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가 앞에서
김신용
폐가 앞에 서면, 문득 풀들이 묵언 수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떠올릴 말 있으면 풀꽃 한 송이 피워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람 떠나 버려진 것들 데리고, 마치 부처의 고행상苦行像처럼
뼈만 앙상해질 때까지 견디고 있는 것 같은 풀들
인적 끊겨 길 잃은 것들, 그래도 못난이 부처들처럼
세월을 견디는 그것들을 껴안고, 가만히 제 집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흙벽 무너지고 덩쿨풀 우거진 폐가
사람살이 떠나 풍화에 몸 맡긴 집,
그 세월의 무게 못 견뎌 문짝 하나가 떨어져도, 제 팔 하나 뚝 떼어 던져주고
홀로 뒹구는 장독대의 빈 항아리, 마치 소신공양하듯 껴안고 등신불이 되는
풀들, 그렇게 풀들의 집으로 고요히 돌아가고 있는 폐가.
그 폐가 앞에 서면
마치 풀들이, 설산 고행을 하듯 모든 길 잃은 것들 데리고 귀향하는 것 같을 때 있다
풀의 집은 풀이듯 데려와, 제 살의 흰죽 떠먹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못과 가시/김신용
못은 가시―, 가시가 아니라 可視―. 눈의 시선이 가닿는 만큼의 거리, 상상 그
너머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면에까지 가 닿기 위해, 지금 서 있는 곳에
정확히 머무는 것
새는 자신이 앉고 싶은 가지에 옮겨가지만, 그것은 날개를 가진 것의 일
날개가 없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삶의 영역인, 지상에 직립한다
어쩌다 별을 쳐다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가시권 내의 거리―. 그 너머, 아득한 몇
십 몇 백억 광년 밖의 별자리도 짚어 보지만 못은, 곧 되돌아 와 자신이 머무를 곳
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착지 한다. 그것이 날개가 없는 것의 생―, 지상에 직립할
수밖에 없는 것의 삶―.
그 예각화된 시선―, 못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자신이 머문 자리, 돌아 갈 길을 만들지 않는다
간혹 날개가 없는 시선이, 눈에 가시처럼 박혀 와도
자신이 머물 곳을 향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투신한다
可視는, 그런 못의 생애―.
가시권은, 그런 못의 영역(領域)―.
너머는, 언제나 시선의 내면에 방사형으로 뻗어 있지만, 그 뿌리가 피워 올리는 것은
지금 이 곳이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가지도 않는다. 한 번 박히면 일생인, 못
의 길―. 때로는 비바람이 불고 폭설이 내리고 안개의 숲에 뒤덮여 있기도 하지만,
可視는, 자신이 가 닿을 수 있는 곳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 길이 때로는 전신에 가시처럼 박혀 와도, 못은
그렇게 현실의 정곡에 꽂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면까지 조립한다.
이것이 날개가 없는 것의 생―, 그러나 못은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可視는,
그런 못의 외줄기 길―.
못은, 결코 돌아갈 길을 만들지 않는다
미운 오리새끼/김신용
그는 죽었다. 세운상가 육교 밑, 시멘트 바닥에 쪼그려 엎드려서
개처럼.
곁엔 지게 하나가
다 부셔져 가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빈 술병과 라면과자 껍질만
그의 부랑의 넋이듯 굴러다니고 있을 뿐
-지게꾼 아냐.
-알콜중독였던 게로군, 밤새 술과 자다가 행복하게 복상사 했구먼.
구경꾼들의 수근거림이 걸려 있는 육교난간의 판넬화 속에서
제복의 비둘기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이 화창한 봄날의 얼굴에 웬 작자가 침을 뱉아, 하는 표정으로
사진기의 셔터가 눈을 흘겼다. 네가필름의 침묵이 여러 각도에서
죽음을 봉인해 버렸다.
아침 해가 구름 뒤로 살짝 숨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주검위에 가마니가 덮히자
얼른 나와 햇살의 조화 몇 송이를 떨어뜨리고는 잠시 묵념하는 척했다.
