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폭설/오탁번

폭설 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

좋은 시 2023.04.16

통한다는 말/ 손세실리아

통한다는 말/ 손세실리아 통한다는 말, 이 말처럼 사람을 단박에 기분 좋게 만드는 말도 드물지 두고두고 가슴 설레게 하는 말 또한 드물지 그 속엔 어디로든 막힘없이 들고 나는 자유로운 영혼과 흐르는 눈물 닦아주는 위로의 손길이 담겨있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도 통한다하고 물과 바람과 공기의 순환도 통한다하지 않던가 거기 깃든 순정한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사랑해야지 통한다는 말, 이 말처럼 늑골이 통째로 묵지근해지는 연민의 말도 드물지 갑갑한 수통 툭 터 모두를 살려내는 말 또한 드물지

좋은 시 2023.04.16

단 한 권의 生/고영서

단 한 권의 生/고영서 달 비친 沙窓에 한이 많아 꿈 속의 넋에게 자취를 나기게 한다면 문 앞의 들길이 반 쯤은 모래로 되었을라나* 해동조선국 승지 조원의 처 이옥봉은 온 몸에 시를 감고 죽은 여인 여염의 아낙이 되어 지아비 얼굴을 깍아내리는 일 따위, 시 따위 쓰지 않으리라 맹세 했다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는 천형을 앓다 산지기의 누명을 벗기는 시 한 수로 내쳐졌으니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를 떠돌다 겹겹의 종이로 떠올랐으니 하나 같이 빼어난 구절양장이 명나라 원로 대신의 서가에 그렇게도 소중히 꽂혀 있었던것 함부로 언어의 작두를 타다 뼈째 썰리는 고통으로 내림굿이 되는 시 씨김굿이 되는 시 * 이옥봉의 시

좋은 시 2023.04.16

조그만 절집을 찾아갔더니 / 김황흠

조그만 절집을 찾아갔더니 / 김황흠 부처님은 안 계시고 문턱 턱 베고 누운 누런 개가 심드렁히 코를 곯고 있네 텅 빈 놋그릇엔 햇빛만 마지못해 차 있고 먼 바람 소리는 풍경하고나 자처울며 노는데 그런 거 아닐까 삶은 무주공산의 저 문턱을 번질나게 넘으며 부처 대신 개가 핥고 난 가난의 놋그릇이나 훔치어보는 것 그 속에, 기울어가는 햇빛 몇 올로 갇히는 것

좋은 시 2023.04.16

가장 아픈 부위/송경동

가장 아픈 부위/송경동 허리가 아프다 어려서부터 어깨에 지게 된 시멘트 밀가루 포대 물엿 상자 질통 곰빵 산소통 LPG통 알곤통의 무게가 다 허리로 갔다 팔이 아프다 평택 대추리에서 전경들에게 목 졸리며 앓게 된 목디스크 증세다 용산 철거민 투쟁 쫓아다니다 교통사고로 재발했다 무릎이 아프다 여긴 복합골절이다 종일 쭈그려 하던 용접일 탓도 있지만 가두 시위하다 연행되는 과정에서 조인트를 까인 후부터다 하지만 정작 더 아픈 건 굳은 머리와 가슴이다 온몸에 덕지덕지 노동과 저항의 상처를 달고도 더 이상 세상의 외부를 꿈꾸지 않고 자꾸만 개량으로 타협으로 기우는 잔 머리 분노를 잃어버린 냉가슴이다

좋은 시 2023.04.16

화랑게에 대한 반가사유/김경윤

화랑게에 대한 반가사유/김경윤 어제는 평생을 갯가에 산 어머니가 안부 대신 화랑게젓을 한 보시 보내왔다 염천에 밥맛 잃은 나는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스슥 손톱만한 게를 씹다 문득 짭조름하고 달콤한 게젓 국물이 조선간장으로 우린 어머나의 눈물만 같아 먹던 밥숟갈을 내려놓고 우두커니 앉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어머나에게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런 따뜻한 말 한 번 해본 적 없었다 갯벌같이 질퍽이는 세상살이 열 발로 기어가며 알량한 자존심 땜에 체면이란 딱딱한 껍질을 벗지 못하고 그저 속살 없는 화랑게처럼 무심하게 살았을 뿐, 누군가를 위해 눈물 한 번 흘린 적도 없었으니 탈파하며 성장하는 게처럼 나도 이제 딱딱한 허물을 벗고 누군가를 위해 울고 싶구나 짭쪼름하고 달콤한 어머니의 화랑게젓처럼

