뜻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린 모두 누군가의 그늘 속에서 편안한 쉼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때가 되면  우리도 어머니처럼 태양을 등지고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야 한다. 상대가 누구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굳이 알아볼 필요 없이, 그저 주어야 하는 사랑만을 물기 배인 음습한 곳에 담은 채 희생을 밑바닥까지 적셔야 한다. 양분이 햇볕에 닿는 짜릿한 그 순간을 기억하며 올곧은 줄기를 키워 내고, 그것만이 내가 밟았던 음지에 대해 화답하는 길인 것처럼..

  햇볕 뜨거운 날, 고맙다는 말이 힘없이 입가를 맴돌면 스스로 나무 한 그루 없는 벌판에 서서 그늘이 되어 본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깊은 통증을 감싼 채 사랑을 내어 주었듯, 그렇게 나도 누군가에게 어깨를 내어 주면서...
   그늘이 되어, 남 모르게 흐른 땀방울에게 진심 어린 경의를 다해 감사를 드리고, 변치않는 어머니의 미소처럼 환히 웃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주는 사랑을 위해, 이제는 누군가의 그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선뜻 그늘이 될 때이다.                                                                      
                                                                                                                     / 김춘경 (시인, 수필가)

종이에 베이다 / 최정신



읽던 책 접힌 페이지를 열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온몸의 감각이 눈곱만한 상처에 소스라치며 깨어 난다
저 하찮은 종이 어디에 나를 질책하려는 전의[詮議]를 숨겼을까

넘겨버린 연둣빛 책장이었을 때 꽃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읽지 못했다
보리가시 밑동에 감추어 둔 풋물의 의미가 일용할 양식을 준비하는
사랑이라 읽지도 못했다 햇살과 바람의 은혜를 동봉한 과육을 탐했을
때도 피흘린 나무의 수고에 밑줄 그어 읽을 줄 몰랐다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까막눈이 바로 내 안에 있었다니, 감사의 건조증에라도 걸렸던
것이다

늦 트인 까막눈이지만 낙관처럼 새겨두어야 할 것들에 침 발라 붉은 밑줄을
긋는다 딱 한 번 주어진 책 한 권을 건성건성 넘겨버린 나를 얇은 종이모서리가
꽃물 생명수를 주시며 호되게 질책한다

 

낡은것에 대한 단상 / 최정신
낡은 것에는 추억이 있다
뒷 베란다에서 내다 보이는 공원에
누군가 슬며시 내다 버린 소파,
지탱해줄 한쪽 다리마저 꺾이고
팽팽하던 사랑도 빠져나간 
흐물해진 가슴에는 허락 없이
황사바람에 날려온 잡풀들 
속살까지 더듬으며 추근덕 거린다
기름지고 황홀했던
근사한 샨데리아 불빛의 기억도
쪼골쪼골 주름진 갈피마다 간직하고 
도도하고 품위있던 시간은 멸종되었다
충직한 개처럼 온 몸으로 
누군가의 안락을 위해 바쳐졌을
생애가 거추장스러워진
폐기 수거증 한 장 배당 받지 못한
버림받은 소파
이우는 노을로 달래는 허기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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