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31

두부에 대하여/이재무

두부에 대하여 ​ 두부가 둥그런 원이 아니고 각이 진 네모인 까닭은 네모가 아니라면 형태를 간직할 수 없기 때문 저 흔한 네모들은 물러 터진 속성을 감추기 위한 허세다 언제든 흐물흐물 무너질 수 있는 네모 너무 쉽게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네모 가까스로 네모를 유지한 채 행여 깨질까 조심스러운 네모 제가 본래 단단하고 둥근 출신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네모 우스꽝스러운, 장난 같은 네모 지가 진짜 네모인 줄 아는 네모 언제든 처참하게 으깨어질 수 있는 네모 둘러보면 그런 두부 같은 네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 ​ ​ 다시 두부에 대하여 ​ 형기 마친 죄수가 감옥 나설 때 왜 두부를 먹이는지 알겠다. 두부는 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부는 저항을 모른다. 저를 베고 찌르는 칼, 연한 살로 감싸는 두부는..

좋은 시 2023.09.08

첫날/권희돈

첫날 오늘은 그대 남은 날들의 첫날 부디 지난 날의 회한에 물들지 마오 추억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눈꽃 결코 잡히지 않는, 내일을 근심치 마오 희망은 숨어 있는 것 다가서면 멀어지는 신기루 추억은 깃털에 묻고 희망은 별빛에 묻고 밤 새워 한뎃잠을 자고 나온 아침까치처럼 겁도 없이 인간에 내려앉는 저 황홀한 가벼움을 오늘도 반가로이 맞이하시라 오오, 오늘은 그대 남은 날들의 첫날 휴지 더럽다고 함부로 버리지 마라 더러움의 그 근원을 생각하라 안으로 들어가던 모든 순수가 더러움으로 나오는 까닭은 헤아려라 더럽다고 함부로 짓밟지 마라 너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라 눈물 한 방울 나누어 준 적이 있느냐 피 한 방울 나누어 준 적이 있느냐 보아라, 하늘에 뜻을 세운 저 순백의 침묵을 탐욕에 물들지 아니하고 유..

좋은 시 2023.09.07

모과의 건축학/홍계숙

모과의 건축학 홍계숙 봄이 푸른 모닥불을 지피면 잎새 사이 타닥타닥 피어나는 분홍 꽃잎들 이때쯤 나무는 허공의 각도를 측량하고 집짓기를 서두른다 설계 도면을 펼쳐 시작되는 공사 봄이 낙화한 자리에 풋열매로 주춧돌을 놓고 나뭇가지 사이사이 창을 내고 따가운 햇살을 넉넉히 들여놓는다 천둥과 비바람의 외장재, 속으로 삭힌 시고 떫은 시간들과 기나긴 장마를 말려 빚은 내장재로 둥근 집을 완성하는 모과나무 건축가 가장 먼저인 것은 내부의 견고함이다 내벽에 조밀한 향기를 바를 때쯤 건축감리사인 가을이 다녀간다 예리한 눈길을 통과한 둥근 집 꼿꼿이 받아낸 고통의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노란 벽에 배어난 땀방울 진득하다 계절의 모닥불이 사위어가면 찬바람이 바삐 가지를 드나들고 모과는 집 한 채 완성하고 쿵, 나무를 떠나간다

좋은 시 2023.09.07

그리운 댓바람소리 - 김경윤

♧ 그리운 댓바람소리 - 김경윤 - 김남주시인 생가에서 쓸쓸한 마음 달랠 길 없는 날이면 뜨거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리워 봉학리 남주형 집에 간다 덕종이형은 또 어느 집회에 갔는지 빈집처럼 고적한 마당귀 장독대에 쑥부쟁이만 우북하다 그늘 깊은 뒤란에는 살아생전 시인의 죽창이 되고 서슬 푸른 칼날이 되었던 청대나무와 조선솔이 여즉도 푸른 날을 세우고 있다 한때 군불을 지피며 하이네와 네루다를 읽었다던 그러나 지금은 곰팡내 나는 행랑채 빈방에서 늙은 농부의 축 처진 뱃가죽처럼 너덜거리는 흙벽을 마주하고 앉아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에 꽂히는*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 노래를 홀로 불러본다 어두운 골방에서 제 핏줄 같은 실을 뽑아 집을 짓는 거미처럼 혼신의 노래를 부르던 순결한 그 사내들은 다 어..

