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용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생명은 그 자체로 들꽃처럼 눈부셔요. 아무리 연약해 보일지라도, 아무리 가난해 보여도, 그래서 안쓰러워 보여도 생명은 그 자체로 멋진 우주에요. 생명은 그 자체로 자유로워요. 갈 데가 있어도 느릿느릿 가잖아요. 덜 가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들 나름의 자연의 속도를 잃지는 않아요. 민달팽이는 우리보다 걱정이 덜 할 수도 있잖아요. 물이 흐르듯이 봄 오면 꽃 피어나듯이 그는 걸림이 없어요. 세상의 일은 세상에게로 툭, 던져버렸죠. 조금은 술에 취해서 조금은 벗은 채로. 스스로 용기백배하면서.
선사(禪師)처럼 한 번 크게 우리를 꾸짖기도 하잖아요. 오, 당찬 민달팽이! 오, 치워라, 그늘이라니! 목소리가 쩌렁쩌렁하잖아요.
시인 문태준
陽洞詩篇 2―뼉다귀집/ 김신용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줏어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쩌다 살점이라도 뜯고 싶은 사람이 들렀다가는
찌그러진 그릇과 곰팡내 나는 술청 안을
파리와 바퀴벌레들이 거미줄의 현을 고르며 유유롭고
훔친 자리를 도리어 더럽힐 것 같은
걸레 한 움큼 할머니의 꼴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뒤돌아서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첫새벽 할머니는 뼉다귀를 뿌연 뼛물이 우러나오도록
고아서 종일토록 뿌연 뼛물이 희게 맑아질 때까지
맑아진 뼛물이 다시 투명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푹 고아서 아침이 오면
어쩌다 붙은 살점까지도 국물이 되어버린
그 뼉다귀를 핥기 위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지요
날품팔이지게꾼부랑자쪼록꾼뚜쟁이시라이꾼날라리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
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
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뼉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
뼛국물을 할짝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
뼉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얼마나
분신하고 싶었던지, 지금은 힐튼 호텔의 휘황한 불빛이
머큐롬처럼 쏟아져 내리고, 포크레인이 환부를 긁어내고
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 무크지 『현대시사상』 1집(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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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전력만큼 ‘버라이어티’한 직업군이 또 있을까만 1988년 김신용 시인의 등장은 문단에서도 작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열여섯 나이에 부랑을 시작하여 서울역 지하도와 대합실이 숙소이자 놀이터였던 그는 동냥은 물론 끼니를 해결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매혈과 각종 ‘치기’범죄도 불사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풀빵구리에 쥐 드나들 듯 감방과 양동을 오가면서 별을 5개나 달았다. 그러는 동안 장르불문 그가 감옥에서 읽어치운 엄청난 독서량은 놀라울 정도였고, 그 독서와 사유를 바탕으로 마흔넷에 ‘陽洞詩篇’을 발표하며 시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 시는 지금은 도려내진 서울의 환부 ‘양동’에서 화염처럼 살았던 지게꾼출신이 무림고수로의 등극을 예고하며 내뽑은 칼날 위 섬광 같은 작품이라 하겠다. '陽洞'은 경주 양동마을과 동네 이름은 같으나 그 속살은 천양지차이로 과거 서울역 앞 대우빌딩에 가려진 슬럼가를 말한다. 바깥에서 보면 치부이지만 도시의 부랑자, 똥치(창녀), 쪼록꾼(매혈자), 일용잡부, 마약중독자, 양아치 등 밑바닥 인생의 총집결지이며 본산이었다.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 하루하루가 고단한 인생들에게 뼈다귀 국물은 거의 유일한 보양식이다.
시인은 그걸 안주삼아 작살주(막걸리에 소주를 탄 것) 몇 잔 들이키면 내장 곳곳이 가로등 켠 것처럼 환해지고 마침내 똥구멍 끝이 노글노글해지면 ‘씨부랑탕’ 욕이 나오고 노래가 나오고 그런 다음에 시가 나온다고 했다. 그렇게 시가 그에게로 가서 그를 살려냈다. 문학은 선택된 재능을 지녔거나 가방끈 긴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돈 벌고 출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한 물음만 있으면 누구라도 들이댈 수 있는 장르이다. 인간과 자연, 사물과 현상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성찰의 자세만 가진다면.
'톰 소여의 모험'의 마크 트웨인은 초등학교만 나왔고 헤밍웨이는 시골의 평범한 고등학교 출신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오랫동안 인생 밑바닥을 헤매고 다닌 알코르중독자였다. 불우하고 험한 생을 살았던 시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다만 그들의 공통점은 세상을 흐물흐물 순응만하지 않고 뜨겁게 살았다는 점이다. 김신용 시인 역시 둘레의 삶을 뜨겁게 연민하고 처절하게 번민하였으리란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렇게 빚어진 시이기에 시인의 체험 공간을 한번 가보지 않고 ‘뼉다귀집’국물을 마셔보지 않아도 그 연민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내게도 희미한 흑백사진처럼 남겨진 잔상이 있다. 때로는 아릿하고 때로는 우습고 때로는 같잖고 때로는 슬펐다. 후암동 독신자숙소에서 남대문의 직장까지는 통근버스로 10분 남짓, 걸어서는 35분이면 족했다. 출근은 주로 통근버스였지만 퇴근길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가끔은 일반버스였겠고 또 가끔은 비틀거리며 걸었을 것이다. 남대문에서 ‘양동골목’을 거쳐 남산 앞 고바위길을 지나 후암동 병무청이 나오면 거진 다 온 것이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뼈다귀집’을 알지는 못했다.
