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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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여름에 대한 시

에세이향기 2022. 8. 4. 16:10


남녁의 여름
 
헤르만 헤세



마로니에 꽃 저녁의 숲
잎 속에는 반달, 숲 속에는 우리 조용한 술꾼들-
밤의 미풍 속에서 우리의 술잔이 울린다
어두운 하늘로 우리의 술이 이글이글 탄다


우리 덧없는 꽃들이 여름 내내 작열한다
나를 마셔라, 사랑아! 아리따운 이여, 그대를 마시게 하라!
우리의 뜨거운 여름 햇불들로 우리는
연인들에게 여름밤의 노래를 부르라 신호한다
오 올빼미 울음, 오 어두운 밤의 심장
환한 협죽도 속 밤나방 너
우리는 작열한다 타들어 간다 형제여 서로의 속으로
신에 바쳐진 축복 받은 제물이다
울려라 삶의 노래여 죽음의 노래여
술잔이 울린다 우리의 시작이 활활 타오른다!




늦여름

 
임동윤



하룻밤, 구두끈 풀고 쉬어가라고
목쉰 대청마루가 흔들한들 붙잡아댔다
등고선마저 지워진 무늬의 바닥
겹겹의 세월을 껴안고 비바람이 들이쳤다
우우 바람이 거친 팔을 뻗어오고
볏짚으로 엮은 흙벽이 가슴뼈를 드러냈다
떠난 사람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들이 퍼 올리던 우물물은 잦아들고
뚫린 지붕 위로 낮달이 머물다 떠난 자리
죽창처럼 빗줄기가 내리 꽂히고 있었다
다시 우지끈 쏟아지는 천둥과 번개
직립의 나무들이 허리를 꺾고 있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빗줄기 속으로 몸을 섞고 있었다
거미줄과 빈 풍경이 간단없이 찢기고
쑥부쟁이도 익모초도 흙탕물에 몸 묻은 마당
그리움은 발치에 묻어두는 법이라고
장지문 꼭꼭 닫아걸어도 바람은 피리가 되어
빗물 잠긴 화덕을 끼고 밤새 돌았다
사방에서 다가드는 풀, 나무, 꽃, 바위...
간당간당 모가지를 빼들고 일제히 울어댔다
빈집이 화들짝 갈비뼈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해 여름

 
허형만

햇살 조금 빗물 조금
작당히 데불고
내 고향 순천을 찾아가던
그해 여름
죽어 시집간 누이의 치맛자락만
섬진강 푸른 물에 저녁놀로 떠서
서럽게 서럽게 흐르고 있었다




비개인 여름 아침

 
김종삼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여름

 
유홍준



노모가 흘린 밥
한덩어리, 노모가 흘린 밥풀데기 한 덩어리

검은 파리떼가 꼬여 있다
이제 더 이상, 아무 할 일도 없는
앉은뱅이 노모가
초록색 파리채를 들고 탁탁
눈알 디룽거리는 파리를 때려잡고 있다
배때기째로 짓뭉개고 있다 여기저기 검버섯이 핀
노모의 얼굴에도 검은 파리뗴가
진뜩, 아랫배가 볼록한
저 사진 속 아프리카 소년도 마찬가지
파리에게 그저 한 덩어리 밥
노모가 흘린 한 덩어리
밥과 같다 눈곱 잔뜩 낀 눈가에
파리 떼가 달라붙어도 쫓을 줄을 모른다
제 뺨을 제가 떄릴 줄조차 모른다
햇살 따가운 슬레이트 지붕이 무너진다
낡고 가벼운 그림자가 마당 가득 무너진다
늦은 오후다 다 늙은 노모가

걸레 한쪽을 까뒤집어
눈가를 닦는다 걸레로 입가를 닦는다





여름밤
 
문인수




저인망의 어둠이 온다

더 많이 군데 군데 별 돋으면서
가뭄 타는 들녘 콩싹 터져오르는 소리 난다


가마솥 가득 푹 삶긴 더위
솥검정 같은 이 더위를 반짝반짝 먹고 있다


보리밥에 짱아찌 씹듯
저 별들이 먹고 있다

 
 
 
장마

강현덕




바람에 누운 풀잎 위로
바쁜 물들이 지나간다



물 속에서 더 짙어진
달개비의 푸른 눈 썹



세상은
화해의 손을
저리 오래 흔들고 있다



장마  
  
목필균






굵은 비가 내린다.
언제 그칠 줄 모르는 장맛비가
지하방(地下房) 창가에 흐른다.

그렇지 않아도 눅눅한 방에
칠순으로 향하는 마른 육신이
고단한 몸을 담고 있는데
비는 칭얼칭얼 치마꼬리를 잡는다.

온종일 고층아파트 계단 쓸어 내리던
무릎관절 오지게 부어오르는 밤을
살만한 자식들 손길 마다하고
홀로 지켜내는 유씨 할머니.

낮에도 어두운 그 곳을
햇볕 속에서도 축축한 그곳을
피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가 내린다.



