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피랑, 나비 마을
심강우
동쪽 벼랑에 나비가 사는 마을이 있다
물감이 떨어질 날 없는 화가가 채집한
단색의 애환만 있어도 좋을 한갓진 풍경
방방곡곡 나비가 참 많기도 하지만
뱃고동으로 첫 페이지 넘기는 강구안
색색의 날개가 장식한 화보집이다
나비들의 문패는 한 해 걸러 바뀐다
드난살이 골목이래도 하늘은 자란다
은륜이 달리고 피아노건반이 춤추고
구름을 예약한 고래가 휘파람을 부는
그곳은 날마다 꽃술의 축제 기간이다
나비의 더듬이에 들킨 울음기
한산도 수루에서 물어 온 언약을
해거름녘 다도해에 묻어 두었다
바늘만 한 설움도 벼랑 꼭대기에 서면
붉게 번져오는 눈먼 사랑이 거기 있다
출항하는 소리에 맞춰 비행을 시작하는 나비
어쩌면 황홀한 저 빛깔은 나비의 해묵은 구애
꽃떨기처럼 섬에서 섬으로 호를 긋는 배들
그때 어부들은 흔연히 나비로 돌아가는 시간
동쪽 벼랑에 백화만발한 마을이 있다
매혹적인 나비의 필체로 방명록을 준비한
사계절 물감이 마르지 않는 나비 공연이 있다
<시작 노트>
통영엔 동피랑이 있습니다. 정중동(靜中動)의 마을 아니, 동중정(動中靜)의 마을. 그곳 골목길에선 수다를 떨며 걸어선 안 됩니다. 시침을 떼고 걷다가 문득 생각난 듯 돌아봐야 합니다. 순하게 길들여진 망아지처럼 강구안은 그렇게 투레질 한 번 없이 엎드려 있습니다. 그 너머 야생의 바다 또한 주변의 섬들에 홀쳐맨 이불홑청인 듯 안온합니다.
마음에 매지구름이 뜰 때면 통영 동피랑을 찾곤 했습니다. 골목길 아무데나 서서 돌아보면 시나브로 파랑이 잦아들었습니다. 나비의 날갯짓 같은 평온이 깃든 곳. 아닌 게 아니라 찬찬히 톺아보면 그곳은 수많은 나비무늬로 직조한 말 그대로 한갓진 나비 마을입니다.
동피랑이 좋아서 동피랑과 관련한 공모전에 선뜻 시 한 편을 보냈습니다. 이 상은 그러므로 동피랑에 서식하고 있는 나비들이 보낸 화답입니다. 바다가 보이는 나비 마을을 잊지 말라는, 혹은 사는 일에 그만 투정을 부리고 가벼운 날갯짓의 행보를 배워 보라는.
[출처] 제1회 동피랑 문학상 작품상 / 동피랑, 나비 마을 / 심강우|작성자 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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