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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 댁 할머니 손가락엔 구구단이 산다 / 오서윤

에세이향기 2022. 11. 20. 14:33

동호 댁 할머니 손가락엔 구구단이 산다 / 오서윤

동호 댁 할머니 손가락엔 수상한 장부가 산다

계산법을 알 수 없는 덧셈과 뺄셈이 숨어 있다

수리에는 없지만 가끔 세상에서 발견되는 셈법

옆집 상처와 몹쓸 사람에겐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숫자를 솎아내는 속 깊은 구구단이다

할머니의 손가락엔 천기를 읽는 두꺼운 달력이 산다

팥꽃이 피는 시기와 산을 넘어오는 장마

콩이 여물어 갈 때마다 할머니는 더 바쁘다

복잡한 족보와 길흉의 절기와

식구들의 생일과 오래전에 죽은 나이도 다 기억한다

갑골문자처럼 단단한 할머니의 손등

주판알 튕기듯 못생긴 손가락 하나하나 세어 왕복할수록

할머니의 곳간이 풍성하다

이른 봄 멀리서 오는 소식을 감지하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릴 때도 있지만

어느새 넓적한 손등이 어지러운 마음을 덮어버린다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본 주먹구구식이지만

할머니의 몸엔 여러 곳의 교문이 있다

차곡차곡 쌓여있는 이름 없는 할머니의 졸업장

동호 댁 할머니 돌아가시고

그 집 식구들 모두 가막눈이 되었다

보리굴비 / 박찬희

깊은 곳, 동안거에 들 날이 가까워지면 옆구리가 가려웠다

수년을 가로거침 없던 길 없는 길이 아른거리기만 하고

바싹 말라버린 감정이 압착된 채 눌어붙어 겉보리 색깔이다

꼬아 내린 새끼줄이 미명을 건져 올리는 때마다

조금씩 빠져나가는 기억, 잊은 물질의 기법을 유추해

켜켜이 돋워 꿰면 아가미에서 배어 나오는 소금기

바람이 낙관을 찍고 갈 때마다 입술이 들썩거리고

항아리 깊은 속에서 오장육부를 비워내면

아가미를 통해 내통하는 바다와 육지

숨이 찬 시절이 건조되는 동안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흘러 빠져나가는 너울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음께를 바람이 변주하면

뭉툭하던 허리를 조여 맨 상처가 껍데기에서 바삭거린다

잠이 깰 때 아무 느낌이 없게 될지도 모르는 귓속말을

차곡차곡 채우면

봄 건너 가을에 이른 연록의 찻잎이 움 트는 게 보이고

긴 호흡으로 너른 바다를 마시고 뱉던 간절기의 촉감이

비워낸 속에 사분사분 채워진다

무뚝뚝한 등대의 시선이 흘리고 간 은빛 주단 위를

미끈하게 흐르다 누워 동경했던 뭍을

응달을 비집고 든 볕에 기대어 다시 찍어내는

데칼코마니

오랜 기억이 바람에 말라가면

허공에 박제되는 바다의 냄새

동안거를 마친 날엔 점점이 찢겨도 좋다며

그만큼 찢긴 바다가 청보리밭을 덮는

그 하나로 가뿐해지는 몸이

시간의 변곡점 속으로 너끈히 헤엄쳐 간다

 

나비정첩 / 안광숙(안이숲)

 

 

문틈에 나비 한마리가 다소곳이 날개를 접고 있어요

놋쇠 장식으로 된 고운 나비로 태어나 제대로 한번 날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봄이

여름을 건너뛰려 하고 있네요

 

종손이라는 이름에 걸린 가문 한 채 간수하느라 공중을 떠돌아 잔잔한 이곳에 뿌리를 내린 당신

방문이 열릴 때마다 낮은 발자국 소리에 묻은 녹슨 고백 소리 사뿐히 들려옵니다

 

솜털이 시작되는 고향에서 나비무늬 박힌 치마저고리 입고 의령장에 구경 가던, 팔랑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가볍게 날아오르던

어머니의 원행엔 연지곤지 찍은 꽃들마저 고개를 숙였던가요

 

얘야! 시집와서 빗장을 지키는 게 평생의 일이었단다, 느리게 접힌 쪽으로 아픈 고백을 쟁여둔 어머니

다음 생에는 날개를 달고 태어나지 마세요

몇 겹으로 박제된 풍장의 어머니 쇳가루 떨어지는 서러운 날갯짓 소리 수없이 들었어요

 

빗장에 방청 윤활제를 솔솔 뿌리면 마당 귀퉁이의 세월에 퍼렇게 멍든 잡초가 피어오르고

당신은 눈코입이 삭아 자구만 떨어져 내립니다

붉은 눈물이 소리가 되어 공중을 묶어 놓고, 납작하게 접힌 마음을 일으켜 이제 편안하게 쉬셔요

여닫이에 꼿꼿한 등을 붙들린 지 수십 년, 뒷목부터 낡아가는 수의는 그만 벗으셔도 되요

 

염습을 마친 8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겹겹이 에운 문틈 사이로 녹슨 쇠 울음소리 선명하게 들려오는 밤

당신의 평생 그 어디쯤에서 터지는 발성법을 익혀 이리도 가늘고 긴 곡비를 준비했을까

 

우리 한번은 서로를 열어야 하는데

어머니, 어느 쪽이 제가 돌아갈 입구일까요

 

 

황금송아지 / 배두순

 

 

코두레도 모르고

입가에 젖도 마르지 않은 새끼가 죽었다

송아지가 태어나면 온 동네의 경사였던 시절

그 금쪽같던 송아지가 죽었다

 

두런두런하던 어른들은 가마솥에 불을 지폈다

장작불이 달아오르는 담장을 넘어오는 젖내를

감나무에 묶인 어미가 모를 리 없었다

나무를 들이받으며 토해내는 거대한 울음에

하늘이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어른들은 부적의 붉은 댕기를 두 뿔에 걸어주고

막걸리 통을 대령하며 비손을 했다

그러한 사이,

새끼의 뱃속에서 나왔는지

뽀얀 젖 같은 국물이 가마솥에 가득했다

어른들은 국자를 집어넣어 국물을 퍼내고 도마를 눕혔다

그들이 차려주던 국물과 고기를 맛나게 멋으며

배부른 저녁식사를 하던 그날

붉은 도마 하나가 서쪽하는 긑까지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길고 긴 핏빛도마였다

커다란 짐승의 누망울에 그렁그렁 넘쳐나느느

피눈물을 본 것도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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