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지붕문서 / 성영희

지붕문서 / 성영희 한겨울에만 자라는 뿌리가 있다 물결무늬 고랑 끝에서 자라나는 투명한 뿌리들 뚝 떼어서 와작 씹으면 이만 시리던, 뿌리가 부실한 사내애들은 곧잘 겨루기를 했다 손 한 번 베지 못한 그 맑은 칼싸움으로부터 쨍그랑 잘려나가기도 하던 긴 겨울 처마 끝에서 자라는 고드름은 뿌리열매다 씨앗 하나 심을 땅 없는 가난한 양철지붕의 겨울 수확 잠깐의 햇살에도 툭 끊어지고 마는 가늘디가는 한철 농사다 고드름도 잘 자라지 못하는 북향집 실로폰 같은 뿌리들이 똑똑 물방울을 떨군다 꽃 밑으로 뻗어나가는 뿌리 대신 처마 끝에서 고작, 도돌이표로 돌아가는 가난한 음계들 겨울이 흘러내리고 있다 한여름 땅속 열기들이 뿌리 끝으로 빠져나간 흔적처럼 처마 아래 봄을 파종하고 있다 이 뿌리로 겨울을 났다는 소리는 듣지 ..

좋은 시 2023.01.03

중심/심수향

중심 - 심수향 11월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듯이 배추가 제 삶의 한창때를 건너고 있다 꽃을 피우고 싶어하는 푸른 이마에 금줄같은 머리띠 하나 묶어주려고 이참 저참 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추는 중심이 설 무렵 묶어주어야 한다고 귀뜸을 한다 배추도 중심이 서야 배추가 되나보다 속잎이 노랗게 안으로 모이고 햇살 넓은 잎들도 중심을 향해 서기 시작한다 바람이 짙어지는 강물보다 더 서늘해졌다 띠를 묶어주기에는 적기인 것 같아 결 재운 볏짚을 들고 밭에 올랐더니 힘 넘치는 이파리가 툭 툭 내 종아리를 친다 널따란 잎을 그러모아 지그시 안고 배추의 이마에 짚 띠를 조심스레 둘렀더니 종 모양 부도처럼 금새 단아해졌다 부드러운 짚 몇 가닥의 힘이 참 놀랍다 이제 배추는 노란 제 속을 꽉꽉 채우며 꽃과 또 다른 길..

좋은 시 2022.12.27

갖바치 김씨/김경

갖바치 김씨 읍내 사거리 광주은행 귀퉁이 한 평도 안 되는 구두수선소 안에 늙은 주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다 주름진 얼굴이 운주사 돌부처 같다 손님 뜸한 한낮 때 지난 신문 펼쳐놓고 경(經)을 읽듯 골똘히 행간을 짚어 가는 노인의 검은 손가락이 묵주알 같다 한평생 신발의 암자에서 상한 신들을 감치고 공글리고 박음질하며 살아온 노인의 손바닥이 구둣주걱을 닮았다 덕지덕지 역한 냄새를 뱉어내는 길들이 노인의 무릎 위에 검은 혓바닥처럼 누워 있다 코가 터지고 굽이 닳은 신발의 내력을 들춰내 상처를 꿰매고 아픔을 찬찬히 달래주는 약사보살 같은 손, 한때는 근동에서 이름을 떨쳤던 금강제화점 갖바치 김씨 광약을 바른 구두코처럼 반들거리던 시절도 있었다 삶이란 굽만 갈아 신는 신발* 같아서 횡단보도 건너편 나이키 불빛에..

좋은 시 2022.12.20

원고지의 힘/고영

원고지를 놓고 막상 책상에 앉고 보니 무엇을 쓸 것인가 그대에게 못다 한 진정의 편지를 쓸까 하늘에게 사죄의 말씀을 쓸까 달리의 늘어진 시간에게 안부나 물을까 막상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 지난여름 내게만 사납게 들이치던 장대비가 원고지 칸과 칸 사이를 적시고 목적지도 없는 폭풍의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가 끌고 가는 기—인 강물 위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깊고 푸른 달이 반짝 말라비틀어져 비로소 더욱 눈부신 은사시나무 잎이 떨어진다 지난 과오가 떠오르지 않아 얼굴 붉히는 밤 수천 마리 피라미 떼가 송곳처럼 머릿속을 쑤신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 그리운 것들 원고지를 앞에 놓고 보면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전부가 그립다 ​ ― 「원고지의 힘」 전문 날개가 불이라서 뜨겁니? 아님 네 한 몸 ..