곧 이어 앰뷸런스가 아이고 아이고 哭의 경적을 울리며 왔다가
행려병자 사망 확인서를 꼬리표로 단 소포가 되어 어디론가 배달되어 가버리고
지게만 홀로
관절마디를 꺾는 적막을 이 악물고 견디고 있었다
풍경 65/김신용
역은
언제나 성기였었어
우리는 자궁을 찾아 헤매는 정충들이었고
밥 한 그릇, 하룻밤 따뜻한 잠자리의 난자를 만나
꿈의 양수 속에 포옥 파묻혔다가
다시 태어나고 싶어서
꽃처럼
다른 욕심은 없었어 무작정
얌생이질로 숨어 탄 완행열차는
밤의 질 속에서 숨가쁘게 헐떡이다
어느 이름 모를 역에서 부르르 진저리를 치면
풀씨처럼 우리는 흩날리곤 했어
일터를 찾아,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억새풀 속에서
허리 부러져 신음하는 길을 따라
부랑의 머리칼을 휘날리는 바람 속에 서면
세상은 빈 쓰레기통으로 덜그럭거리고
속절없이 내리는 어둠의 휴지에 닦여
절망의 모퉁이에 머리를 찧으며 처박히곤 했어
몸을 팔며. 혼을 팔며 어둠속
그 겨울의 산하
난자 하나, 먼 마을의 불빛을 따라
바람의 손에 목덜미를 이끌려 떠돌다 지치면
밤의 긴 그림자를 끌며 다시 찾아드는 곳
역은
언제나 성기였었어
잡풀의 시/김신용
차라리 매독 균이고 싶었어요
언제나 플라스틱 꽃잎만 터트리는 그대
시멘트로 만든 성기에 박힌 내
나선형의 뿌리
피고름의 꽃이라도 피워보고 싶었어요
그대 철사로 만든 혈관 속을 파고들어
가득 고인 어둠의 피톨들을 빨아
잎잎이 노을로 뚝뚝 흐르는
꽃이고 싶었어요
제 어둠의 무게로 스스로 금이 간
저 굳어버린 자궁 속에
악착같이 몸을 묻는 풀씨의
넋, 살별처럼
세상의 머리 위에 가시관으로 빛나고 싶었어요
고난의 못, 이 땅의 사지에 박고
햇살 푸른 황토 언덕에 서서
내 십자가, 타오르는 억새풀 그 질긴 뿌리로
저 콘크리트의 가슴에 그 무엇도 지우지 못할
뱀의 문신을 새기고 싶었어요
살을 파고드는 창날, 이단의
비 내려
혼돈 속에 그대 다시 잠들 때
내 물구나무 선 가나안의 꿈속으로
피고름으로 빚은 내 사랑의 젖과 꿀이 흐르게 하여
돌무덤 속에
놀빛의 열락에 잠긴 진달래
그 선연한 무늬의 내 꿈을 피우기 위해
차라리 매독 균이고 싶었어요
겨울 함바에서 2/김신용
눈이 내린다.
비록 헐벗은 몸이지만 따뜻이 체온 나누던
판자촌, 헐린 자리
온갖 형태의 돌과 나무가 심어진 정원에
채색된 거대한 아파트의 군락 위에
눈이 내린다.
뜯겨, 그 황량하던 벌판 위의 저 役事
새삼 사람의 무서운 힘을 떠올리듯 내린
눈은 쌓이지만
뿌리 뽑힌 잡초 같은 발자욱 찍으며
바람 불면
뿔뿔이 흩어지던 그 힘의 분산처럼
눈이 내린다
평당 몇 백만 원의 호화맨션이 꽃핀 자리
산에서 뽑혀 온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값도 못 되는
긴 노동의 품삯을 쥐고
지난 날 그 황량하던 벌판만이 제 몫인 떠도는 뿌리들
웅크려 떨고 있는 발자욱 지우며
눈이 내린다.