좋은 시 2023.09.06

불의 경전을 읽다/김경윤

불의 경전을 읽다 김경윤 ​ ​ 누가 한사코 이 먼 이국까지 와서 내 슬픔의 창을 두드리는가 나는 단지 별을 찾아왔을 뿐인데 낭만을 선사한다는 몽골의 별빛 때문에 누추한 게르의 밤을 허락했는데 밤이 깊을수록 바람의 신이 데려간 잠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영하 40도 눈 내리는 자작나무 숲에서는 바람의 악사들이 켜는 모린호르의 노래 게르의 천창으로 쏟아지는 눈송이들 눈물이 되어 불꽃을 적신다 난로의 연통에 불꽃만 날고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 불꽃이 날리는 것은 난로에 장작이 없다는 것 게르에서 겨울밤을 보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지 마음에 불꽃이 없으면 언어는 단지 연기 같은 것 따뜻한 불을 지필 장작 같은 말 한마디 그리운 밤 바람의 신을 추종하는 연기가 허공에 새긴 만자卍字들 밤새 마음에 새기며 타닥타닥 장..

좋은 시 2023.09.06

서울로 가는 전봉준/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좋은 시 2023.09.03

유안진 . 안동(安東)

유안진 . 안동(安東) 어제의 햇빛으로 오늘이 익는 여기는 안동 과거로서 현재를 대접하는 곳 서릿발 붓끝이 제 몫을 알아 염치가 법규를 앞서던 곳 옛 진실에 너무 집착하느라 새 진실에는 낭패하기 일쑤긴 하지만 불편한 옛것들도 편하게 섬겨가며 참말로 저마다 제 몫을 하는 곳 눈비도 글 읽듯이 내려오시며 바람도 한 수 읊어 지나가시고 동네 개들 덩달아 댓 귀 받듯 짖는 소리 아직도 안동이라 마지막 자존심 왜 아니겠는가.

좋은 시 2023.08.19

울고 싶은 마음/박소란

울고 싶은 마음 박소란 그러나 울지 않는 마음 버스가 오면 버스를 타고 버스에 앉아 울지 않는 마음 창밖을 내다보는 마음 흐려진 간판들을 접어 꾹꾹 눌러 담는 마음 마음은 남은 서랍이 없겠다 없겠다 없는 마음 비가 오면 비가 오고 버스는 언제나 알 수 없는 곳에 나를 놓아두는 것 나는 다만 기다리는 것 (하략) ―박소란(1981∼ ) 그 사람 왜 좋아하냐 물어보면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좋은 데에는 이유가 없다. 어느 순간 ‘아!’ 하고 좋아지는 거다. 박소란 시인의 작품은 그렇게 좋아지는 시다. 잔잔하게 다가와 오래 수런거리는 시. 첫 시집 제목처럼 ‘심장에 가까운 말’의 시. 이런 시를 좋아하신다면 박소란 시인이 정답이다. 나도 언제 새 시집이 나오나 서점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특히나 그의 시는 힘들..

좋은 시 2023.08.19

김륭 시

김륭 시 심야深夜 /김륭 달 없이 오는 밤의 젖꼭지를 꺼내던 시골집 앵두나무는 얼마나 발을 헛디뎠을까 동구 밖에 주저앉은 바람을 불러다 눈두덩 꿰매던 어머니 먹감나무 위에 걸어둔 까마귀 얼굴로 밥상 뒤집어 하늘에 시비할 궁리가 남았는지 출몰이 잦아진 거미들이 옭아맨 눈물 다 읽고 나서야 머리맡이 어금니처럼 평평해지는 시간, 다세대주택 옥상에 널어둔 사각팬티가 안정을 찾아가듯 늙어간다는 게 흉흉해지거나 말거나 죄스러워지거나 말거나 구불구불 길을 나서는 화사花蛇의 시간 한 여자의 지아비로 살기엔 너무 늦어버린 몸의 가장 가파른 곳에 도사리고 앉아 밥에게 말을 걸고 싶을 때가 있지 꽃과 살을 섞고 싶을 때가 있지 가뭄 든 논둑의 뱀딸기처럼 등 돌려 우는 딸에게 새끼손가락을 걸 듯 사는 게 고마워지거나 말거나 ..

좋은 시 2023.08.18

모퉁이 수선집 / 박일만

모퉁이 수선집 / 박일만 골목은 늘 객관적이다 희망을 켜 놓은 듯 백열등 밝혀 둔 좁은 공간 의족을 수선실 바깥으로 길게 걸쳐놓았다 바닥까지 검정물 든 손을 탁,탁 치며, 이제 그만 해야죠 그만둬야죠,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초로의 사내 십수년인 듯 굵어진 손마디가 고집스럽다 피곤한 구두를 벗어 수선을 맡기는 저녁 무렵 내 구두는 이제 항해를 끝낸 폐선처럼 어둡다 좀처럼 광택이 살아나지 못할 거죽으로 찌그러져, 능동적이지 못한 내 성품을 비웃듯 손 빠른 사내 해진 일상을 기우고 봉긋한 광택을 생산한다 허리춤을 꾸욱 찌르고 견고한 실로 혈관을 심고 벌겋게 온몸을 지지고 닦아 환하게 빛을 복사해 낸다 속내를 보이진 않지만 손에 친친 광목을 감으며 말하겠지 자, 다시 한번 가면을 쓰고 살아 보세요 그래도 세상은 ..

