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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쑥개떡 / 권여원

에세이향기 2023. 7. 25. 14:58

쑥개떡 / 권여원

 

외며느리가 되려면 불덩이를 안고 가라던

친정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파릇파릇 쑥이 돋는 봄, 그 집 며느리가 되었다

딸 삼겠다던 시어머니 말씀을 찰떡같이 받아먹던 나는

갈수록 배가 고팠다

가세가 기울자 새사람이 잘못 들어왔다는 말씀에

퍼렇게 쑥물이 들어버린 가슴

시누이들이 이마를 맞대고 쑥덕거릴 때면

나는 바구니를 끼고 쑥을 캐러

바람 부는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떡메로 나를 내리치던 세상

차지게 달라붙고 싶었지만 쉽게 떨어져나갔다

떡고물처럼 주워 먹던 말에 목이 메던 나날

서슬이 퍼런 시어머니 호령에 밤마다 짐을 쌌지만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새벽밥을 지으러 나가면

부뚜막에 놓인, 나를 닮은 쑥개떡 한 접시

한입 깨물면 입에 쫙 달라붙어 아궁이에 쪼그려 불을 지폈고

나는 짐 보따리를 풀곤 했다

손톱에 짙은 쑥물이 드는 동안

열두 해의 봄이 지나고

나도 어머니처럼 쑥개떡을 잘 빚을 수 있게 되었다

가슴에 든 쑥물이 다 빠져나갈 때 쯤

늙으신 시어머니는 분홍보따리에 쑥개떡을 싸서

먼 길을 찾아오셨다

시어머니는 뒤늦게 나를 딸이라고 부른다

 

 

곰치국 / 권여원

 

늙은 시어머니가

곰치국이 먹고 싶다고 조른다

허리 굽은 며느리가 시장에서 사온 팔뚝만한 곰치

뭉개진 콧구멍과 사나운 이빨에서 새어나온

물비린내가 칼끝에 닿으면

숨 끊어진 바다가 도마 위에서 벌떡 일어섰다

파도를 거스리던 성깔은 아가미 사이로 새어나갔는지

못생긴 녀석은 물쿠덩, 젖살만 남았다

 

김치 쫑쫑 썰어 넣고 휘젓지는 마라이

살점 녹으니 한 김만 끓이라이

 

시어머니 어눌한 말을 이제는 흘려들어도 되는 며느리나이

곰치 같은 시어머니가 이제 물컹해졌는지

며느리는 지느러미 없이도 물살을 잘도 헤쳐 나간다

바다를 한 수저 떠 올리면

시든 몸이 어느새 흐물흐물 깨어난다

곰치국 한 사발이 병든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어름산이*/ 권여원

 

허공은 그를 장전하고 있다

 

콩심기와 허궁잽이를 하는 아찔한 묘기에

튕겨나갈 것 같은 그의 몸

외줄이 저글링하듯 사내를 허공으로 던진다

녹밧줄이 활시위를 잡아당기면

부채 하나로 바람의 눈을 명중한 그의 춤사위에

허공은 반으로 갈라진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구름도 함께 출렁이고

구경꾼의 함성도 멍석 위에 깔린다

새들이 외줄에 앉아

창공의 현을 튕기며 날아가듯

사내를 튕겨낸 외줄

지난 해 바람의 발목에 걸린 사내가

땅의 과녁으로 추락한 적 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허공은 그에게 곧 지상

허공이 다시 그를 장전하는 동안

낮달이 조바심으로 지켜본다

늙은 사내는 마지막인 듯 다시 외줄을 오른다

 

또 누군가를 노리기 위해 허공은 탱탱해질 것이다

 

*신의 경지에 다다른 줄타기의 장인을 일컫는 말

 

 

소금성전 / 권여원

 

염전에게 하늘은 신전

너울에 떠밀리던 바닷물이 쉬어가는

마지막 성지였다

소금은 아버지가 기르는 양떼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빛에 궁굴려진

육각의 계명들이 고무판에 새겨져있다

 

소금밭의 주인은 하늘

하늘 한 조각에 바다 한 움큼씩 들여보내라는

말씀대로 꽁무니바람이 물의 둘레를 지킨다

여우비가 잠깐 다녀간 뒤 먹구름이 몰려오면

소금기둥이 된 한 여인의 울음소리 들려오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해주에 소금물을 저장했다

 

아버지의 짜디짠 기도가 무릎을 적실 때

나는 바닷물이 허물 벗는 것을 보았다

 

바다의 영혼이 산다는 염부의 신전

바람에 등을 떠밀려온 새떼구름이

고봉으로 얹은 바다를

외발수레에 몰고 온다

 

햇살이 긁어낸 묵상의 시간이 끝나면

그득한 소금자루를 지고

태양은 뉘엿뉘엿 창고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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