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늘 / 이서진
햇빛이 가장 깊은 시간
반짝이는 모든 것들은 비늘이다
골목 구석에서 웅크린 것들조차 파르르 몸을 떨며 떠오르고
깨진 병조각과 찌그러진 캔, 버려진 채 비린 시간을 견뎌온 것들
출렁이는 각자의 길을 따라 헤엄친다
후포 어시장 한 가운데
비린내 가득한 천막 안에서 생선을 파는 여자
도마를 내리치는 예리한 칼 위로 비늘이 날아든다
그녀는 온몸에 반짝이는 비늘을 붙이고
얼음 위에 몸을 내민 생선들의 숫자를 센다
고무장갑을 벗은 여자의 손바닥 위
지워진 지문의 흔적을 바라본다
수많은 세월을 흘러온 그녀의 지문은
비늘처럼 떨어져 어느 골목을 헤매고 있을까
햇살이 굴곡 없는 여자의 손끝을 더듬고 있다
오랫동안 수많은 생물을 골라낸 여자의 손끝
어두운 뒤편에 버려진 것들은
문신처럼 박힌 지문을 끌어안고 잠들었을까
그녀는 어떤 표정으로 벗겨진 손끝을 닦아냈을지
마치 수조 같은 천막아래 갇힌 여자의 눈동자가
투명한 벽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허공을 헤엄치는 골목의 비늘들은
찬란한 햇빛의 궤적을 따라 거리 사이사이로 쏟아지고
사람의 정수리가 하늘을 향해 반짝이고 있다
손바닥 끝 지문들은 마지막 남은 비늘의 흔적일 것이다
출렁이는 햇살의 벌판을 힘차게 떠돌던
싱싱한 어조이었음을 증명하듯
그녀는 쏟아지는 한낮을 향해 반짝이는 칼날을 들어올린다
넙치가 사는 법 / 강태승
바닥에 엎드리면 햇빛에도 들키지 않는다
파도가 뒤집어도 한결같이 부동
코도 베어가는 저 아수라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닥과 일치하는 것
바닥아래 바닥 없고 바닥 위에 바닥 어
깨질 수도 깰 수도 없는 바닥에 누우면
아래로 휘어지는 것은 붉고 맑아,
차라리 바닥의 재료 되어버린 등짝
저승과 맞닿은 바닥에서 올려보면
해와 달도 평화롭게 시간을 달린다
이 섬 저 섬 사이로 쏘다니는 바람
끝끝내 움직이지 않는 바닥 때문이고
낮과 밤에도 쉬지 않고 정지하고 있어
넙치는 바닥의 무게와 같은 방향이다
소음 돌아가면 달랑 바닥만 남는다
등대가 지키는 외로운 바다를
덜거덕거리는 나룻배가 가끔 깨웠으나
바닥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늘 안전하게 죽어 있어
바닥 난 주제에 바닥에누워도
도망치지 않는 바닥으로 안전한 목숨,
종일 조개 줍던 강씨, 엉덩이 툭툭 털고
인사 없이 가도 나무라지 않는 바다에
눈이 내린다 죽어 내린다 다시 내린다
눈이 어떻게 내리는지 가운데를 받는
외면하지 않고 자리를 나누는 내어주는
깊이가 없으면서 깊고 고요한 바다에서,
넙치는 자신의 바닥을 내재율로 품는다.