좋은 시 2023.08.09

모항 / 박일만

모항 / 박일만 잇몸을 활짝 열고 반기는 방파제 안쪽, 문득 그 여린 살 속으로 나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밀어 넣고 싶은 거 있지. 오장육부를 꺼내 짭조름한 해풍에 내다 말려서 빛바랜 세간 밑천 삼고, 내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말이야 큰 삶은 원치 않아. 남은 생 부려놓고 실팍하게 기댈 언덕과 바다로 창을 낸 쪽방 하나면 족해. 은사철 꽃잎 같은 여자 있으면 더더욱 민망하게 좋지. 바다를 껴안고 뼈 삭히는 폐선 하나, 세월 낚는 참선에 득도하겠네. 건재한 어깨 근육을 말리는 무쇠 닻들, 녹슨 몸에서도 무지개 필거라며 뻘건 휴식에 여념없네 아직도 철들지 못한 내 쓸쓸함을 채워주는 30번 국도가 잠시 뒤튼 몸을 고르는 거기 변산 모항바다,

좋은 시 2023.08.09

신문지의 노래/허민

신문지의 노래 ​ 허민 ​ ​ 나를 스쳐간 독자여 지나온 생을 되돌아보는 밤이다 구멍 난 가슴 한쪽 스스로를 위한 작은 부고 기사 하나 실어보지 못하고 결국 이렇게 끝을 맺는 밤이다 낡은 집 바닥에 젖은 채 누워 한껏 페인트나 풀을 뒤집어쓰거나 먹다 남은 짜장면 그릇 따위 덮고 있을 줄 몰랐던 쓸쓸한 밤이다 노숙인의 유품이 되어 그의 마지막 겨울을 나의 마지막으로 덮게 될 줄 몰랐지만 마지막까지 나를 필요로 했고 나는 그의 외로움을 가려주었으니 조금은 괜찮았던 밤이다 생이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으니 내가 한 그루 푸르고 싱싱한 나무였을 적 한 여인이 내게 등을 기댄 채 텅 빈 하늘만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말을 걸기도 했지만 괜찮다, 나쁘지만은 않았지 생각한 밤이다 그녀를 위한 한 권의..

좋은 시 2023.08.02

시래기/도종환

시래기/도종환 ​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일들이다 ​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우기 우해 ​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 겨울 마파람이 부는 ..

좋은 시 2023.07.30

그 男子의 손 / 정낙추

그 男子의 손 / 정낙추 ​ 그 남자의 손은 ​ 무쇠솥 뚜껑보다 크고 투박합니다 ​ 소나무 옹이보다 억센 손마디로 ​ 여린 싹도 키우고 고운 꽃도 피우게 하는 ​ 요술쟁이 손 ​ 그 손박닥엔 딱딱한 못이 박혀 있습니다 ​ 살아 백년 죽어 천년이 지나도 ​ 풀리지 않을 단단한 못 속에는 ​ 서러운 세월을 안으로 삭힌 ​ 땀과 눈물이 고여 있는 걸 아시는지요 ​ ​ ​ 그 남자의 손에서는 ​ 잘 썩은 두엄 냄새와 구수한 곡식 냄새가 납니다 ​ 비누로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 그 냄새는 그 남자가 지쳐 쓰러질 때마다 ​ 일으켜 세우는 신비한 힘입니다 ​ ​ ​ 그 손은 욕심 없는 정직한 손입니다 ​ 이 나라 만백성을 먹여 살리고도 ​ 생색 한번 안 낸 위대한 손입니다 ​ ​ ​ 그 손이 요즘 들어 ​ ..

좋은 시 2023.07.30

수선공의 손 / 맹문재

수선공의 손 / 맹문재 ​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는 우리 마을 구둣방 수선공은 길과 구석에 쌓인 쓰레기 같은 표정이었다 ​ 그러나 나의 구두를 받자마자 오랜 병마에서 살아난 사람처럼 이내 이리저리 뒤집으며 실을 뽑고 찬찬히 가위질을 해댔다 ​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다는 듯 망치로 톡톡 두들기고 볼을 감싸기도 했다 나의 구두는 어느새 수선공의 손안에서 꿈틀거렸다 끄무레한 세밑 하늘이 어둡지 않았고 라디오를 타는 외환 위기 뉴스가 불안하지 않았고 수없이 다가오는 겨울바람도 시리지 않았다 잘 가라는 듯 수선공은 한번 더 구두를 매만지고 내게 건넸다 감쪽같이 변신한 의치(義齒)와 다르게 기운 자국을 당당히 가진 구두 수선공의 손은 어느새 구둣방의 문틈으로 먼 길을 내다보고 있었다 - 맹문재,​『책이 무거운 이유』..

