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밭 경전 / 권용례
파밭에 호미 날로 쓴 노모의 경전을 읽는다
흙 속에 스며든 문장들이 뿌리를 박았다.
빗물을 받아먹고
지각의 영양분으로 살아가는 글들은
파릇파릇 파잎처럼 반듯하고 꼿꼿하다
바람에 펼쳐지는 책의 귀퉁이부터
순식간에 점령하는 잡풀들을 뽑아내는 호미
무엇을 증언하고 싶은 걸까
실뿌리에서 뽑아 올린 한 구절을
닳고 닳은 몽당 쇠판에 또박또박 새긴다
행간 사이에 한숨을 장단으로 넣으며
호미질에 불꽃이 튀는 경전 쉼 없다
정직한 마음을 가르치는 말씀보다
이윤이 왕이 된 세상에서 내내 괴로웠으리라
노모는 가끔 발등이 찍혔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멈출 수가 없는 일필서
이 일은
몸도 마음도 생각도 건강해지는 일이었다
태풍이 몰아쳐도
어깨동무하는 가족들을 살려야 했기에
파밭에 빼곡히 적는 한 마디 한 마디는
골수에 사무쳤다.
희망이 나부끼는 파밭에서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고, 무릎 꿇는 밭고랑
햇볕이 폭설처럼 쏟아지는 이 밭고랑이
노모가 살아가는 길이었던 것
땅을 파헤치는 호미 날에 글자들이 운다
어머니 / 송금례
저 서책을 오래 읽고 싶어서
난 난독증을 앓았습니다
구름이 흘리고 간 얼룩과 파도가 섞여
겉과 속이 한통속이 된 페이지에는
어둠 속에서 흘린 한숨도 음각되어 있었지요
불안전한 삶을 조율하면서 새겨진
단단한 문장을 오독 할 때가 많았고요
소나기에 우산 꽃들이 처마 밑에서 피어나고
습기에 입술이 퉁퉁 붓는 저녁이면
그 눅눅함을 외면하기도 했었지요
세상의 허기와 내 공복으로 쓸쓸한 날은
저 서책이 닳고 닳을 때까지
꼭 끌어안고 울고 싶었는데
이제는 당신이 꽂혀있던 자리로
내 몸이 기울고 있어요
페이지마다 금강경처럼 박힌 글자들
나에게 그 유전자가 옮겨붙어 나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고 있으니까요
사는 날들이 칠흑보다 무겁고
누구도 탁본할 수 없는 남루였어도
저 서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 이유는
물불에도 구겨지지 않는 글자들 때문이지요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 설화
바람불면 훅 덮일 것 같은 마지막 페이지
늦은 밤까지 읽는 내 눈이 짓무르고 있습니다
지하도 암자 / 이생문
햇볕도 추위를 피해 걸어 내려오는 지하도 계단
한줌 한 줌 쌓아올린 탑 가뭇없이 사라진 자리
벽도 기둥도 없이
쓰러질 듯 폐박스 구들에 웅크린 암자 한 채
깨달음 얻기 위한 출가인가
다 비운 생의 자세로 엎드린 고행
비린 세월도 선나禪那*에 들고
따로 품어야할 화두도 없다
탁발托鉢에 나선 소쿠리 한 권 불경처럼 모셔도
아무도 읽고 지나는 이 없고
동전 한 닢 떨어지는 소리 간절한 번뇌
칼바람에 시리다
죽비의 눈초리보다 따가운 사람의 시선에도
열반에 든 듯 눈 길 한 번 흩어짐 없이
수심愁心 깊은 고해에 몸 담근 행려가 된 묵언정진
세상을 깨우는 울림 우렁차다
무릇 고행이란
때를 기다리며 갈기갈기 제 가슴 찢는 일,
오랜 방황의 끝 침침한 삶
한순간 환해지는 일
숨소리조차 속세를 피한 듯 미동 없이
동안거에 든 저 사람 부랑자가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 앉아 있은 생불이다.