좋은 시 2023.04.16

동지/신덕룡

동지/신덕룡 폭설이다. 하루종일 눈이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 지워졌다. 눈을 감아도 환한 저 길 끝 아랫목에서 굽은 허리를 지지실 어머니 뒤척일 때마다 풀풀, 시름이 날릴 테지만 어둑해질 무렵이면 그림자처럼 일어나 홀로 팥죽을 끓이실 게다. 숭얼숭얼 죽 끓는 소리 긴 겨울밤을 건너가는 주문이리라. 너무 낮고 아득해서 내 얇은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눈그늘처럼 흐릿해서 들여다볼 수 없다.

좋은 시 2023.04.16

태풍 속에서/최금진

태풍 속에서 최금진 폭우가 쏟아진다 하늘에선 거대한 소용돌이가 다이얼을 돌린다 사내는 구인광고지처럼 저녁의 끄트머리에 서서 펄럭인다 우산대가 꺾인 사람들은 황망히 고개를 숙인다 손바닥 위엔 모종처럼 돋은 푸른 메모지 한장 사내는 있는 힘껏 비를 가리며 전화를 건다 동사무소 꼭대기엔 뭉툭 잘려진 입 하나, 커다란 스피커가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낸 듯 안내방송한다. 모두들 일찍 귀가하시압! 아, 그렇습니까......네, 네, 사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버려진 수화기처럼 웅크리고 돌아선다 손에서 구겨진 메모지가 무섭게 바닥에 달라붙는다 먹구름이 하늘을 두껍게 풀칠해놓고 사내의 이력서 위에 새로운 어둠을 발라놓는다 상가에 켜진 TV들은 눈을 깜빡이며 간단명료하게 이 저녁의 풍경을 정의한다 태풍북상, 그러니 모든..

좋은 시 2023.03.31

솟구쳐오르기/김승희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 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 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 김승희, 「솟구쳐 오르기 2」 ​ 김승희 시인의 ..

좋은 시 2023.03.27

칠월의 연지 /권현숙

칠월의 연지 권현숙(수필가) hsh89-1216@hanmail.net 장맛비의 행짜에 키를 잃어버린 연잎들 까치발로 버티느라 헉헉 숨이 차다. 작달비의 독한 매질을 용케도 잘 견뎠는데 긴 불땡볕의 시간을 또 건너야 한다. 코로나 시국에 지쳐가는 사람들 끝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뿌리없는 말들은 장마철 개구리밥처럼 무성하게 증식하고 바닥난 인내심에 진창이 되어가는 가슴은 연신 한숨만 피워낸다. 사나운 날들이라고 맥없이 시들부들 마냥 처져 내릴 수만은 없는 일 가만히 숨을 고르고 발부리에 힘을 모아 푸른 시간을 다시 피워올려야 한다. 고단한 계절을 지나면서도 꼿꼿하고 청아한 자태를 잃지 않는 연처럼 잘 견디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푸른 믿음을 둥글둥글 펼쳐보여야 하리. 곱고 향기로운 꽃등 환하게 켜들 그날을..

좋은 시 2023.03.17

자전거 소개서 / 이예연

자전거 소개서 / 이예연 빗방울은 등에 지고 땀방울은 지르밟아 가락시장 삼십여 년 공손히 함께해온 온몸에 보푸라기가 훈장으로 매달린 너 골 깊은 허기에도 비상구 없던 외길 숱하게 부대낀 날 짐받이에 걸어두고 힘차게 달리고 와서 숨 고르는 발동무 쭈글해진 두 바퀴에 기운을 넣어주고 다른 데는 괜찮냐고, 아픈 데는 없느냐고 페달과 늑골사이에 더운 손길 얹는다 청지기 받침대가 남은 하루 받쳐 들면 윤나는 안장위에 걸터앉은 가을 햇살 소담한 너울가지를 체인 위에 감는다

좋은 시 2023.03.14

묵은 김치 사설(辭設) /홍윤숙

묵은 김치 사설(辭設) 홍윤숙 묵은 김치독을 부시다가 그것들이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게도 푸른 시퍼렇게 잎이며 줄기 창태같이 푸르던 날 들이 있었더니라 그빳빳하던 사지를 소금에 절이고 절여 인고와 시련의 고추가루 버무리고 사링과 파, 마늘 양념으로 뼈까지 녹여 일생을 마쳤다. 타고난 목숨의 이유대로 이제 창창하던 살과 뼈 다내주고 몇 가닥 뭉크러진 찌꺼기 상한 속으로 남아 오물을 버려진다. 이로써 한 몫.. 한 생을 완성한다. 남은 길 오물로 버려질 쓰레기 한 점 파먹고 버릴 겨울 묵은김치야 한없다.

