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유종인 시 모음

에세이향기 2023. 7. 29. 19:17

수수밭 전별기 - 유종인

호수공원 철조망 너머로 수수밭 행렬이 지나간다

맨발에, 맨종아리들이다

제자리서 오래 흔들린 저들,

흔들려, 가둘 수 없는 수수 머리다

머리에 붉은 양파 망()을 쒸운 가을,

수수 머리에 든 게 많을수록

시장한 새들의 눈초리, 참극이 모여든다

홍건적처럼 붉은 양파 망 뒤집어쓴 수수 행렬을 나는 방관하였다

나는 나를 수수방관하여

홑겹의 세상에 묵은 곁을 두었다

하, 허공의 단두대까지 자라 올라간

수수 머리 홍건족들이여,

흙먼지 이는 그 허망까지 말 달려갈 황야라도 좋았다

말을 놓치고서야 말이 매였던 자리가

침묵의 그루터기다

말을 매어야 할 자리에 발이 묶여

내륙 저편은 아득하고 수수 머리만 자꾸 주억거린다

말을 다 하지 못한 피가

수수 발목에 한 모금씩 젖어 있다

나무 빨래판 / 유종인

 

세탁기는 베란다에서 웅웅거리며 돌고 있는데
옷 껍데기들만의 혼음混淫이
물살에 휘둘러지고 있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기 직전의 가슴마냥
욕실 한켠에 누워 있는
갈비뼈 한 짝, 저 가난에
내 속옷을 비벼 빨고 싶은 봄날이 있으니

 

새벽에 좌변기에 앉아
저 물맛도 오래 못 본 갈비뼈 위에
내 볼살이라도 덧붙여드리고 싶은데

 

가난은 가난해야 쓸모가 있다는 듯
갈비뼈는 더 갈비뼈답게 닮고 앙상해야
더 많이 때를 닳릴 수 있다는 듯
나무 골이 다 닳아 밋밋한 젖가슴처럼
세월의 자잘한 주름 골 다 평지로 만들어서야

 

아들아, 나는 해탈이 아니라 육탈肉脫이 즐거웠다
닳고 닳은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로
들판의 개뼉다귀와도 노시는 갈비뼈 한 짝의 어머니,
골골마다 당신이 주름잡은 곳 어디 저 빨래판뿐이겠습니까


 

 

 

 

노각

유종인

 

 

노각이란 말 참 그윽하지요

한해살이 오이한테도

노년이 서리고

그 노년한테

달셋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 말,

선선하고 넉넉한 이 말이

기러기 떼 당겨오는 초가을날 저녁에

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

수박 향 같기도 하고

은어銀魚 향 같기도 한

아니 수박 먹은 은어 향 같기도 한

고즈넉이 늙어 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

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

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

아무려나

서로 검불 같은 생의 가난이 울릴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붓한 집 한 채 지어 건네는 맘

사랑이 그만치는

늙어가야 한다는 말 같지요

 

노각이라는 말 늡늡하지 않나요

반그늘처럼 늙어 떠나며

외투 벗어주듯 집도 한 채

누군가에게 벗어줄 수 있다는 거

은어 향서껀 수박향이든

늦여름 거쳐 가을 허공이든

그대 혀끝이나 귓볼에 스친 우박이든

저물지 않는 말간 상념의 맛집

내 욕심을 늙히어 그대에게

집 한 채 물려주고 가는 맛 같은

노각이라는 말 낙락하지요

 

 

시와 시래기

 

 

 

 

   초겨울 바람벽에 십자가의 예수보다 자주 시래기가 걸린다 아랫도리를 칼에 베여 내주고 시퍼런 윗몸만 담벼락에 거니 반그늘에 내걸린 그 쓸쓸한 유명세가 좋다

 

   욕망이 마르는 게 좋다 몸이 말라 다른 생각이 끼쳐 그는 그 넉넉한 품이 좋다 호주머니가 비는 게 좋다 호주머니에 든 내 손의 가난한 궁리가 좋다

 

   설핏한 저녁 햇살에 낡은 벽에 드리운 허깨비 같은 그림자의 흔들림이 좋다

   무얼 썼다고 시인입네 하는 나보다 한마디 말도 없이 푹 삶아지는 네 적멸이 좋다

 