* 마음을 한곳에 모으고 고요히 생각하는 일
자전거의 시간 / 문순희
담벼락에 자전거 한 대 기대 서 있다
녹슨 핸들 위에 잡초가 자라고
뒷바퀴의 반은 둥근 뼈대를 꽉 잡고 있다
구불구불 바퀴에 매달려 온 길들
오도 가도 못하고 비에 젖은 채 묶여져 있다
감기다 끊어진 길의 부스러기들
낡은 필름처럼 돌돌 말려 있다
한 때는 탱탱한 바퀴로
아침을 굴리고 점심을 굴리고 밤을 굴리다
꽃을 감고 나무를 감고 땅을 감고 하늘을 감았을 것이다
돌부리에 걸리면
속도를 이기지 못해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헛바퀴를 돌리기도 했던 자전거
먼지를 굴리며 지나온 길을 밀어 내기도 했던,
굴러왔던 생이 균형을 잃고 비를 맞고 있다
버리는 것과 버려진 틈에서
바퀴살에 엉겨 붙은 녹 슨 시간이 저렇게 굴러가고 있다
녹슨 바퀴 사이로 흘러내린 길이 감기는지
바퀴가 잠시 전율한다
비는 추적추적 자전거를 적시고
자전거는 굴려왔던 시간을 적시는 동안
저녁은 그냥 굴러갔다
고물사 / 이봉주
부처가 고물상 마당에 앉아 있다
금으로 된 형상을 버리고 스티로폼 몸이 된 부처
왕궁을 버리고 길가에 앉은 싯다르타의 맨발이다
바라춤을 추듯 불어온 바람의 날갯짓에 고물상 간판 이응받침이 툭 떨어진다
반야의 실은 낮은 곳으로 가는 길일까
속세에서 가장 낮은 도량, 古物寺
주름진깡통다리부러진의자코째진고무신기억잃은컴퓨터몸무게잃은저울목에구멍난스피커
전생과 현생의 고뇌가 온몸에 기록된 낡은 경전 같은 몸들이 후생의 탑을 쌓는다
금이 간 거울을 움켜쥐고 있던 구름이 후두둑 비를 뿌린다
뼈마디들의 공음空音, 목어 우는 소리가 빈 병 속으로 낮게 흐른다
오직 버려진 몸들만 모이는 古物寺
스티로폼 부처는 이빨 빠진 다기茶器 하나 무릎 아래 내려놓고 열반에 든다
먼 산사에서 날아온 산새 한 마리 부처 어깨 위에 앉아 우는데
어디서 들리는 걸까
佛紀의 긴 시간 속에서 누군가 읊는 독경소리
古物寺 앞을 지나가는 노승의 신발 무게가 독경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젖은 책을 읽다 / 박종인
별장 앞에 두꺼운 책 한권. 파란 글씨들이 움직인다. 바람이 책장을 넘기고 글자들 저마다 수군거린다 키 큰 나무가 무엇인가 찾아 두리번거린다
손에 침을 묻힌 빗방울 쪽수를 확인한다 이리저리 글씨를 흔들어 본다 마른 글씨들을 찾고 있다 조심해 아차하면 책장이 찢기니까 맨 앞줄에선 글씨가 소리친다 누군가 페이지를 북 찢어간다 그 바람에 쪽수가 달라지고 숨겨둔 향기가 한 움큼 날아간다
젖은 머리가 싫어요 ‘울음’이라는 글씨가 도리질을 해요 난 목이 말라요 ‘갈증’이란 글자가 마른 침을 삼켰어요 살살 만져요 ‘겁쟁이’라는 글자가 겁을 먹고 파랗게 질렸어요 건드리지 마세요 ‘가시’라는 글씨가 가시를 세웠어요
그 많은 소원을 다 들어줄 수 없나 봐요 맨 뒷장 키 큰 나무가 벌컥 물을 들이켜고 옷이 다 젖었어요 꺾인 고개가 어깨까지 흘러내리고 아, 비가 그쳤어요 책 한권이 흠뻑 젖고 퉁퉁 불은 글자들이 떠 내려와요 누구나 무료로 읽을 수 있는 책
나는 저 숲이라는 책을 말려서 다시 읽을 거예요
책들 / 강해림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는 오후, 북회귀선은 없다 오랫동안 외설로 낙인찍힌, 금서는 외롭다 어두컴컴한 독방에서 수음하는 문장들
