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곡달산 / 유현숙
퍼붓던 비 그쳤다
산등성이로부터 쏴아 바람 밀려온다
내 목이 꺾인다
간밤 내내 비에 젖으며 묵언 정진하던 잣나무들, 말할 거야 말해버릴 거야
다투어 소릴 지른다
황토등성이에 불 질러 갈아엎은 퍼런 젊음이
그 혈거시대를 살았던 정염이
곽란을 일으키며 수만 색깔 단풍을 게운다
함석지붕 위에서는 바람이 쿵쾅거리다 굴러 떨어지고
낡은 대소쿠리 하나 걸린 흙 벽담, 그 소리에 놀라 자빠진다
밤새워 제 속을 비워내고도 아직 가슴살이 붉은
저 땡초
문지르는 손바닥에 벌겋게 단풍 물 묻어난다
-유현숙 시집 ‘서해와 동침하다’
어느덧 가을이다. 온몸을 휘감아오는 바람은 서늘하고 그동안 가꾼 수확의 기쁨을 맛보며 활동하기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가을이 어떤 이에게는 허무와 쓸쓸함으로 다가와 잠 못 이루기도 한다. 나뭇잎이 물들고 떨어지고, 나무가 빈 몸이 되어가는 일, 그것은 단지 우리 눈에 한 폭 풍경으로 비치는 것이나, 그 속에서는 분명 온통 푸르렀던 날들을 비워내는 고통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새로운 계절로 들어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 너와 나 사이 발생한 갈등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그리하여 나를 비우고 너를 비우고 곽란을 일으키며 수만 색깔 단풍을 게워내도 아직 가슴살이 붉은 땡초로 남아있는, 결국 그 비애는 내가 목을 꺾어야 한다. 그래야 해결되는 것이다, 문지르는 손바닥에서조차 벌겋게 단풍 물이 묻어나야 내 속에서 온전히 맞이할 수 있는 계절, 성숙의 계절인 가을은 그래서 아름답다. /서정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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