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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쿨의 힘 / 김신용

에세이향기 2022. 7. 30. 18:28

넝쿨의 힘 / 김신용

 집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 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비계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 여름 내내 모래자갈 져 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하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

허공에 덩그러니 매달린 그 사상누각을 보며, 혀를 찰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넝쿨은 그 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다

낭떠러지든 허구렁이든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갔을 것이다

모랫바람 불어, 모래 무덤이 생겼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생기는 사막을 걸어간 발자국들이

비단길을 만들었듯이

그 길이, 누란을 건설했듯이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가, 저렇게 허공중에 열매를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 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 듯이, 둥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떠올려 놓았을 것이다

오늘, 조심스레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저 호박을 따리

오래도록 옹기 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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