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톱 탁본 / 김겨리
명사십리에 새발자국 수두룩하다
썰물에 쓰고 밀물에 퇴고하는 바다의 서사,
밀물이 화선지처럼 모래사장의 요와 철에 골고루 펼쳐지면
먹방망이에 해풍을 듬뿍 묻혀 바다를 본 뜨는 어머니,
씨감자 캐듯 아버지 배를 부리고 먼바다로 떠나시면
언젠가부터 어머니의 종교는 바다,
사하의 바다는 탁본체로 편찬된 어머니의 서재였다
해풍에 깎여 심하게 문드러진 아버지의 지문은
먼바다 일렁이는 격랑을 닮았다고
횟배 앓는 내 배를 쓸어내리며 혼잣말처럼 들려 주시던 얘기로
파도를 볼 때마다 아버지의 지문이 저랬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내 지문을 바라보면 물결체의 행간들이 출렁이곤 했다
바다를 수소문해 아버지의 기별을 듣는 밤이면
창가 정화수에 푹 잠긴 보름달을 보고 손이 닳도록
어머니가 밤새 빌고 빌었던 치성은 무엇이었을까
물새들 자정 녘까지 모랫벌에 모여
도래지로 돌아갈 탁상공론할 때
어창이 묵직해진 아버지가 귀항을 서두르고 계시다는 걸
어머니는 짐짓 어떻게 아셨을까
아버지가 물길을 차곡차곡 개키며 뱃머리를 뭍으로 향할 때
어머니는 치부책처럼 가슴에 탁본된 사하의 밤바다를
달달 외우고 계셨던 거였다
갑골문자로 새겨진 문장들
의태어로 필사한 바다의 서사가 한 장 한 장
어머니의 가슴속에서 집대성될 때
모래톱은 어느새 아버지의 궤적으로 편찬된
어머니의 서재가 되어 있었다
을숙도 해풍국수 / 구봄의
바닷가 귀서리 바지랑대가 횡렬로 비스듬하다
여러 폭 국수 가락들 간간한 바람에 흔들리며
수 천 갈래 은파금파로 길게 술렁인다
국수가 마르는 동안 여섯 살 나는
해변 뙤약볕에서 무럭무럭 까매진다
조가비는 캐스터네츠, 조막손으로 달가당 쳐본다
금모래에 파묻힌 신발 외짝을 파내어
작은 발을 가만히 집어넣을 때
고등게들이 발가락에 음표처럼 달라붙는다
은빛 굽이치는 수평선을 다섯 번 그어보면
저녁 해도 오선지에 내려앉을 거라고
오래도록 들여다봤던가
엄마는 음보 그리듯 국수가닥을 쓰다듬는다
손가락 새로 환하게 날아오르는 갈매기들,
기우는 햇살 뒤집어 쓴 채
그 여운이 멀찌감치 있는 내게 엉겨 붙는다
힘센 말미잘처럼 내게 착 달라붙는 엄마의 촉감
덜 자란 생각이 꾸둑꾸둑 마를 때까지 해풍 속을 지나
게딱지같이 나지막한 집으로 간다
발개진 종아리가 마중나온 저녁
그제야 허리를 펴는 당신의 눈빛에도
애잔한 물결이 인다 그 찰진 가락을,
나는 유년에 또박또박 베낀다
감천, 그 골목 / 김은혜
푸른 지붕 잎맥을 채우고 돌아오는 밤
낡은 벽화에 그려진 비릿한 물고기 비늘
붉은 가로등 불빛에 몸을 뒤척인다
좁은 골목들이 엮여있는 회로 사이에서
먼지에 덮인 방은 홀로 주파수를 맞춘다
아버지는 달팽이관처럼 등짝 웅크린 채
무음이 되어가는 허공을 듣는다
듬성듬성 빈틈이 보이는 정수리 위로
반질하게 새어나온 하얀 안테나들
공중에 온기 없는 숨들이 공명하자,
아버지가 얼굴 위로 느슨한 현을 당긴다
오래된 악보를 삼켜낸 아버지는 그저
낮은 한숨 몇 개를 음표처럼 달싹인다
알 수 없는 기호처럼 아버지의 글자들이
단 한번도 표음되지 못한 채 바스라진다
몇 개의 귓불들이 어둠 속에 차가워지고
아버지가 휘어진 안테나를 달고 뒤척인다
낡아가는 뒤통수에 수신되는 작은 음파들
재생되지 못한 말들이 파동을 타고 온다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간 아버지는 어디쯤에서
작은 귓불을 따뜻하게 기울이고 있을까
빗금이 쏟아지고 전류가 흐르는
새치가 번뜩이는 아버지의 둥그런 뒷모습
그 꼭대기 마다 파동처럼 바람이 분다
멀리, 가로등 번진 어두운 골목 아래
허공을 삼킨 물고기가 아가미를 뻐금거린다.
