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갖바치 김씨/김경

에세이향기 2022. 12. 20. 02:59

갖바치 김씨






읍내 사거리 광주은행 귀퉁이
한 평도 안 되는 구두수선소 안에
늙은 주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다
주름진 얼굴이 운주사 돌부처 같다
손님 뜸한 한낮
때 지난 신문 펼쳐놓고 경()을 읽듯
골똘히 행간을 짚어 가는 노인의
검은 손가락이 묵주알 같다
한평생 신발의 암자에서
상한 신들을 감치고 공글리고 박음질하며 살아온 노인의
손바닥이 구둣주걱을 닮았다
덕지덕지 역한 냄새를 뱉어내는 길들이
노인의 무릎 위에 검은 혓바닥처럼 누워 있다
코가 터지고 굽이 닳은 신발의 내력을 들춰내
상처를 꿰매고 아픔을 찬찬히 달래주는
약사보살 같은 손, 한때는
근동에서 이름을 떨쳤던 금강제화점 갖바치 김씨
광약을 바른 구두코처럼 반들거리던 시절도 있었다
삶이란 굽만 갈아 신는 신발* 같아서
횡단보도 건너편 나이키 불빛에 눈앞이 캄캄해도
아직 구두칼 놓지 못한 저 노인
전구도 없는 구두수선소 안에
돌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있다






대갱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남도의 어느 오일장 좌판대였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苦行)하고 있는 부처의 갈비뼈처럼 수척해진 그의 몸은 뼈와 가죽만 남아 뱃가죽이 등에 닿아 있었다

과문한 나는 그의 이력을 알지 못했지만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생애를 짐작하긴 어렵지 않았다

풍찬노숙의 세월을 견딘 고행자의 위의(威儀) 앞에서 무릎을 구부리고 경배하듯

그저 손바닥으로 그의 마른 몸을 가만히 쓰다듬었을 뿐

그 후 얼마동안 나는 그를 잊고 술집을 드나들다

다만 세상에 환멸을 느낀 자들이 이따금 그의 동무가 되어 막걸리를 곁에 두고 그를 찾는 다는 풍문을 들렀다

그리고 그를 마지막 본 것은 읍내병원 별관 암병동에서였다

그는 세상의 희로애락을 놓아버린 자의 평온한 눈빛으로

오일장에서 본 대갱이처럼 삐적 마른 몸으로 병실에 누워 있었다

몸은 오래 묵은 집의 서까래 같았지만 눈빛은 맑은 우물처럼 깊었다

그가 노을이 번지는 창가에서 바깥세상을 꿈꾸는 태아처럼

시간도 마음도 놓아버리고 웅크려 앉아**

온몸 파닥이며 비늘을 떨구던 날들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그의 슬픔에 기대어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리는 땅끝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었다

 

 

* 대갱이: 남도지방에서 개소갱이 혹은 운구지라고도 부르는 망둥어과에 속하는 마른 물고기

** 김태정의 시 중에서

 

 

바람의 독서


오래 읽지 않은 낡은 책들을
살구나무 아래 탑처럼 쌓아두었다
한때 내 영혼의 불쏘시개였던 것들
넝마가 되어 바람에 너덜거린다
한나절 지나도록 고물장수는 오지 않고
바람이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고 있다
무명無明의 시절 어두운 눈을 밝혀주고
청춘의 밤을 뜨겁게 지새웠던,
문장과 문장, 구절과 구절 사이의 여백들
그 여백 사이에 누렇게 바랜 회한과 추억을
바람의 손가락이 짚어가며 읽고 있다
너무 작아 눈이 아픈 글자들까지
낭랑한 소리로 읽어내는 저 바람의 독서라니!
낙관주의자의 명랑한 목소릴 닮았다
그 소리에 고무鼓舞되었는지
공터에 만개滿開한 불그레한 살구꽃들
허공에서 난분분 춤을 춘다
바람이 읽고 간 페이지마다
살그머니 꽃잎 책갈피를 꽂아놓고서

 

지렁이 보살

손바닥만 한 텃밭에 기대어 한 철을 살았다
상추며 쑥갓이며 고추 같은 풋것들
알싸하고 쌉싸름한 그 뜻 아침저녁으로 음미해도
비바람 지나간 텃밭에 번뇌만 무성하다
웃자란 상추밭 뒤엎고 검은 상토 위에
경전 필사(筆寫)하듯 한 땀 한 땀 가을 씨앗들 뿌리다
질겁한 아내의 낯바닥처럼 흙 속에서 곰살거리던 지렁이들
행여 호미날에 다칠세라 손바닥 내밀어 길을 묻자
몸뚱이로 만()자 한 자 써 주고는
오체투지로 축축한 흙바닥 기어간다
절집에 손님 많은 날이면
늙은 몸으로 가파른 산길 새벽같이 올라와
밥하고 설거지하느라 밤늦게 캄캄한 산문(山門)을 나서던
미황사 아랫마을 산다는 공양주보살을 닮았다
토굴 속에서 묵언정진 하는 수행승처럼
어두운 이토(泥土)에서 알몸으로 한 생을 산 지렁이 보살님
지상의 풋것들에게 자신의 똥까지 다 내주고
오늘은 한없이 낮고 느린 만행(卍行) 길을 떠나신다

 

나는 땅끝 시인

 

