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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바구미를 죽이는 밤/문성해

에세이향기 2022. 11. 27. 12:14

바구미를 죽이는 밤

 

문성해

 

 

처음엔 작은 활자들이 기어 나오는 줄 알았다

신문지에 검은 쌀을 붓고 바구미를 눌러 죽이는 밤

턱이 갈라진 바구미들을

처음엔 서캐를 눌러 죽이듯 손톱으로 눌러 죽이다가

휴지로 감아 죽이다가

마침내 럭셔리하게 자루 달린 국자로 때려 죽인다

죽음의 방식을 바꾸자 기세 좋던 놈들이 주춤주춤,

죽은 척 나자빠져 있다가 잽싸게 도망치는 놈도 있다

놈들에게도 뇌가 있다는 것이 도무지 우습다

 

혐오도 죄책감도 없이

눌러 죽이고 찍어 죽이고 비벼 죽이는 밤

그나저나 살해가 이리 지겨워도 되나

고만 죽이고 싶다 해도 기를 쓰고 나온다

이깟 것들이 먹으면 대체 얼마나 먹는다고

쌀 한 톨을 두고 대치하는 나의 전선이여

아침에는 학습지를 파는 전화와 싸우고

오후에는 종이박스를 두고 경비와 실랑이하고

밤에는 하찮은 벌레들과 싸움을 한다

 

누가 등이 딱딱한 적들을 자꾸만 내게로 내보낸다

열기로 적으로 환해지는 밤,

누군가 와서 자꾸만 내 이불을 걷어 간다는 생각,

자꾸만 내게서 양수 같은 어둠을 걷어 간다는 생각,

날이 새도록 터뜨려 죽이는 이 어둠은 가히 옳은

 

  길일(吉日) / 김나영

 


외삼촌의 파산이 오빠의 발 앞에 엎질러진 후
오빠의 청춘에 붉은 차압 딱지가 붙었다.
늘 생물도감 속에 숨어서 지내던
길거리 꽃 한 송이도 꺾지 못했던 오빠가
환갑이 다 되어 수백 송이 꽃 속에 파묻혀 있다.
멀리 사는 친척들까지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아 놓고
밥과 떡과 술을 멕인다, 하루는 부족하다고
2박 3일 밤낮없이 밥과 떡과 술을 멕인다.
에그머니나 오빠 망령 들었나 보네
나는 떡을 먹다가 목이 메고 마는데
내 등 두드리던 외숙모, 걱정 말란다
오늘은 길일이란다.
이렇게 큰 잔치 배설(排設)해 놓고
정작 오빤 부끄러워졌을라나
사진 속에서 빠져나오질 않는다.
하객들 불러 모아 놓고
꽃 속에 파묻혀 빠져나오질 않는다.
오빠의 생을 통 털어
오늘은 이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날.

 

납골당 도서관 / 김나영

 


  질기게 하품을 하고 있는 시계 아래, 늙은 사서(司書)가
정물처럼 앉아 있다. 투덜투덜 동어반복만 늘어놓는 선풍
기는 지루하게 피어오르는 도서관의 고요를 좌우로 흔들
고 있다. 읽히지 않는 책들과 빈 의자가 부동자세를 한 채
졸고 있는 이 곳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빼든다. 세련되지
못한 겉표지에 드문드문 곰팡이가 묻어있다. 책장을 펼치
는 순간,거미 한 마리 황급히 줄을 거두며 사라지고,입 냄
새가 울컥 쏟아진다. 1978년 9월 25일 이후 아무도 말을 걸
어주지 않았던 그 입. 누군가의 눈빛을 기다리던 그 입. 눈
이 맵다. 그걸 눈치 챈 선풍기가 재빨리 공중으로 냄새를
흩어 버린다. 책꽂이에 꽂힌 책들의 제목이 위패(位牌)처럼
선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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