새벽이 한걸음 한걸음 걸어온다
모래톱 / 윤빛나
몇 겹 이빨로 사납게 오르내리던 수난의 고집쟁이
가막조개 부둥켜안은 모래들의 습관을 긁어내던
똥색 월급봉투, 사그락 사그락
그 이름, 빨갛게 달구어진 희망 찬 사발을 건네주던 사막
붉은 노동 한 잔의 입을 걸어 잠근
숯검댕이 아버지 낡은 어깻죽지가
짊어지고 오던 막걸리 냄새 절뚝절뚝
그리움 푹푹 빠지는 신평공단길 골목창 지나
개망초 피는 집에 갓난쟁이 발톱들이 찾아오면
그 자욱한 찬장을 열어, 한 홉 사하의 꿈 물려주시던 어머니
가시리 풀 끓여 신문지 발라놓은 둥지는 만원이었다
냉이꽃 찌그려져 검은 모기 한 마리 갇혀 있던 동공 속
양은 빛 하오를 비추던 오래된 저녁
섬돌 위에 사람인자 걸어 놓은 검정 고무신 십일 문짜리
몇 땀 궤매 신은 작은 바다가 데리고 온
발가벗은 생멸의 알갱이들
참빗 쟁기를 뚝뚝
무명의 옷을 벗기던 안개의 머리카락
곱게 빗겨놓은 모래 언덕
깊고 긴 강물의 비밀만큼 쌓이고 만나서
종잇장처럼 헤어지던 방목지
사철 농구같이 구부러진 손가락
푸르른 전설이 기어 와서
사하의 궁전을 짓던 모래의 고향
청보리 빛 목소리 들리는 선잠결에
사하의 노래가 여울져오면
사글셋집 달빛 이불을 끌어당기는 새벽
울엄마 달여놓은 재첩국 한 양동이 보글보글
부추빛 사랑 한 다발 썰어놓고
일어나소, 일어나소, 아버지를 깨우던 멀구슬남 소반상
뒷문 밖 재두루미 엄마, 팔십 살 먹은 괘종시계
새벽밥을 먹여 놓고, 모래톱을 본다.
대티고개 어머니 / 윤상용
바람아, 니그 집 아버지, 사람살이 버무려
간밤 짭조름한 세월 한 잔을 마셨고
고개 숙여 새끼들 한 놈, 두 놈, 쓰다듬던 새벽.
곱디고운 어머니 회화나무 핀 대티고개 넘어
절영도 대평동 골목창까지
재첩국을 팔러 가셨다.
한 그릇, 슬픔이 다 무엇이냐
묻지 마이소.
울아버지 속 달래줄 부추빛 슬픔 썰어
둥둥 띄운 환희의 국물 한 사발
재치국 사이소, 재치국 사이소!
무심하게 너를 업고 오르시던 고갯길 어머니의 노래.
하얗게 등을 세운 쌍봉낙타들.
그렇게 가막조개 잡아
한 솥, 숙명을 바글바글 끓여 쪽머리에 이고
그 마르고 구부러지던 사막을 걸어가서
작은 사랑 한 양동이 울어예던 솔티고개 어머니.
통통통 물애기 데리고
사하의 바다로 건너가셨다.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쉬/문인수 (1) | 2022.11.26 |
---|---|
비늘 / 이서진 (1) | 2022.11.26 |
파밭 경전 / 권용례 (1) | 2022.11.25 |
머리맡 / 이정희 (0) | 2022.11.20 |
편백나무의 영토 / 최류빈 (0) | 2022.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