흩어지면 더 큰 외로움이 저 홀로 얼어붙는 이 저녁
서로의 체온이 더 그리운 겨울밤이 내리고
바람 불면 또 밑둥까지 흔들리는 함바를 찾아드는
추위여
찢어진 판자벽 틈새로 파고든 외풍의 퍼런 서슬에
어둠 한 채 이불 밑, 더욱 웅크리고 누운
잠 속으로
잔뿌리들 서로 엉켜 만리장성 쌓는 모습으로
밤새 사륵사륵 눈이 내린다.
온세상 하얀 눈꽃 한 송이로 피워올리며 꿈결이듯
꿈결이듯 눈이 내린다.
전어/ 김신용
참, 동전 짤랑이는 것 같기도 했겠다 한때, 짚불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구워지던 것 비늘째 소금 뿌려 연탄불 위에서도 익어가던 것 그 흔하디흔한 물고기의 이름이 하필이면 錢魚라니…… 손바닥만한 게 바다 속에서 은빛 비늘 파닥이는 모습이 어쩌면 물속에서 일렁이는 동전을 닮아 보이기도 했겠다 통소금 뿌려 숯불 위에서 구워질 때,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그 구수한 냄새가 풍겨질 때, 우스갯소리로 스스로 위로하는 그런 수상한 맛도 나지만, 그래, 이름은 언제나 象形의 의미를 띠고 있어 살이 얇고 잔가시가 많아 시장에서도 푸대접 받았지만 뼈째로 썰어 고추장에 비벼 그릇째 먹기도 했지만 불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냄새는, 헛헛한 속을 달래주던 장바닥에 나앉아 먹는 국밥 한 그릇의, 그런 감칠맛이어서 손바닥만한 것이, 그물 가득 은빛 비늘 파닥이는 모습이 그래, 빈 호주머니 속을 가득 채워주는 묵직한 동전 같기도 했겠다 흔히 ‘떼돈을 번다’라는 말이, 강원도 아우라지쯤 되는 곳에서 아름드리 뗏목 엮어 번 돈의 의미를, 어원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바다 속에서, 가을 벌판의 억새처럼 흔들리는 저것들을 참, 동전 반짝이는 모습처럼 비쳐 보이기도 했겠다 錢魚, 언제나 마른 나뭇잎 한 장 같던 마음속에 물고기 뼈처럼 돋아나던 것 - 시집 『 잉어 』 (시인동네, 2013) 팔월 전어는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은 이제 무색해졌다. 봄 전어도, 여름 전어도 대박들이다. 그럼에도 전어 하면 시월, 가을 하면 전어다! 뼈째 먹는 전어회(무침)는 그 식감과 단맛이 단연 최고다. 고소한 맛을 원한다면 구이로 먹어야 한다. 집나간 며느리가 돌아올 때까지, 잘잘 기름이 돌 때까지, 노릇노릇 숯불이나 연탄불에 구워야 제 맛이다. 잔가시는 물론 뼈, 머리, 내장까지도 다 먹어야 고소함의 깊이가 완성된다. 그 맛이 얼마나 고소했으면 가을 전어 대가리엔 참깨가 서 말이라 했을까. 그런데 전어는 왜 이런 ‘錢魚’일까? 옛글에 따르면 가을 전어 한 마리가 비단 한 필 정도였음에도 맛이 좋아 돈 생각하지 않고 사먹었다고 해서 전어라 했다지만, 시인의 말대로 “손바닥만 한 게” “(은)동전이 짤랑이는 것 같기도 하”고. 헛헛한 속을 달래주는 그 기름진 맛이 “빈 호주머니 속을 가득 채워주는 묵직한 동전 같기도 해”서 전어가 되었을 법도 하다. 그러니 나는 이제 전어를 ‘쩐어’라 부르겠다. 어쩐지 돈 생각이 “마른 나뭇잎 한 장 같던 마음속에/ 물고기 뼈처럼 돋아”나는 것 같지 않은지. ‘떼돈’ 생각이 굴뚝같은 이 가을엔 어쨌든 쩐어다! (정끝별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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