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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백나무의 영토 / 최류빈

에세이향기 2022. 11. 20. 16:31

편백나무의 영토 / 최류빈

 

 

면면이 창백한 사람들 어깨 접고 섰다

여기부턴 백의종군의 성토라는 듯 흰 돌 줄 지어 방어진을 펴듯

빙벽 너머에선 얼음 부서지는 소리 풋내 가시지 않은 고사리들이 손을 엮더라

물의 결정들이 고공침투하는 이 계절 예측된 왜란은 없다

 

나를 밀어낸 이 땅의 생채기다 아니 내가 속한 영토의 설움이다

나 밀어낸 저 이기의 숙명이다 아아, 너를 뒤덮는 물이-

함초롬히 오른다

 

그 속에서 고고한 죽문(竹文) 청화백자 하나

전운을 감지한 듯 바닥부터 미묘히 진동하고 있다

그저 대나무 줄기 죽비처럼 뻗어 저 장롱 속에 웅크리면

약탈될 뿐 절대 깨어질 일 없는 백자의 관상

왜놈들의 신줏단지라도 모시며 반짝거릴 수도

어디 가 빌붙어 치욕스레 요강이나마 살 수 있었다

바람 앞 불길이 거세, 고왔던 유약 다 녹아나는 시간

백자는 이토록 찬란한 사금파리가 되는 방식, 스스로 택한 거다

먼저 청학 날아가던 날개 깨 집어 아무렇게나 겨누고

부리가 그려졌던 조각 집어 칼처럼 끝을 맞드는 거다

고고한 외다리 학은 집어 치우고 털 뽑힌 민둥 두루미처럼

두 다리 벼락처럼 지상에 꽂는 비수

그 다음은 구름이 살았던 길을 어루만져보는 거다

깨진 구름이야말로 심장에 낮게 걸려 두려움 가려주는 방패를 살아

저기 굴러다니는 대나무 뼈와 깨지지 않는 학의 눈동자

구름에 가린 달처럼 푸르게, 붉게 점염하는 것이다

날카로운 끝 마다 이 생의 지문 다 묻히고

불꽃 속부터 다시 구워지는 탄신이 저 편에서 오는데

백의 벗고 푸른 눈동자 켜는 조각들 쩍쩍 대륙처럼 갈라지다가

눈동자 속 스테인드글라스로 딱, 휘영청 야밤의 빛 머금다가

 

숲의 육신에 가로줄을 긋고선 점멸하는 눈

초록에 새하얀 눈 침범해도 이 곳은 아무래도 편백나무의 땅

북유럽 어느 비밀의 숲처럼 아무리 밀어도

길쭉한 장대, 장승처럼 서서 하는 무언의 포효

표정을 지우고 곁을 내주면 장성을 쌓아

머리를 털고 탈고하는 계절,

 

눈 내린 편백나무 설경, 하얀 숲에서

깨어진 죽비 틈으로

붉은 상처 밀려 오르더라

 

 빈 목간을 읽다 / 최분임

 

 

도토리 몇 알이 칭얼대는 허기를

달래기도 전 보름달이 도착했네요

채집의 종족에게 식욕은

말린 생선 비린내에도 체면을 차리지 않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끼니를 기다려며

생선뼈로 저녁을 불다 지친 아이들

여러 차례 달이 흘리는 육즙을 기웃거릴 때

당신을 마중 나간 길은 금새 어두워지죠

그림자로 일렁이던 당신이 영원이 되기까지

따로 내 영혼은 사라지지 않았죠

주인 잃은 돌베개가 웅크린 짐승을 닮아가는 밤

당신의 팔베개에서 식은 잠이 갈비뼈 한 귀퉁이를 뒤적여

사그라진 불씨, 당신을 이룩하네요

식은 것은 뜨거웠던 것의 표정이라고 말한 게

둥근 당신이었나요, 날카로운 나였나요

토기를 빚던 손을 빌린 나무둥치가

수신인 당신의 눈 코 입을 묻네요

빗살무늬 캐던 동물 뼈는 잠의 미간처럼 생각이 많아

기다림을 새기기 적당하죠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보름달이

당신에게 대신 전할 목간木簡을 읽기 위해

더 밝은 높이에 눈동자를 띄우네요

산길을 향해 구부정하게 걷는 달빛

반짝, 허리가 펴지네요

거미줄처럼 널린 감정들이 강물의 명경明鏡 속

뾰족한 빗살무늬로 비칠까 옹이는 지우고

새순처럼 돋아날 나를 고르고 고르죠

달빛이 나를 다 읽었다는 듯이

끊기고 번진 그림문자들

새벽빛으로 고쳐 멀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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