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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마당이라는, 개의 이름/박해람

에세이향기 2022. 8. 2. 14:01

마당이라는개의 이름

박해람

 

 

  마당은 녹슨 철조망에 갇혀 있고

  철조망은 냄새도 없이 썩는다

 

  마당은 가장 낮은 곳의 넓이이고

  천적의 식성으로 정원은 아름다웠다

 

  허송세월이라면 마당만 한 곳이 없겠으나 개의 등에는 이제야 꽃이 피었다. 작약 꽃과 엉겅퀴, 개나리는 형량이 정해진 꽃. 개는 여러 명의 주인이 있겠지만 끈, 끈은 봄엔 초록으로 철조망을 넘다가 가을엔 누렇게 마른다

 

  막론하고 개는 줄기식물과에 가깝다

 

  저녁을 먹고 난 개의 배같이 둥그런 마당, 대문 하나가 오래 열리지 않았을 뿐인데 천적들과 훼방들이 무성하다 개가 몸을 털어낼 때마다 개나리와 살구꽃이 떨어졌다

 

  겨울, 누렇게 털이 말라죽은 개를 본 적 있다 밥을 먹지 못한 개는 틈으로 번져나간다 세상의 풀씨들이란 개의 털에서 쏟아졌을 것이다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과 마당은 천적 사이였을까 여럿이 죽고 태어나는 동안 이름들은 제각각 나이가 달랐다 사람의 발자국은 잡초들의 천적, 마당은 사람의 말투를 잊으려 우거졌다 살이 부러진 소나기가 어쩡쩡하게 버려졌으며 투명을 비워낸 술병들은 파랗게 물들었다

 

  오랫동안 짖지 않은 대문은 귀가 퇴화되었다

  왜 마당들은 이름이 없을까

 

  가끔 관리인이 오면 마루 밑 신발 속에선

  열쇠가 생긴다

  그때 마당은 우거진 털로 사람 주위를 반갑게 뛰어오른다

방치되고 억압된 자유

 

                              마경덕(시인)

 

 

  박해람의 시 마당이라는, 개의 이름 은 버려진 마당을 통해 방치된 자유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철조망에 갇힌 억압된 자유는 폭력으로 또는 무력함으로 나타난다. 그 누구도 구속하지 않는 자유는 그 마당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철조망에 갇혀 늙어가는 마당을 들여다보면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끈에 묶인 개는 이 마당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다. 그러나 끈 하나에 묶여 끝내 잡초의 거름이 되어버린다. 개털이 풀풀 날리고 풀씨들이 개털에서 떨어져 나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오랜 시간 사람이 간섭하지 않는 빈집은 서로의 상처를 짓밟고 무성해진다.

  철조망은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고 그 안에 갇힌 것들은 바깥을 넘본다. 한때는 이곳에 많은 것들이 살고 있었다.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던 사람들과 개의 이름을 불러주던 다정한 웃음과 꼬리치며 펄쩍 뛰어오르던 개도 있었다. 사람은 떠났어도 집은 여전히 한자리에 있고 마당도 집을 떠나지 않았다. 여럿의 주인을 섬기며 서서히 등이 휘어갈지라도.

  빈집의 주인은 누구일까. “마당이 차지한 것들, 아니 마당을 차지한 것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허송세월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제멋대로 자란 헝클어진 나무들, 끈질긴 덩굴의 휘감김에 목 졸린 것들, 잡초에 묻혀버린 화초들, 이 음산한 무질서를 제지할 그 무엇도 없음이 곧 허송세월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할 일이 없다는 것,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얼마나 잔인한 형벌인가. 방치된 자유는 방종이 되고 질서가 무질서로 변하는 동안 철조망은 냄새도 없이 썩고 있었다.

  이제 마당은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 하염없는 자유는 지루한 자유이다. “외로움이 부족해 피가 마르는 세상이 있고 중무장된 평화에 천천히 질식되는 너희가 있다는 김소연 시인의 시구처럼 안일과 나태와 무력감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지친 평화에 우리는 얼마나 민감할까.