좋은 시 2022.12.10

비, 평 /심승혁

비, 평 /심승혁 ​ ​ 수평을 잃은 구름의 노래를 듣는다 기울어진 한쪽 귀가 열리고 반대쪽 귀가 닫히는 순간이 생긴다 때때로 빠져나가지 못한 아픈 노래가 가슴 안을 잠잠히 맴돌아 울기도 한다 ​ 우산을 든 어깨가 조금씩 처지고 가벼워진 반대편으로 비가 떨어진다 따가운 비의 말들이 움푹 웅덩이를 만들고 고인 무게만큼 다시 수평이 찰랑댄다 ​ 가끔 기울어지는 일이 생기고 수평을 잃은 중심으로 살 때가 있다 사람의 말이 이프게 할퀴고 지나간 후 새 살이 돋아나는 시간을 살 때가 있다 딱지가 생기는 동안의 가려움을 긁으러 비가 오면 시소를 타야 할 때가 있다 수평은 한쪽을 긁거나 채워 중심을 세우는 것 ​ 우산 밑을 뒹구는 아픈 말들이 오르락내리락 구름의 노래를 부른다 다가왔다가 저만치 멀어지는 수평을 찾느라..

좋은 시 2022.12.10

눈물의 배후 / 최광임

눈물의 배후 / 최광임 한 계절에 닿고자 하는 새는 몸피를 줄인다 허공의 심장을 관통하여 가기 위함이다 그때 베란다의 늦은 칸나 꽃송이 쇠북처럼 매달려 있기도 하는데 그대여 울음의 눈동자를 토끼눈으로 여기지는 마시라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는 고목일수록 어린잎들 틔워내는 혼신의 힘은 매운 것이니 지루한 가뭄 끝 입술의 심혈관이 터진 꽃무릇 같은 것이니 턱을 치켜세운 식욕 왕성한 새끼들에게 공갈빵이나 뜯어 먹게 하는 무색한 시절을 두고 부엌으로 달려가 양푼에 밥을 비빈다 어떻게든 허방으로 떠밀리지 않기 위하여 뙤약볕 같은 고추장 비빔밥을 쑤셔 넣어 보신 적 있는가 막무가내로 뒤집어지는 매운 밥의 본능이 한 세월로 건너가는 새가 되는 것일 뿐, 천둥벌거숭이 나는 이 새벽 가슴 골짜기에서 솟구치는 눈물의..

좋은 시 2022.12.06

나무 도마 / 신기섭

나무 도마 / 신기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좋은 시 2022.12.06

골목세탁소/송향란

골목세탁소 ​송향란 ​ 그 작은 간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서동에서 범내골 넘어가는 골목어귀 오랜 세월 멈춰 선 시곗바늘처럼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한낮에도 반쯤 꺾인 햇살 고여 있는 창 너머 때 절은 시간이 거미줄처럼 걸려 있다 낮은 담벼락 둘러친 찢겨져 나간 벽보 덧난 상처처럼 번져 간다 나뭇잎 배처럼 떠돌던 사람들 휘어진 골목 안으로 흘러든다 끝없는 폐허의 숲을 지나온, 살아가면서 구겨지고 뭉개진 것들 날마다 찾아들어 끈질기게 붙어있는 먼지 떨쳐내기 위해 몸살 앓는다 통증 털어낸 솔기마다 달아오른 다리미 뜨거운 입김을 뿜어낸다 반듯하게 다려진 옷들 서둘러 길 떠날 때까지 순한 양처럼 길가에 내걸려 허공을 끌어당긴다 페인트칠 떨어져 나간 간판 아래 무언가 말하려다 입 다문 유리창 붉은 글씨들 쓸쓸한..