권순진
재봉틀
김신용
풀밭 위에 재봉틀 한 대가 놓여 있다
365일 수의를 짓느라 낡아지고 칠 벗겨진 재봉틀
순한 눈망울의 맹인안내견처럼 풀밭에 앉아 있다
그 푸른 지팡이에 이끌려온 내 만혼晩婚의 날들
된장독 이불 보따리 같은 가재도구들을 곁에 부려놓고
신호등 앞에서 앞발을 모으고 있는 것처럼 앉아 있다
저 신호등의 색깔이 푸른 제비꽃으로 바뀌면
또 어디로 가나? 눈 깜박이는 나비 한 마리
재봉틀 위에 날아와 앉아, 낯선 길을 눈새김 하듯 날개를 접는다. 풀로 만들어진 수의
풀의 실을 뽑아 지어진 옷을
매일 하루하루에게 입히며, 그대 위해 옷 한 벌 지어본 적 없는
품삯, 풀에서 뽑아낸 실로 지어
풀처럼 깨끗이 삭아 갈, 또 하루를 꿈꾸는지
나비가 팔랑 나래를 펴고 울타리를 넘어 날아간다
풀의
옷은, 풀잎이듯
태우면 고운 재의 입자粒子만 남는, 눈길 거두고
몸 일으킨 맹인안내견, 목줄 내밀어 새로 이삿짐을 푼 집의 방으로
다시, 나를 데려갈 것이다
풀밭 위에
놓여 있는 재봉틀 한 대,
황혼을 이끌고 온 해거름의 일꾼처럼, 순한 눈망울을 껌벅이며
마당가에
앉아 있는, 내 만혼晩婚의
텃밭.
북돋운다는 일/ 김신용
밭을 매고 있는데, 지나가는 할머니가 물끄러미 바로보더니 혀를 차듯 말한다. 밭을 맬 때는 풀만 뽑는 것이 아니라 북을 돋워줘야 하는 거여~. 그래야 밭도 이뻐보이고 튼튼해지는 거여~. 돌아보니, 내 호미질이 지나간 자리 흙이흘러내려, 배추의 실뿌리가 드러나 있다. 무의 밑뿌리도 보일 것 같다.
북돋운다는 것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인 줄 알았다. 그 말의 성찬인 줄만 알았다.
내가 언제 밭의 머리만 깎는 이발사가 되었나? 밭이 이발소 의자에 앉은 것 같다.
무지는 늘 그렇게 빚어진다. 밖으로 드러난 헛뿌리를 말리는 볕이, 꺾인 허리에 부목을 받쳐주는 붕대가 아님을 야윈 밭둑이 말해준다
내 부끄러움의 절개지에서 드러난 편견의 나무뿌리들이, 앙상히 허공을 움켜쥔다. 불끈 방에서 눈감고 쓴 글씨처럼 오만의 잡뿌리들도 서툴게 드러나 보인다.
지난날, 동네 이발관의 벽에 왜 밀레의 <만종>이 걸려 있었는지, 조악한 틀 속이지만 <이삭 줍는 여인>이 어김없이 붙어 있었는지, 오늘, 할머니의 핀잔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내 얼굴이 나무뿌리들이 파고든 바위처럼 쩍쩍 금이 가는 것 같다.
그러므로 밭을 맨다는 것은, 풀을 뽑은 빈 자리 흘러내린 흙을 끌어 모아 밭이랑을 두툼히 묻어주는 일. 줄기 밑둥에 바람이 스며들지 않게 살 입혀주는 일.
북돋우는 일이 이렇게 바깥으로 헛뿌리가 드러나지 않게 하는 일이란 것을, 드러난 잔뿌리는 물기 마르지 않게 흙손으로 다독여주는 일이란 것을, 깨닫고 나니
오늘, 비로소 밀려드는 산그늘이 밀레의 만종 같다
들판의 미루나무 그림자도 이삭 줍는 여인을 닮는다
쑥 ․ 素描
이른 봄, 이제 막 돋은 어린 쑥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그 여린 뿌리들이 벌써 땅 밑에서 넝쿨로, 넝쿨로 이어져 있다
지하에 매설된 전화선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다
어쩌면 쑥들은, 그 전화선으로 봄과 통화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잘 견뎠냐고, 언 땅 밑에서 춥지는 않았냐고, 방구들에 불은 잘 들었냐고
겨우내 눈 쌓여 끊긴 길에 얼굴 내밀어 서로 소식 전하듯이
그렇게 안부를 물으며 숨죽여 웅크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봄 햇살이 퍼지자 한 뼘 자란 키로도 서로 부둥켜안는 것을 보면
힘줄 버팅겨 飛階를 오르는 종아리 같은 초록으로
서로 쓰다듬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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