  홀로 남은 자의 고통에 대해 내가 얼마나 고독했었는가를 쉽게 잊는 것은 학살의 일부이다. 얕은 기분으로 화분에 물 주며 나를 뜯어내듯 죽은 잎을 뜯어내는 것도 학살의 일부이다라고 한 김소연 시인, 남겨진 자의 외로움을 쉽게 잊고, 쉽게 버리는 대부분의 우리들은 모두 학살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마당은 몇 번이나 외로움에 목 졸려 질식했을까. 듬성한 철조망의 구조는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보여준다. 바깥이 지척이지만 완고한 철조망의 고집으로 지척은 너무 먼 곳이다. 호시탐탐 철조망을 넘으려던 개는 줄기식물과에 가깝다. 철조망을 타고 오르는 덩굴들은 휘감는 힘으로 살아간다. 가로막는 철조망도 질긴 끈이다. 그토록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들은 모두 끈에 묶여 있다. 바깥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한 철조망조차 둘러친 끈에 갇혀 있는 것이다.

  마당에 갇힌 것들은 얼마큼 버티다가 떠날 형량이 주어진 것들이다. 인적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집의 복역도 시작되었을 것이다. 복역의 형태는 허송세월로 나타난다. 헛되이 보낸 시간 속에 방치된 개에게 누군가 간간이 저녁을 주고 사라지더니 오랫동안 대문이 열리지 않았다. 개밥을 챙겨주던 누군가의 부재는 이 집의 노화를 더 가속화한다.

  인적이 끊기면 벌어지는 일들이 있다. 제멋대로 씨를 퍼뜨린 우거진 잡초들, 말라 죽어가는 나무들, 굶주린 개의 희미한 숨소리, 마당에 들어찬 어둠과 곳곳의 거미줄, 혼자 다녀가는 계절들, 해마다 쌓여가는 적막의 두께, 그것들을 둘러싼 철조망의 완강함. 등에 떨어진 꽃잎을 털어내던 개는 이제 미동도 없다. 바람에 휘날리는 개털은 개의 몸을 버리고 바람에 업혀 철조망을 넘었을 것이다.

  사람의 온기를 먹고 살아가는 집은 사람이 떠나는 순간 불안해진다. 사람이 사라진 집은 집이 아니다. 빈집이 사람을 들이는 순간, 집이 되는 것이다. 집은 사람과 더불어 한 몸이니 사람이 없는 집은 그저 한 채의 건물일 뿐이다. 사람의 기척을 담은 집은 엄마, ‘처럼 따스하지만 오래 비워둔 집은 왠지 찬바람이 돌고 오싹해진다.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과 마당은 천적 사이였을까 여럿이 죽고 태어나는 동안 이름들은 제각각 나이가   달랐다 사람의 발자국은 잡초들의 천적, 마당은 사람의 말투를 잊으려 우거졌다 살이 부러진 소나기가   어쩡쩡하게 버려졌으며 투명을 비워낸 술병들은 파랗게 물들었다

 

  방치된 마당은 온갖 폭력에 노출되어 삶을 영위하는 가장 본능적인 몸짓만 남았다. 박해람 시인은 인간이 자연과 맺어 온 관계성에 주목한다. 집이라는 영역으로 들어온 자연과 사물은 사람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질긴 잡초들의 천적은 인간이기에 지배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품을 벗어나는 순간 마당은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한다. 버려진 우산, 널브러진 술병들, 방치된 폐가의 모습은 흉물스럽다. 사람의 말투에 길들여진 집은 이제 잡초의 습성에 잠식되고 하릴없이 풍화되어 간다.

 

 

  오랫동안 짖지 않은 대문은 귀가 퇴화되었다

  왜 마당들은 이름이 없을까

 

  가끔 관리인이 오면 마루 밑 신발 속에선

  열쇠가 생긴다

  그때 마당은 우거진 털로 사람 주위를 반갑게 뛰어오른다

 

 

  “대문 지킴이가 사라진 대문은 더는 짖지 않는다. 마당은 늘 마당일 뿐이어서 이름조차 없다. 간간이 관리인이 찾아와 이 집을 둘러보곤 한다. 그때마다 마루밑 신발 속에 숨겨둔 열쇠가 튀어나오고 잡초로 우거진 마당은 사람의 발소리가 그리워 개처럼 반갑게 뛰어오른다.

  조지훈 시인은 글을 잘 쓰기 위해 과학자의 눈을 닮으라고 하였다. 평범한 사물에서도 예리한 관찰을 통해서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기도 한다. 박해람의 시 마당이라는, 개의 이름 은 빈집의 풍경을 통해 집과 인간의 관계”, “억압된 자의 고통과 외로움을 치밀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사라질 때 또 한번 진정한 죽음이 온다고 한다. 빈집을 기억해주는 누군가가 사라질 때 철조망에 갇힌 이 집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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