좋은 시 2022.12.06

도시의 옥상 / 신미애

도시의 옥상 / 신미애 과묵한 나는 상처들을 사랑하지요 조용히 불러내어 내성적인 상처에게는 커피 한 잔을 내밀고 다혈질인 상처에겐 담배를 한 대 권하지요 애꿎은 울분을 공중에 줄줄 뱉어내는 단호한 표정에게 빼곡한 건물을 둘러보라고 허공의 품을 한번 보여주지요 섣부른 생각을 하나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만 심호흡 한 번에 단단히 마음을 추스르라고 아찔한 높이를 보여주지요 며칠 전 녹음기가 되어버린 엄마의 목소리를 이곳까지 끌고 온 학생이 맨발로 날았어요 굳게 다문 입과 분노에 찬 눈빛을 미처 읽기도 전 손이 닿지 않는 허공을 머리로 달려갔어요 거꾸로 뒤집힌 아이에게 그곳이 유일한 비상구였기에 나는 묵묵히 입을 다물었어요 하루가 돌아간 자리 종이컵과 담배꽁초 어지럽게 널린 이곳에서 나는 도시가 놓고 간 통..

좋은 시 2022.12.06

BOOK아현/전장석

BOOK아현/전장석 숨이 찰수록 뜻이 달아오르는 문장 동네 어르신들에겐 난독의 보릿고개다 앞뒤 표지가 뜯겨져나간 동네 근라그날 표지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록 몇 장 부욱 찢겨져도 눈치채지 못한다 숙박계 대신 쓴 무명씨 저자의 방명록은 얼음의 구근이 녹아 흘림체 일색이다 아직 지구상에 남아 있는 몇 개의 구절은 이 동네의 밤하늘을 뒤적거리다가 마지막 페이지쯤에서 그냥 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덮어도 조여 오는 어두운 골목길 스스로 문장 속으로 들어간 책은 어느 중고서점에서 절판인 줄 모르고 꽂혀 있고 갈라진 벽 속의 풀꽃들은 목차를 버린 지 오래 두 손으로 이마를 짚던 날이 잠시 난독의 계단에 앉아 있는 동안 낡은 진열장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동네 쥐들이 갉아먹은 침묵 속엔 수백 권의 장서가 우글거..

좋은 시 2022.11.30

바구미를 죽이는 밤/문성해

바구미를 죽이는 밤 문성해 처음엔 작은 활자들이 기어 나오는 줄 알았다 신문지에 검은 쌀을 붓고 바구미를 눌러 죽이는 밤 턱이 갈라진 바구미들을 처음엔 서캐를 눌러 죽이듯 손톱으로 눌러 죽이다가 휴지로 감아 죽이다가 마침내 럭셔리하게 자루 달린 국자로 때려 죽인다 죽음의 방식을 바꾸자 기세 좋던 놈들이 주춤주춤, 죽은 척 나자빠져 있다가 잽싸게 도망치는 놈도 있다 놈들에게도 뇌가 있다는 것이 도무지 우습다 혐오도 죄책감도 없이 눌러 죽이고 찍어 죽이고 비벼 죽이는 밤 그나저나 살해가 이리 지겨워도 되나 고만 죽이고 싶다 해도 기를 쓰고 나온다 이깟 것들이 먹으면 대체 얼마나 먹는다고 쌀 한 톨을 두고 대치하는 나의 전선이여 아침에는 학습지를 파는 전화와 싸우고 오후에는 종이박스를 두고 경비와 실랑이하고 ..

좋은 시 2022.11.27

쉬/문인수

쉬/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 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비끄러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쉿!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노동의 새벽 박노해 전쟁 같..