햇빛 채굴 / 김겨리
염전이 바다를 가둬 놓고 햇빛이 탁란한 알들을 포란하고 있다
수평선이 해풍을 물어다 먹이는 물의 종족,
간만의 차로 태몽을 꾼 뒤라야 옥양목빛 결정체로 부화된다
몽고점이 흰 것은 바다의 후예라는 증표
늙은 염부가 사금에서 간수를 뺀 소금을 캐고 있다
가계를 직조하는 고무래질마다 드러나는 가문의 뼈대
햇빛을 담았다 펴냈다 하는 것은
부력을 증발시켜 바람을 채로 거르는 일,
달빛 처마에 걸린 거미줄이 해풍을 클래식처럼 엮는 밤
혼자 배부른 달의 헛구역질이 심상찮다
어둠은 격자무늬로 뼈가 촘촘해지고
중력을 겉돌며 달이 물질하는 것은 태양이 뜨는 각도를 지켜보는 일
염전이 타들어갈수록 바다의 육질을 더 단단해지고
염부의 마른 입술이 해수면의 필체로 밀물과 썰물의 행간이 될 때
수평선에 묶인 목줄을 풀고 원 없이 컹컹 짖는 바다를 본다
만삭인 염전의 산기로 바다의 포궁이 열릴 즈음
수평선으로 한 올 한 올 엮은 후릿그물을 힘껏 당긴다
퍼덕거리는 하얀 지느러미, 묵직한 손맛
쓸어 담은 삼태기에 방류한 갯것의 고딕체가 가득하다
햇빛의 골조로 낚은 천일염이 뻐끔거린다
낡고 오래되어 허물어질 듯 위태로운 소금 창고에
벽돌을 쌓듯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흰 월척들
흘수선 / 이은정
눈 내리는 포구
자박자박 졸고 있던 목선들이
말뚝에 매어 놓은 소처럼
찰박찰박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흘수선은 악기다
물의 악보를 가장 잘 이해하는 너울성 타악기다
소 울음 가득 품은 장구의 북편
소금기에 절은 궁채가 수면의 음표들을 칠 때마다
북과 워낭은 각 색의 화음을 이루며
넘실넘실 소리되새김질하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짐승의 목에
악기를 달아 놓는 것을 즐겼다
딸랑딸랑 소의 목에서 울리던 방울과
긴 밧줄에 묶인 배들의 목전에서 들리는
저 한가한 박자엔 눈발 성근 포구의 오후가 있고
파도를 삭히는
뱃사람들의 따뜻한 잠이 들어 있다
풍랑에 겨워 출항을 머뭇거리는 흘수
비스듬히 누운 돌꼇잠을 푸른 물이 뒤척거리면
출렁이는 꿈은 얽어맨 축승縮繩처럼
가닥이 여럿이다
몇 해가 지나도록
소리의 가닥을 잡지 못한 장구재비도 있다
조롱목을 조였다 풀며 해안을 거닐다가
불현듯 모래톱에 걸린 병목의 시간은
정 동쪽 끝으로 침몰해간다
포구에 눈 내리고
물은 무료한 건드림을 쉬지 않지만
밧줄은 현악기의 줄처럼 팽팽해진다
물 밖과 물 안쪽이 만나는 곳
저렇게 폭신한 자리도 없을 것이다
밧줄과 포슬포슬 내리는 눈
먼 바다 조업에서 돌아온
뱃사람들의 나른한 아랫목과
포구로 돌아가는 물살의 문우지정
고요한 듯하지만
목선엔 쉬지 않는 박자가 생물처럼 들어있다
악사의 채 끝을 타는 음표들이 팔딱거린다
삐걱거리는 물 위에서
울렁울렁 떠 있는 수평선이 보인다
[동상] 구부러진 곡선들 / 김우진
농협 앞 좌판에서 멸치 한 됫박을 샀다 비릿한 냄새가 옮겨 붙어 구불구
불한 골목을 따라온다 할머니의 등처럼 구부러진 곡선들,
저들에겐 새들의 유전자가 있어 허공이 그들의 놀이터였다 석양을 물고
물 위를 풀쩍 뛰어오르는
직선의 날렵한 몸짓이었다 은비늘 번쩍이며 파도를 물고 흐르던 빠른 속
도였다
포식자보다 더 빨라야 했으므로 속도가 목숨이었다
입속으로 거대한 바다가 드나들고 거센 파도가 스칠 때, 그들은 함께 물결
이 되어 흘렀다
떼를 이루어 거대한 몸짓으로 적과 맞선 그때, 그물은 멸치 떼가 온다고
외쳤다
너른 바다에 지느러미로 쓰고 다닌 흘림체, 생의 푸른 문장을 뱃속에 품고
멸막에서 그들은 모두 휘어졌다
곡선으로 휘어진 지느러미가 바다의 끝을 물고와 도심지에 풀어 놓았다
부력을 잃은 생명들이 좌판대 위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종로3가에 가면 구부러진 곡선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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