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선 / 정순
저녁의 딱딱하고 고단한 파도 한 켠에
세월 하나 뒹굴고 있다
부력의 한쪽을 추억으로 비워낸 듯
기우뚱 균형을 놓아버리고서는 낡은 부피를 달래고 있다
얼핏 보아 고기들의 길을 단념한지 오래인 듯한,
따라온 길 파도에 녹이 슬어 보이지 않는다
저 배도 한때는 사랑을 했거나 어느 이름 모를 추억 속에서
며칠이고 향긋한 정박을 했을 것이다
불 켜진 환락의 깊이를 쏘다니거나 가슴 속으로 저며드는
이름 모를 물살들에게 운명을 맡기며 추억을 탕진했을,
나 이쯤에서 저 배의 소멸들에 대해 받아내려 한다
기억 속 깊이 끼어 있는 몇 줌의 항해일지와
폐유같은 어둠 저쪽에서 환락을 장만하던
나폴리 마르세이유 요코하마의 날들과
며칠이고 정지된 엔진 근처에서 뜬눈으로 보내던
불임의 위도와 경도를 짚어보려 한다
이튿날이면 폐유처럼 떠오르던 희망이라는 낯선 부력의 위로는
어느 해협에서 배운 악몽이었을까
나는 조용히 언젠가의 서풍이 불아와
가슴 속에서 일러주었던 말이라도 실천하듯
관념 속 무례한 부력을 내려놓고서
노을이 내주기 시작하는 저녁 쪽으로 어스름한 귀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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