좋은 시 2023.03.14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서야 김치가 된다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서야 김치가 된다 - 김삼환 순식간에 뽑혀 나와 부르르 떠는 배추 그렇다 분수처럼 절정에서 꺾이는 것 전율은 솟구친 몸이 떨어질 때 오는 거다 증거는 충분하지, 두 쪽으로 배를 갈라 차곡차곡 쌓아 온 이력들을 흔드는 것 오로지 결기(潔己)하나로 한 번 외쳐 보는 거다 소금기가 구석구석 온 몸으로 스며들 때 누구인들 한 번쯤 이렇게 푹 젖다 보면 사나흘 생각이 깊어 돌아갈 수 없는 거다 고추 마늘 온갖 양념을 한 통속에 비벼서 덥고 춥고 맵고 짠맛을 한꺼번에 겪는 것 세상의 눈치 살피며 풀 죽을 수 있는 거다 입 안에서 씹힐 때 마지막 숨 거두며 다섯 번을 죽어서야 맛을 내는 배추처럼 몇 번을 까무러쳐야 시 한 편이 되는 거다

좋은 시 2023.03.14

돌이라는 새/조선의

돌이라는 새/조선의- 하늘이 잘 보이도록 머리를 내밀었다 몸속에 감춘 길은 한낮 궤적일 뿐 스스로 고립될 때까지 수많은 기착지를 떠나와야 했다 밤에 어울리는 어둠은 새 떼의 체온으로 스며들고 발길질에 걷어차인 돌에 날개가 돋아났다 목구멍 깊이 멈춘 숨소리들은 서슬 푸른 뼛속까지 잠을 가둔 채 수천 년을 밤으로 귀결시켰다 나는 가끔 헛발질하는 탓에 날기를 포기했지만 살다가 놓친 것들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방향도 없이 허공의 입김으로 사라진 새들은 바람의 경전을 따랐다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것들의 문맹(文盲) 식욕은 살아 있어야 누리는 특권인가 천년을 먹지 않아도 살아있는 것이 있을진대 시시한 충격으로는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컹거리는 것은 밖의 일이라 생각했지만 살점이 떨어져 나뒹굴도록 부딪치면..

좋은 시 2023.03.13

간고등어/김완수

간고등어 김완수 ‘맛 좋고 싱싱한 안동 간고등어가 왔어요.’ 불시의 택배처럼 동네를 찾은 소리가 내 아픈 유년 시절을 살 바르듯 헤집는다 행여 골목 어귀에서 생선 굽는 냄새 나면 난 이르듯 조르르 어머니에게로 갔고 어머닌 낡은 지갑만 만지고 또 만지셨다 내 유년의 고등어는 유난히 짭조름했다 어머니의 지갑이 더디 열렸을 뿐인데 가난은 소금버캐를 씹듯 짜디짰었다 고등어를 하시면 잘 뒤집으셨던 어머니 어쩌면 내 어머닌 간이 배인 설움으로 비린내 나는 현실을 감추셨는지 모른다 작가 약력: 1970년 광주광역시 출생 1998년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 졸업 2008년 계간지 '시에' 신인상 수필 부문 당선 2009년 제1회 '강원문학' 신인상 수필 부문 당선 2012년 제15회 재생백일장 일반부 ..

좋은 시 2023.03.09

소금 흔적/김현희

소금 흔적 ​ 김현희 ​ 죽은 것들과 친분이 두터운 소금의 용도는 살아 있는 기를 삭제하는 것 ​ 생살을 파고든 염분에 미꾸라지가 은신처의 내력을 발설한다 짜지 않게 싱겁지 않게 소금의 모서리를 껴안은 생선과 채소와 밑반찬 소금 앞에 엎드린 처세술로 수명을 연장한다 짠맛이 들어가야 싱겁지 않은 인생 이자겸의 굴비淈非*, 쉽게 부서지는 비굴이 뒤집힌 짭짤하고 쫀득한 맛이다 모든 간의 배후에는 소금이 있다 짜고 쓴맛으로 끝난 첫사랑, 다음 사랑에 적당한 간을 맞춘다 싱거우면 위험하다 항아리 속 부글거림과 착한남자의 우유부단에 소금이 개입한다 ​ 외부자극에 반응하는 사람 몸속의 소금 싼 맛에 고용된 일용직근로자 늘 소금기에 절어있다 무거운 등짐에 흘린 소금의 흔적이 검은 옷에 하얀꽃을 피운다 ​ 염전이 문을 ..

