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책을 읽다 / 이문정
- 계림(鷄林)에서
천년을 지나온 길은 이곳에서 처음 열렸으리
나무의 몸 빌려 빛을 세운 숲
한걸음 내 딛자 침묵하던 나무들이 책장을 넘긴다
빛은 나무와 호흡하며 숲을 지켜왔으리
나무들은 힘찬 맥박 뻗어 하늘로 넓혀갔고
뿌리는 몸 낮추어 사방으로 길을 만들어 갔으리
어둠 걷어내며 하늘 열리던 날
나무와 바람은 광명을 천지에 퍼다 날랐고
그리하여 새들 날아들고 노랫소리 끊이지 않는
숲은 날로 번성해 갔으리라
입술에 닿는 책의 숨결이 깊어진다
발이 움직일 때마다 천년도 더 된 노래들이 일어선다
빛의 소용돌이를 잠재우며 그 자리에 서 있는 숲
집중할수록 또렷해지는 페이지를 넘기면
까마득한 날과 소통되는 언어들의 포옹
계절을 잉태한 태실에서 날갯짓 하고 있다
숲을 읽으면 눈빛 스친 자리에서 날아오르는 문장들
오랜 시간 이름 없이 살아도
제 풍경 거두지 않고 푸른 잎으로 돋는다
지금 우리가 체류했던 시점도 숲의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리
숲의 중심에 빛이 내려앉는다
물푸레나무가 빛을 따라 뿌리를 하늘로 뻗는다
빛을 끌어당긴 숲이 일어서고
다시 천년을 향한 길이 열리고 있다
별빛소리 / 주재규
어둠이 줄지어 설 때 알리라
갈 곳을 몰라 거리에서 붙들린 시간을
따라 잡는 별빛으로 걸음을 늦춘다는 것을.
잠자는 갈대의 숨결이 긴 한숨으로 나뒹굴고
달에 비치는 밤새 소리는 새벽과 같이
꿈을 줄다리기한다는 것을.
내가 별빛이 지키고 있는 들녘에 서서
흐린 눈으로 밤의 향기에 취할 때
기나긴 꿈이 끝나는 샛길로 걸어온 아침은
마침내 둥그런 해를 내 뱉지만
자유로운 새벽 들판에는 밤새 꿈꾸었던 풀 이슬이
이파리마다 동그랗게 구슬을 꿰고 몸을 굴려서
저마다 햇살의 입술에 달콤한 빛을 뿌려도
해는 알몸으로 희생된 이슬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
나는 어지러운 바람을 호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낮은 포복으로 기다린다.
별빛이 풀잎을 타고 구르는 소리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진
우리의 꿈에 날카로운 촉각을 만들어라.
예지가 시퍼런 불꽃을 촘촘히 밝혀둔 밤하늘은
고통의 수렁에서 건져 낸
내 빛나는 보색에 난 상처를 헹군다.
별빛이야, 그대는 알리라.
언젠가 반짝거리며 차가운 창문 틈으로
내 눈이 환하게 밝아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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