장마
 
홍수희

  
내리는 저 비
쉽게 그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고통 없이는 당신을 기억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나는 압니다
버틸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가슴에 궂은 비 내리는 날은
함께 그 궂은 비에 젖어주는 일,
내 마음에 흐르는 냇물 하나 두었더니
궂은 비 그리로 흘러 바다로 갑니다



장마의 추억



강정식





어릴 적 장마는 긴 기다림이다
물 새는 지붕과 벽면 곰팡이가
전장의 기념비 같은 커다란 지도를
상처처럼 남겨
고단하게 살아가던 궤적으로 쌓였다

우묵 배미 안마당
정강이 넘게 흙탕물이
문지방에 찰랑거릴 때쯤
붉은 기와 용마루에도 틈이 자라서
하늘이 보이고
천장을 적시며 영토를 넓혀가

물받이 그릇이
방 안 가득하던 시절에도
우리는 강가로 물 구경 갔다


장마철 표정


신석종




늦봄쯤에 책상 위에 놓여졌던
업무용 노트 한 권과 책 두 권이
죽은 사람처럼 그대로 누워 있다
그들 몸엔 곰팡이가 살고 있었고
황사가 다녀간 듯 얼굴이 뿌옇다
구름이 매일마다 태양을 삼킨다
내 몸에, 곰팡이 생겨나지 싶다 


장마


 

유봉희
 
숲은
한 마리 새도 무거워
던져 버린다

새 맞고
눈물 쏟는 하늘

다시 시작하는 창세기.


장마철에

 
유상철

 



빗줄기들을 이어서 옷을 짠다면
부끄러운 이 몸을 가릴 수 있을까요
차라리 바위 치는 폭포수가 된다면
이 깊은 회한을 다 씻어낼 수 있을까요

어머님 가시고 처음 맞는 장맛비,
모여서 황톳물이 되고 흘러서 강물이 된다지만
비 갠 날 물 빠지는 강변처럼
어머니의 빈자리만 넓어가는데

아득히 우렁거리는 물결 소리 있어
그 체취를 더듬으며 다다른 고향 어귀엔
새하얀 달맞이꽃들이
떼를 지어 웁니다.


장마

 
양전형

 



말 안 듣던
지상의 청개구리들
갹갹갹갹
잘못했노라고 일제히 울어대더니

괜찮다, 괜찮다,
와락 품어안으며
하늘에 계신 어머니들 모두 눈물 흘리신다
풀어 놨던
해도 달도 별도 다 거두고

오래 우신다 


장마

 
이지언





검은 먹구름은 떼를 지어
우르르 몰려와 도시를 점령했다.
벌써 며칠 째 밤이고 낮이고
되풀이되는 집중호우.
죄 많은 도시의 죄를 씻기 위해
슬픔 많은 도시의 슬픔을 거두기 위해
한여름의 빗줄기로 세상에 내려와
진흙빛으로 갈아입고                
처참하게 생명을 잃을 줄 알면서
이 땅에 내려와 자신을 내동댕이친다.
슬픔의 잔치는 좀처럼 쉽게 끝나지 않는다.
낮은 음을 자랑하는 첼로의 독주곡처럼
너는 한낮에 한밤의 우울함을 연주하는
불행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기쁨보다 눈물을 사랑하는 음율의 시인이다.


장마

오보영





제아무리
바람
세차게 불어와도

내리는 비
위로
당기지는 못하지요

제아무리
폭우
쏟아져내려도

흐르는 물
뒤로
돌리지는 못하지요

제아무리
힘이
장사라 해도

어제를
오늘로
바꾸지는 못하지요 


장마


박태원





계곡을 휘감아 돌아
바쁘게 길을 재촉하는 너

무엇이 그리도 좋아
덩실덩실 춤을 추며
흔한 눈인사도 나누지 않고 떠나가는가

며칠 전만 해도 너를 기다렸는데
이젠 너를 보내고 싶다

네가 짓궂은 짓 안하고
고이 머물러 주는 것 고마운 일

하지만
구름 속에 해바라기 얼굴을
기다리는 탐스러운 수국은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으니
얘야 미안하구나

몇 날이 지나 다시 내릴 때
거친 방망이질 해대지 말고
수줍은 아가씨처럼 고운 잎새에
사뿐히 내려앉아 꽃잎을 어루만져 주다가

방긋 고운 미소  띄우며 인사해주고
길 떠나면 얼굴마다 환한 웃음꽃이어라.   
 


장마

 
이시하





장마철이면 시골집 뒷간들이 들썩인다
쌓아 놓았던 곰삭은 속들을 퍼내 개울물에 쏟아버린다
하루걸러 똥 퍼 대는 냄새로 마을은 욱, 욱, 욕지기를 하고
아이들은 코를 싸잡은 채 구경삼아 몰려다닌다
더러워, 더러워, 똥지게 뒤를 졸망졸망 따르다보면
하늘은 기어이 어두워지곤 했다

속을 비워낸 뒷간은 휑하니 깊다
어린 녀석들은 얼마간 누이 손을 잡고서야 힘을 쓸 것이다
새로 오린 신문지가 걸리고 뜯는 달력이 걸리면 즐겁다
어디선가 낯익은 냄새가 퍼진다

뉘집서 오늘 똥 푸나보다
부침개를 뒤집으며 어머니, 개울물 많이 불었으니 나가지 말라신다.



장마


김종제





한 사나흘
바람 불고 비만 내려라
꿈결에서도 찾아와
창문 흔들면서
내 안에 물 흘러가는 소리 들려라
햇빛 맑은 날 많았으니
아침부터 흐려지고 비 내린다고
세상이 전부 어두워지겠느냐
저렇게 밖에 나와 서 있는 것들
축축하게 젖는다고
어디 갖다 버리기야 하겠느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구에게 다 젖고 싶은
그 한 사람이 내게는 없구나
문 열고 나가
몸 맡길 용기도 없는 게지
아니 내가 장마였을 게다
나로 인해
아침부터 날 어두워진 것들
적지 않았을 테고
나 때문에 눈물로 젖은 것들
셀 수 없었으리라
깊은 물속을 걸어가려니
발걸음 떼기가 그리 쉽지 않았겠지
바싹 달라붙은 마음으로
천근만근 몸이 무거워졌을 거고
그러하니 평생 줄 사랑을
한 사나흘
장마처럼 그대에게 내릴 테니
속까지 다 젖어 보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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