천 리나 먼 길

서울의 불빛 그리워 한 적 없는

나는 땅끝 시인

마음도 몸도 중심을 버린 지 오래

오로지 오지에서 피고 지는 저 들꽃들과

스스로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텃새들

골목마다 푸른 바람을 거느린 대나무숲과  

한겨울에도 눈 속에 붉은 동백꽃들이 나의 오랜 벗이네

한때, 대처를 떠돌던 갈꽃 같은 마음도

중심을 향해 시퍼렇게 자라던 칡넝쿨 같은 열망들도

이제 붉은 황토밭 고구마 순으로 묻어두었네

 

그래도 때로 마음이 사무치는 날이면

갈두나 사구미 어느 주점에 앉아

그저 저무는 것들의 그 쓸쓸한 여백을 붉은 물마루에 걸어두고

육자배기 가락으로 우는 파도소리에 기대어

매생이 국물같이 정 깊은 사람들과 소주잔을 비우겠네  

진달래 고운 청명(淸明) 어름이나

목덜미 시린 입동(立冬) 무렵이면  

그리움으로 단풍 든 마음을 여미고

금쇄동 옛터에 칩거한 고산(孤山)를 찾아가거나

달마산 미황사 부도전 가는 샛길을 걸어도 좋겠네

달 밝은 밤이나 눈 내리는 저녁이면  

이동주, 박성룡, 김남주, 고정희, 김준태, 황지우 ……

이 땅에서 난 별 같은 시인들의  노래를 읊조리며

느릿느릿 시의 행로(行路)를 따라서

장춘동 십리 숲길을 걸어도 좋겠네

 

천 리나 먼 곳

서울의 불빛 그리워 한 적 없는

나는 땅끝 시인

눈보라 치는 변방에서

마늘씨 같은 희망의 노래를 부르겠네

 

 

 

일지암 편지
-추사에게



산벚꽃 화사한 봄날입니다.
세상 속에서 지친 몸 상한 마음 죄다 산문에 내려놓고
굽이굽이 산 넘고 물 건너 암자에 들었습니다.
길고 긴 번뇌의 밤을 뒤척이다
어스름 새벽하늘에 이윽고 눈을 뜨는 별빛처럼
구절양장 인생길 모퉁이에  마주친 그대와 나는
다관과 찻잔 같은 인연인 것을,
고적한 유배지에서 보내온 그대의 편지는
밤새 눈꼽이 다 끼도록 혓바늘이 돋고 정신이 멍해지도록
그렇게나 지독한 그리움입니다.
해남의 달달한 바람맛과 햇빛과 놀던 물소리
마음의 찻잔에 오래 우려 녹차빛으로 담습니다.
비바람 먹구름에 세상을 배웠어도
달 밝은 밤이면 밀려오던 차향(茶香) 같은 그리움 차마 이기지 못해
솔바람 그림자 떨구는 옹달샘 물 한 바가지로
고요히 마음 열고 찻물을 끓일 때
대나무 숲의 바람소리 같고 소나무 숲의 파도소리 같은
죽로(竹爐)에 물 끓는 소리 산사의 적막을 깨웁니다
새벽이슬 머금어 푸르른 새의 혀와 같은 작설
그 향기에 가슴은 떨려도 사랑은 넘치지 않으니
물의 마음을 닮은 찻잔은 그대의 마음
한 잔의 맑은 여운(餘韻) 머금고 있노라면
마음의 번뇌가 다 날아가 버리고
전나무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처럼 뼈에 사무치는
맑고 찬 기운에 영혼도 다 맑아집니다
인연의 바다에 흩날리는 꽃비처럼 아름다운 이 봄날
그대는 풍경소리로 날 부르고
나는 그대 곁에 차 향기로 머물겠습니다.
내가 그리운 날이면 초당에라도 들러
그대, 차 한 잔 마시고 가세요



내 마음의 맹골수도

 

너를 잃은 마음은 맹골수도

바닷속처럼 컴컴하고 질척이는 뻘밭이야

한 치의 시야도 확보하지 못한 잠수부의 물안경처럼

늘 뿌옇게 흐린 오늘과 내일이 기다릴 뿐

삶이란 또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한 것인지

아직 비가 되지 못한 물기를 머금은 안개처럼

눈물을 머금고 글썽이는 눈망울처럼

나의 마음은 글썽이는 말들의 감옥이야

이제는 미움에게 내 줄 방 한 칸도 없어*

맹수처럼 달려드는 파도가 아랫여, 웃여에서 우는

맹골도 앞바다처럼 안개 자욱한 내 마음은

수심을 알 수 없는 오리무중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불통이야

목요일마다 광장에 나가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는 자세로 하늘에 풍등을 날려도

간절하게 처절하게 돌아오지 못한 너의 이름을 불러도

묵묵부답인 하늘님의 나라

북악의 하늘엔 별들도 빛을 잃었어

마음은 촉이 나간 전구알처럼 캄캄해

나는 캄캄한 바닷속에 누워 있는 슬픔의 고래

누가 와서 날 좀 깨워줘

글썽이는 말들의 감옥에서

내 말, 내 영혼의 아이들을 꺼내줘

제발, 모든 상가가 문을 닫는 주말이 되기 전에

금요일 밤엔 따끈한 치즈피자라도 먹을 수 있게

굳어버린 내 혀를, 멈춰버린 내 심장을 꺼내줘

컴컴하고 질척이는 이 뻘밭에서

더는 기다릴 수 없잖아

마음이 맹수처럼 사나워지기 전에

나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말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내 마음의 집

노래가 강물처럼 흐르는

()의 집으로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용서는 미움에게 방 한 칸 내주는 것이라는 대사에서 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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