좋은 시 2022.11.26

비늘 / 이서진

비늘 / 이서진 ​ 햇빛이 가장 깊은 시간 반짝이는 모든 것들은 비늘이다 골목 구석에서 웅크린 것들조차 파르르 몸을 떨며 떠오르고 깨진 병조각과 찌그러진 캔, 버려진 채 비린 시간을 견뎌온 것들 출렁이는 각자의 길을 따라 헤엄친다 후포 어시장 한 가운데 비린내 가득한 천막 안에서 생선을 파는 여자 도마를 내리치는 예리한 칼 위로 비늘이 날아든다 그녀는 온몸에 반짝이는 비늘을 붙이고 얼음 위에 몸을 내민 생선들의 숫자를 센다 고무장갑을 벗은 여자의 손바닥 위 지워진 지문의 흔적을 바라본다 수많은 세월을 흘러온 그녀의 지문은 비늘처럼 떨어져 어느 골목을 헤매고 있을까 햇살이 굴곡 없는 여자의 손끝을 더듬고 있다 오랫동안 수많은 생물을 골라낸 여자의 손끝 어두운 뒤편에 버려진 것들은 문신처럼 박힌 지문을 끌어..

좋은 시 2022.11.26

모래톱 탁본 / 김겨리

모래톱 탁본 / 김겨리 명사십리에 새발자국 수두룩하다 썰물에 쓰고 밀물에 퇴고하는 바다의 서사, 밀물이 화선지처럼 모래사장의 요와 철에 골고루 펼쳐지면 먹방망이에 해풍을 듬뿍 묻혀 바다를 본 뜨는 어머니, 씨감자 캐듯 아버지 배를 부리고 먼바다로 떠나시면 언젠가부터 어머니의 종교는 바다, 사하의 바다는 탁본체로 편찬된 어머니의 서재였다 해풍에 깎여 심하게 문드러진 아버지의 지문은 먼바다 일렁이는 격랑을 닮았다고 횟배 앓는 내 배를 쓸어내리며 혼잣말처럼 들려 주시던 얘기로 파도를 볼 때마다 아버지의 지문이 저랬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내 지문을 바라보면 물결체의 행간들이 출렁이곤 했다 바다를 수소문해 아버지의 기별을 듣는 밤이면 창가 정화수에 푹 잠긴 보름달을 보고 손이 닳도록 어머니가 밤새 빌고 빌었던 치성..

좋은 시 2022.11.26

파밭 경전 / 권용례

파밭 경전 / 권용례 ​ ​ 파밭에 호미 날로 쓴 노모의 경전을 읽는다 흙 속에 스며든 문장들이 뿌리를 박았다. 빗물을 받아먹고 지각의 영양분으로 살아가는 글들은 파릇파릇 파잎처럼 반듯하고 꼿꼿하다 바람에 펼쳐지는 책의 귀퉁이부터 순식간에 점령하는 잡풀들을 뽑아내는 호미 무엇을 증언하고 싶은 걸까 실뿌리에서 뽑아 올린 한 구절을 닳고 닳은 몽당 쇠판에 또박또박 새긴다 행간 사이에 한숨을 장단으로 넣으며 호미질에 불꽃이 튀는 경전 쉼 없다 정직한 마음을 가르치는 말씀보다 이윤이 왕이 된 세상에서 내내 괴로웠으리라 노모는 가끔 발등이 찍혔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멈출 수가 없는 일필서 이 일은 몸도 마음도 생각도 건강해지는 일이었다 태풍이 몰아쳐도 어깨동무하는 가족들을 살려야 했기에 파밭에 빼곡히 적는 한 ..

좋은 시 2022.11.25

머리맡 / 이정희

머리맡 / 이정희 더듬거리는 곳에 물 한 그릇 놓아두면 그곳이 머리맡이다 물그릇엔 물이 말라간 흔적이 천천히 각인되어 있었다 아래로만 트인 물의 의중에 따라 꽃피고 마르고 다시 잦아든 지층처럼 고요와 냄새가 내려앉은 흔적 더 이상 민망이 없는 몸에 여름옷 한 벌이 입혀져 있다 머리맡은 산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예의 같은 곳이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검은 그림자, 갑작스레 당한 일들처럼 민낯을 접지 못하고 징검돌처럼 이어붙인 시간들의 배웅과 켜켜이 앉은 물그릇의 날짜를 아무도 세지 않고 어림짐작으로 한 죽음을 정리했다 마른침을 삼키듯 남은 숨을 들이킨 주저흔 물그릇은 자신의 목마름을 천천히 지층으로 쌓았을 것이다 죽은 사람도 갈증의 속도가 있었을까 살아서 마셨던 벌컥, 그 갈증을 지우는 속도 조금..

