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문서 / 성영희
한겨울에만 자라는 뿌리가 있다
물결무늬 고랑 끝에서 자라나는 투명한 뿌리들
뚝 떼어서 와작 씹으면
이만 시리던,
뿌리가 부실한 사내애들은 곧잘 겨루기를 했다
손 한 번 베지 못한 그 맑은
칼싸움으로부터
쨍그랑 잘려나가기도 하던 긴 겨울
처마 끝에서 자라는 고드름은
뿌리열매다
씨앗 하나 심을 땅 없는
가난한 양철지붕의 겨울 수확
잠깐의 햇살에도 툭 끊어지고 마는
가늘디가는 한철 농사다
고드름도 잘 자라지 못하는 북향집
실로폰 같은 뿌리들이
똑똑 물방울을 떨군다
꽃 밑으로 뻗어나가는 뿌리 대신
처마 끝에서 고작,
도돌이표로 돌아가는 가난한 음계들
겨울이 흘러내리고 있다
한여름 땅속 열기들이
뿌리 끝으로 빠져나간 흔적처럼
처마 아래 봄을 파종하고 있다
이 뿌리로 겨울을 났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한꺼번에 툭
떨어져 내리는 소리로 겨울은
거푸집을 깬다
미역귀 / 성영희
미역은 귀로 산다
바위를 파고 듣는 미역줄기들
견내량 세찬 물길에 소용돌이로 붙어 살다가
12첩 반상에 진수珍羞로 올려졌다고 했던가
깜깜한 청력으로도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
귀로 자생하는 유연한 물살은
해초들의 텃밭 아닐까
미역을 따고 나면 바위는 한동안 난청을 앓는다
돌의 포자인가,
물의 갈기인가, 움켜쥔 귀를 놓으면
어지러운 소리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물결이 된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흘려쓰는 해초들의 수중악보
흘려쓴 음표라고 함부로 고쳐 부르지 마라
얇고 가느다란 음파로도 춤을 추는
물의 하체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헤엄쳐 온 물의 후음이
긴 파도를 펼치는 시간
잠에서 깬 귀들이 쫑긋쫑긋 햇살을 읽는다
물결을 말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햇살을 만나면 야멸치게 물의 뼈를 버리는
바짝 마른 파도 한 뭇
🍂겨울 숲 / 성영희
겨울 산, 수런대는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물고기들의 을씨년스러운 잔등을 만난다. 꼬리는 하류 쪽으로 꿈틀거린다. 깡마른 나무들이 직립으로 견디는 가잠의 시간들, 고드름이 가시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폭포는 떨어지는 소리들로 얼지 않는다. 튀어나간 물방울들만 빙벽으로 미끄럽다. 뼈를 드러
낸 물고기의 잔등처럼 잎 다 떨어진 나무들이 일렬로 서 있
는 산등성이
나무들의 귀는 일년생이다.
어떤 소리가 저렇게 앙상하게 남아 저희들끼리 입을 만드는가,
수백 년 동안 자란 물고기들이 산꼭대기를 헤엄치고 있다.
능선 지느러미 겨울을 달리고 있다.
물고기들의 조상은 앙상한 나무들이 줄서 있는 저 산등성이다. 얼음장 밑에 귀를 대 보면 넓은 대양의 물이 가는 줄기로 흘러내린다. 봄부터 여름까지 가득 찼던 푸른 정맥을 닫아 버리고 앙상한 팔로 바람을 겪는 지느러미들
아무리 작은 물고기라도 몸속에 가시를 숨기고 있듯 겨울산, 그 끝없는 능선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잔가시들이 공중을 향해 자라고 있다.
활시위를 당기듯 겨울 숲을 당기는 팽팽한 바람에 능선하나 걸린다. 꿈틀거리며 물살을 타는 지느러미들, 겨울이 느리게 날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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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허를 두들겨 빨면 저렇게 흰 바람 펄럭이는 궁전이 된다." 성영회 시의 핵심 기둥은 바로 폐허를 바람 궁전으로 만드는 기법이다. 특히 바람이 많이 등장하는 성 시인의 시는 읽는 사람의 가슴을 훑어 내리면서 아직도 들여다보지 못한 자신의 펄럭이는 마음의 찢어진 깃발을 보게 한다. 그러니 읽는 이의 등뼈가 우렁우렁 우는 것을 그제야 느끼는 반성 촉발의 시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견디다가 급기야 토해 놓는 울음을 다시 되돌려 꾹꾹 누르는 사람의 마음을 능숙한 솜씨로 그려내고 있다. 성 시인의 시는 울적한 세상의 어느 한 부분에 속을 털어놓는 공감의 손잡이가 되리라 본다. 시는 무릇 그런 공감의 연대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것을 또 하나의 빛이라고 말하고 싶다. 빛이 몰려오고 있다. 그렇게 예감하게 한다. - 신달자(시인) -
시를 품는다는 것은 몸에 병을 들이는 것이다. 성영희 시는 끊임없이 세상의 신음을 듣고 고통을 그린다. 시의 눈길과 발길은, 평정을 잃고 우는 만물을 달래어 집으로 데려간다. 길은 모두 집에서 나와 집으로 간다. 자궁이란 집에서 유택이란 집까지 순환한다. 시의 길은 소리의 길이다. 길은 귀로 산다. 시인은 한 손으로 손차양을 하고, 또 한 손으로 귓바퀴를 키워 씨앗 속 새싹의 소리까지 듣는다. 시는 삶을 듣는 귀다. 살림의 시는 "바위를 파고"(미역귀) 바워 가슴에 귀를 새긴다. 귀는 모두 물결 모양이다. 마음을 찾아가는 오래된 길 같다. 성영희 시는 귓바퀴의 물결무늬를 닮았다. "춤추다 굳은 땅은/퇴적도 곡선이다"(「춤」)라는 시구처럼, 그의 시는 불의 고통을 춤으로 바꾸는 '내면의 힘'을 잘 보여 준다. - 이정록(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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