껍질을 벗기고 푹푹 삶은 몸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는 고행을 묵묵히 견뎌준 나무들 헌신이 없었다면, 그리하여 해탈한 표정 눈부신 지구상의 책들을 모조리 수거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려 버린다면
오래 된 책 속에는 시간의 자궁 냄새가 난다 가령, 고서적이나 족보 같은 삭아 한쪽 귀퉁이가 누렇게 변질되거나 만지면 바스러질 듯, 계보를 알 수 없는 시간의 알을 까고 있는 얼룩들
서가에 꽂힌 책들은 좋겠다 서로 등기대고 앉아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심연보다 더 깊은 심연에 낚싯대 하나 달랑 드리워놓고 권태라는 이름의 안경 낀 몽상가들 흉내나 내며 늙어갈 테니까
다시 북회귀선으로 돌아와, 책의 내부에도 지퍼가 있다면 고래뱃속 같은 북회귀선 안에 갇혀 한 사나흘 캄캄해지고 싶다 캄캄해진다는 것만큼 황홀한 성적 묘사가 있을까 세상의 위대한 책들 앞에선 더더욱,
관념이 짜주는 파리한 즙이 흘린 문장을 따라가려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책의 고문, 진리를 살해한 자와 공범이 되고 낙오하지 않으려면 늘 집중력이 문제다
그러고 보니 내 독서목록을 기록하던 만년필도 꽤나 관념적으로 생겼다 이제 막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여인의 복부처럼,
그리운 북회귀선을 기다리며
하품하는 책 / 유홍준
이 책은 주둥이가 지퍼로 잠겨져 있다
이만오천오백오십 페이지의 이 책은
말할 수 없이 고독하다
허리춤이 단단한 쇠단추로 채워졌다
이 책은 두껍고 이 책은 무겁다
이 책은 가죽을 둘러쌌다
이 책은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오래 읽힌다 이 책은
표지만 보아온 자들도 내용을 다 안다
행간의 징.검.다.리 밟고
강은 건넌다 이 책의
화자는 늘 잠언을 섞어 말한다
잠의 언어들로 가득 찼다 이 책은 게으르고
멍청한, 하품하는 개 같다 이 책은
눈물이 없다 웃음이 없다 눈곱만 가득하다
영원한 잠 속으로 들어가는 자들의 무덤에
산 자들은 이 책을 넣어준다 이 책은 검은 활자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매장된다 영원히
주둥이가 지퍼로 잠겨진 채.
그녀의 서가(書架)
배한봉
세상에는 불타올라도 타지 않는
서가(書架)가 있다, 타오르면서도 풀잎 하나
태우지 않는 화염도 있다
나는 저 불꽃의 마음 읽으려고
그렁거리는 차를 몰고 7시간이나 달려왔다
층 층 만 권의 책을 쌓아올린 채석강 단애
한때는 사나운 짐승처럼 시퍼런 칼날
튀어나오던 삶이었겠다
그럼에도 벼랑에만 매달려 사는
가마우지새에게만은 둥지를 허락하는 여자였겠다
악다구니 쏟으면서, 그게 가난에게 내지르는
주먹질이란 걸 알았던 것일까
가파를수록 정 많고 눈물 많은 달동네
노을의 그 지독한 핏빛
아 나는 기껏 몇 권의 습작노트를 불태우고
한 세계를 잃은 듯 운 적이 있단 말인가
이제는 저렇게 불타올라도 용암처럼 들끓지 않는
그녀의 삶, 삶의 문장으로 채워진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가마우지새 되어
그녀의 서가에 한 권 책으로 꽂힌다
미친 힘으로 벼랑 핥는 파도도
바다의 불꽃으로 피어나고
비루한 삶의 풍경에까지 층층 겹겹
한 살림 불의 문장을 새겨주는 채석강 노을.