좋은 시 2022.11.20

편백나무의 영토 / 최류빈

편백나무의 영토 / 최류빈 면면이 창백한 사람들 어깨 접고 섰다 여기부턴 백의종군의 성토라는 듯 흰 돌 줄 지어 방어진을 펴듯 빙벽 너머에선 얼음 부서지는 소리 풋내 가시지 않은 고사리들이 손을 엮더라 물의 결정들이 고공침투하는 이 계절 예측된 왜란은 없다 나를 밀어낸 이 땅의 생채기다 아니 내가 속한 영토의 설움이다 나 밀어낸 저 이기의 숙명이다 아아, 너를 뒤덮는 물이- 함초롬히 오른다 그 속에서 고고한 죽문(竹文) 청화백자 하나 전운을 감지한 듯 바닥부터 미묘히 진동하고 있다 그저 대나무 줄기 죽비처럼 뻗어 저 장롱 속에 웅크리면 약탈될 뿐 절대 깨어질 일 없는 백자의 관상 왜놈들의 신줏단지라도 모시며 반짝거릴 수도 어디 가 빌붙어 치욕스레 요강이나마 살 수 있었다 바람 앞 불길이 거세, 고왔던 유..

좋은 시 2022.11.20

동호 댁 할머니 손가락엔 구구단이 산다 / 오서윤

동호 댁 할머니 손가락엔 구구단이 산다 / 오서윤 ​ ​ 동호 댁 할머니 손가락엔 수상한 장부가 산다 계산법을 알 수 없는 덧셈과 뺄셈이 숨어 있다 수리에는 없지만 가끔 세상에서 발견되는 셈법 옆집 상처와 몹쓸 사람에겐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숫자를 솎아내는 속 깊은 구구단이다 ​ 할머니의 손가락엔 천기를 읽는 두꺼운 달력이 산다 팥꽃이 피는 시기와 산을 넘어오는 장마 콩이 여물어 갈 때마다 할머니는 더 바쁘다 복잡한 족보와 길흉의 절기와 식구들의 생일과 오래전에 죽은 나이도 다 기억한다 ​ 갑골문자처럼 단단한 할머니의 손등 주판알 튕기듯 못생긴 손가락 하나하나 세어 왕복할수록 할머니의 곳간이 풍성하다 이른 봄 멀리서 오는 소식을 감지하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릴 때도 있지만 어느새 넓적한 손등이 어지러운 마..

좋은 시 2022.11.20

숲의 책을 읽다 / 이문정

숲의 책을 읽다 / 이문정 - 계림(鷄林)에서 ​ ​ 천년을 지나온 길은 이곳에서 처음 열렸으리 ​ 나무의 몸 빌려 빛을 세운 숲 한걸음 내 딛자 침묵하던 나무들이 책장을 넘긴다 빛은 나무와 호흡하며 숲을 지켜왔으리 나무들은 힘찬 맥박 뻗어 하늘로 넓혀갔고 뿌리는 몸 낮추어 사방으로 길을 만들어 갔으리 ​ 어둠 걷어내며 하늘 열리던 날 나무와 바람은 광명을 천지에 퍼다 날랐고 그리하여 새들 날아들고 노랫소리 끊이지 않는 숲은 날로 번성해 갔으리라 ​ 입술에 닿는 책의 숨결이 깊어진다 ​ 발이 움직일 때마다 천년도 더 된 노래들이 일어선다 빛의 소용돌이를 잠재우며 그 자리에 서 있는 숲 집중할수록 또렷해지는 페이지를 넘기면 까마득한 날과 소통되는 언어들의 포옹 계절을 잉태한 태실에서 날갯짓 하고 있다 ​ ..

좋은 시 2022.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