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맡 / 이정희
더듬거리는 곳에
물 한 그릇 놓아두면
그곳이 머리맡이다
물그릇엔 물이 말라간 흔적이
천천히 각인되어 있었다
아래로만 트인 물의 의중에 따라
꽃피고 마르고 다시 잦아든 지층처럼
고요와 냄새가 내려앉은 흔적
더 이상 민망이 없는 몸에
여름옷 한 벌이 입혀져 있다
머리맡은 산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예의 같은 곳이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검은 그림자,
갑작스레 당한 일들처럼 민낯을 접지 못하고
징검돌처럼 이어붙인 시간들의 배웅과
켜켜이 앉은 물그릇의 날짜를
아무도 세지 않고 어림짐작으로
한 죽음을 정리했다
마른침을 삼키듯 남은 숨을 들이킨 주저흔
물그릇은 자신의 목마름을 천천히
지층으로 쌓았을 것이다
죽은 사람도 갈증의 속도가 있었을까
살아서 마셨던 벌컥, 그 갈증을 지우는 속도
조금씩 느슨해지는 아귀의 힘
꾸물거리는 일조차 갈증이고 조바심이었을까
수습되지 않은 눈금으로 부릅뜬
마지막 목격담은
물의 기억으로 바짝 말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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