좋은 시 2023.07.30

안부/김시천

안부/김시천, 1956~2018) ​ 때로는 안부를 묻고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이 어딘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 그럴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 사람 속에 묻혀 살면서 사람이 목마른 이 팍팍한 세상에 누군가 나의 안부를 물어준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가슴 떨리는 일인지 ​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깨우치며 산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나는 오늘 내가 아는 사람들의 안부를 일일이 묻고 싶다. ​

좋은 시 2023.07.30

찔 레 / 문정희

찔 레 /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새우와의 만남 손에 쥔 칼을 슬며시 내려 놓았다 선뜻 그에게 탈을 댈 수가 없었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 기내식 속에 그는 분홍 반달로 누워 있었다 땅에서 나고 자란 내가 바다에서 나고 자란 그대가 하늘 한 가..

좋은 시 2023.07.30

유종인 시 모음

수수밭 전별기 - 유종인 ​ 호수공원 철조망 너머로 수수밭 행렬이 지나간다 맨발에, 맨종아리들이다 제자리서 오래 흔들린 저들, 흔들려, 가둘 수 없는 수수 머리다 ​ 머리에 붉은 양파 망(網)을 쒸운 가을, 수수 머리에 든 게 많을수록 시장한 새들의 눈초리, 참극이 모여든다 ​ 홍건적처럼 붉은 양파 망 뒤집어쓴 수수 행렬을 나는 방관하였다 나는 나를 수수방관하여 홑겹의 세상에 묵은 곁을 두었다 ​ 하, 허공의 단두대까지 자라 올라간 수수 머리 홍건족들이여, 흙먼지 이는 그 허망까지 말 달려갈 황야라도 좋았다 ​ 말을 놓치고서야 말이 매였던 자리가 침묵의 그루터기다 ​ 말을 매어야 할 자리에 발이 묶여 내륙 저편은 아득하고 수수 머리만 자꾸 주억거린다 말을 다 하지 못한 피가 수수 발목에 한 모금씩 젖어 ..

좋은 시 2023.07.29

쑥개떡 / 권여원

쑥개떡 / 권여원 외며느리가 되려면 불덩이를 안고 가라던 친정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파릇파릇 쑥이 돋는 봄, 그 집 며느리가 되었다 딸 삼겠다던 시어머니 말씀을 찰떡같이 받아먹던 나는 갈수록 배가 고팠다 가세가 기울자 새사람이 잘못 들어왔다는 말씀에 퍼렇게 쑥물이 들어버린 가슴 시누이들이 이마를 맞대고 쑥덕거릴 때면 나는 바구니를 끼고 쑥을 캐러 바람 부는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떡메로 나를 내리치던 세상 차지게 달라붙고 싶었지만 쉽게 떨어져나갔다 떡고물처럼 주워 먹던 말에 목이 메던 나날 서슬이 퍼런 시어머니 호령에 밤마다 짐을 쌌지만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새벽밥을 지으러 나가면 부뚜막에 놓인, 나를 닮은 쑥개떡 한 접시 한입 깨물면 입에 쫙 달라붙어 아궁이에 쪼그려 불을 지폈..

좋은 시 2023.07.25

겨울 과메기 / 이영옥

겨울 과메기 / 이영옥 바람을 무던히도 되받아치며 너는 그렇게 견디고 있었다. 단련된 맷집으로도 견딜 수 없는 것은 추억이 사라지는 일, 마른 아가미 속에 감추어둔 언약 바람 속에 뱉어내고 내장까지 훑어낸 뱃가죽에 행여 한 점 애간장이 묻어있다 해도 이젠 덮어두자 온 몸에 하얗게 소금 꽃 핀다 붙잡아도 갈 걸 뻔히 알면서도 하얀 손가락 흘리던 파도 아픈 듯 뒤돌아보면 가늘게 떨며 따라오던 구룡포 눈썹 달 줄에 묶인 과메기처럼 매운 바람을 헤엄쳐 스스로 깊은 맛을 품을 때까지 혹한의 중심부로 나를 밀어넣어야 했던 그해 겨울 진눈깨비 뿌려대는 국도를 따라오며 나는 뜻하지 않게 너와의 약속을 깨던 적이 있었다

좋은 시 2023.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