박용운
길에 버려진 못하나
무심코 걷어찬다
발길질에 도르르 굴러가는 못을 보며 문득,
누군가의 무릎을 걷어찬 느낌
어디에서 빠져나와 길에 버려졌을까
찌그러지고 허리마저 굽었다
무언가를 물고 버티었을 시간이 온몸에 흔적으로 남았다
호된 망치에 맞으며
모서리를 잇고 틈을 메웠을 작은 못하나
누군가의 힘찬 못질소리에 아침이 일어서고
세상은 허리를 펴고
언덕은 산이 되고
못이 빠져나간 자리는 얼마나 중심이 기울었을까
이제 알겠다
아궁이 재를 쓸어내고 재 묻은 못을 하나 하나 고르던 아버지
망치로 두드려 펴던 그 못들이
세상의 무게에 휘어진
아버지의 등뼈였음을
한 됫박의 못을 모아
삐걱거리는 대문을 고치고 외양간을 고치고
기울어진 방문을 바로잡던 사랑의 노역勞役
그 못질 소리에 우리의 키가 반듯해졌다
슬그머니 못을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
아버지가 늘 그러셨듯이
미완성의 연애들 / 박종인
언제부터인가 그가 나를 읽기 시작했던 것 밑줄을 그으며 나를 줄줄 외우고 있었던 것 눈치 챈 페이지부터 나도 조금씩 그에게로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 누가 알까 맘을 덮어버리려 할 때마다 자신을 활짝 펴내 맘을 차지할 궁리했던 것
나 역시 그 페이지를 넘기기 싫었던 것
우리는 서로에게 행복한 한 권의 책이 되고 싶었던 것, 밀고 당기며 목차를 정하고 달콤한 소제목을 달았지만 정작 제목은 달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것
제본이 잘 못될까, 쪽수가 빠질까, 내용을 추가하고 각주를 붙이며 편집을 하는 동안, 탈자와 오자가 발견되고 내용이 부실한 책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
한 권의 책이 출판되기 위해 더 많은 퇴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연애가 사라져 버린 것
미완성의 책과 폐기된 책, 두어 권, 혹은 서너 권은 누구에게나 있는 그것.
파본破本 / 오명선
빨간 스프레이가 담벼락을 X자로 그었어요
핏빛은 늘 불길해요 이곳은 결국 간이역이었죠
선로가 사라진 이곳, 어둠이 등에 뿌리를 내려요
잡동사니 퀴퀴한 냄새가 편안해요 엄마와 학교를 피해 숨던 침침한 책상 밑처럼,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듯, 창문에 돌을 던져요 파열음이 내 손목을 긋고 사라져요 나를 버린 가족을 향해 침을 뱉어요
골목을 걷어차던 발목이 다시 시큰거려요
나는 불온한 책, 세상은 끝까지 나를 읽어주지 않았죠
나를 한 장씩 찢어내던 산동네
내 것이 아닌 낯선 길들을 묻어버릴래요
포클레인이 길을 낸 산동네는 어둠의 울음만 키우지요
달빛에 말린 울음이 버석거려요
내 치부를 들춰본 저 밤을 받아먹으며 성장을 멈출래요
쪽수를 넘기려고 애쓰지 마세요
난장판인 나를 바꾸고 싶지 않아요
애초에 낙장(落張)으로 태어난 걸요
아직 할퀴어야 할 것이 많이 남았어요
들판은 시집이다 / 이기철
천천히 걷는 들길은 읽을 것이 많이 남은 시집이다
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어다
오전의 햇살에 일찍 데워진 돌들
미리 따뜻해진 구름은 잊혀지지 않는 시행이다
잎을 흔드는 버드나무는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구절
뻐꾸기 울음은 무심코 떠오르는 명구다
벌들의 날개 소리는 시의 첫 행이다
씀바귀 잎을 적시는 물소리는 아름다운 끝 줄
넝쿨풀은 쪽을 넘기면서 읽는 행이 긴 구절
나비 날갯짓은 오래가는 여운이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혼자 남는 파밭
종달새 날아오르면 아까 읽은 구절이 되살아나는
보리밭은 표지가 푸른 시집이다
갓 봉지 맺는 제비꽃은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다
벅찬 약속도 아픈 이별도 해본 적 없는 논밭
물소리가 다 읽고 간 들판의 시집을
풀잎과 내가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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