좋은 시 2023.03.09

소금사막 / 신현락

소금사막 / 신현락 ​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3만 5천년의 시간은 화석이 모래로 전이하는 데 충분한 풍량이어서 학자들이 사막의 발원지를 추정하는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밤마다 모래가 바다에 빠져 죽은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3만 5천년 후, 그 자리는 소금사막의 발원지가 되었다 모래의 여자는 정갈한 소금으로 밥상을 차리고 바람을 기다린다 사막에서 바람을 많이 먹은 종들은 종종 변이를 일으키는데 그들이 사랑을 할 때는 서로의 입안에 소금을 조금씩 흘려보낸다 사랑을 구하기 위해서 남자들이 여자를 찾아오는 건 소금에 중독된 까닭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래의 동선을 보면 최초의 호모사피엔스가 여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바람의 혀는 감미롭게 모래의 능선을 애무하지만 모래의 여자는 모래만 낳을 뿐이어서 몇 만년 동안..

좋은 시 2023.03.08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 ⑪ 두부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 ⑪ 두부 ▶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 ⑪ 두부 ​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는 시인의 시와 짧은 단상으로 이루어진다. 시를 쓰게 되는 지점, 또는 시를 써 나가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수상은 시를 감상하는데 색다른 묘미를 주리라 생각한다. 일상적 삶에서 건져 올리는 시적 성찰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만상의 자연과 사물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시의 몸 안으로 스며드는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다만, 시인의 글과 생각의 흐름에 따라 시가 먼저 또는 단상이 먼저 나올 수도 있다. 단상은 한 두 줄로 짧을 수도 있고 길수도 있다. - 뉴스부산 강경호 기자 - ​ ​ ​ ​ ​ ​ 지금 식탁 위에는 막걸리 한 ..

좋은 시 2023.03.08

소금벌레 / 박성우

소금벌레 / 박성우 ​ 소금을 파먹고 사는 벌레가 있다 ​ 머리에 흰털 수북한 벌레 한 마리가 염전 위를 기어간다 몸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염전 소금물을 일렁인다 ​ 소금이 모자랄 땐 제 눈물을 말려 먹는다는 소금벌레, 소금물에 고분고분 숨을 죽인 채 짧은 다리 분주하게 움직여 흩어진 소금을 쉬지 않고 끌어모은다 땀샘 밖으로 솟아오른 땀방울이 하얀 소금꽃 터트리며 마른다 ​ 소금밭이 아닌 길을 걸은 적 없다 일생 동안 소금만 갉아 먹다 생을 마감할 소금벌레 ​ 땡볕에 몸이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흥얼흥얼, 고무래로 소금을 긁어모으는 비금도 대산염전의 늙은 소금벌레여자, ​ 짠물에 절여진 세월이 쪼글쪼글하다 시와 소금 이영식 소금과 시, 참 많이도 닮았다. 바닷물의 결정체가 소금이듯 시는 언어..

좋은 시 2023.03.08

나무의 공양/이경례

나무의 공양/이경례 졸참나무가 제 몸통을 의탁해왔네 지난 태풍에 겨우 건진 살림살이지만 기와 불사를 생각하며 제 몸 선뜻 내 놓았다네 오래도록 산문의 입구를 지켜 온 졸참나무와 딱따구리, 한참을 골몰한 붉고 노란 머릴 조아리며 하피첩서霞帖書를 떠올리다, 마침내 졸참나무, 거친 한 생의 피륙에다 제가 살아온 산야의 사적비를 짜기로 했네 구족口足 화가가 붓을 입에 물고 넝쿨처럼 뻗어 오르는 푸른 영혼을 펼쳐내듯 한 땀 한 땀이 딱따구리 혼신의 필사 졸참나무 나이테에 누가 바늘을 올렸나 아득한 시간의 엘피판에서 흘러나오는 여든 아홉 암자의 일천성인 득도의 날들과 어느 날 산사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졸참나무의 한 생이 받드는 허공 속으로 무거운 산 울대 오래 공명하는 딱따구리의 필력 노을치마인 듯 소슬히 산야가 제..

좋은 시 2023.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