   시는 무어라 잘 안 돼도 시래기는 겨울로 마른다 싸락눈 치는 새벽에 혼자 깨어서 벽에다 몸을 비비며 뭐라 적바림하듯 끄적일 때 아침이 물으면, 바스라지는 입마저 꾹 다물고 마르는 네가 좋다

 

가시와 놀다 

 

봄 장미가 내민 연녹색 가시는 혀와 같아

손가락 끝이 저절로 간다

가만히 손끝이 닿자

그윽이 휠 줄 아는 가시의 봄

 

끝이 뾰족해진 가시 혀는

찌르는 연습과 핥는 연습을 번갈아 한다

 

봄날은

가시에 젤리의 입맛이 감도는 때,

부드러운 촉(燭)으로 피를 내지 않고 살짝 애무해 주는 때,

하나의 생각이 이데올로기로 굳기 전에

이리저리 곰살맞게 연애를 탐문하는 때,

 

멀리 홀로 가는 아픈 이여

그 굽어가는 등을 연녹색 가시 막대로 긁어주면 어떤가

말보다 앞서 나오는 미소는

참 보기 좋은 균열

 

푸른 피가 돌고

연한 놋색의 맘이 말랑말랑할 때

그 가시 그림자마저

숱하게 다쳐 넝마로 부는 바람을 핥느라

그 가시의 혀끝이

다시, 휜다

 

 

 

돌베개

 

 

중국산 큰 낙관석(落款石)엔 해태가 종뉴(鐘뉴)처럼 솟았어도

나는 이걸 바라보는 도장으로나 곁에 두었다

 

너무 큰 도장이라서 마냥 쓸모를 모르겠어도 좋겠거니

얼룩이 박힌 옥돌이라 가만히 모로 눕혀볼 때도 재밌다

 

세로로 긴 이 놈을 가로로 눕혀놓자 짐짓 베개 같았다

때는 바야흐로 모기 눈에 핏발이 서는 여름이었다

 

그때 내 머리는 벌써 이 석물을 가만히 베고는

묵묵하고 소슬한 이 고답(高踏)을 내 뒷배로 삼았다

 

가끔 이 돌덩이를 베고 꾀꼬리 노란 울음이 날래구나

혼자 낮 잠꼬대를 하고 싶은 날도 있었다

 

겨울에는 물렀다가 여름에 찬 베개를 뒷목에 받치니

서늘해지는 기꺼움에 돌에게 고향이 어디냐 묻는 거였다

 

아득함이 고향이고 먹먹함이 그 고향 동구(洞口)라오

돌베개는 어쩌면 내 뒷통수 와 뒷목에 찍는 낙관(落款) 같았다

 

이 신선한 단단한 낙관석이 돌베개로 오지랖을 넓히듯

그대 졸은이 사랑홉다 싶을 때 내 왼팔이 팔베개로 번지는 것이다

 

 

 

 

부추전

 


삼월 삼일날 부추전을 부친 건
어느 혁명의 소사(小史)에도 없는 일,
그럼에도 당신은
오후 4시와 5시 사이에
이 심심한 거사를 부쳐내서는
희고 큰 한 접시 우주에 담아 내놓는구려


야생의 풋것들을 대신하듯
아마 비늘의 궁전에서 모든 아랫도리가 칼을 받아 나온 것들이
이렇게 호주산 밀가루에 버무려
거뭇거뭇 탄 데도 훈장처럼 갖추고 나온 것이
오늘 하루
글이 없는 나를 은근한 사람으로 부추기는구려


당신과 마주 앉아 침묵이 더 자주
젓가락질로 전(煎)을 찢어내는 사이,
세상은 그만큼이나 갈라졌던 국경을 붙여
조금씩 너른 나라로 나아갈 일은 없는가
나는 부추전을 찢어 먹으며 홀로 생각하는구려


더 시들기 전에 어떻게든 구워낸 부추전,
더 파장(罷場)에 들기 전에
마음은 선뜻 어떤 연애의 초록을 뜨겁게 굽자고
방금 옆자리에서 내 영혼과 뺨에
불의 입술을 맞추고 간 전생이
혹 마주앉은 당신인가 하고
당신의 이마에 눈총을 줘보는구려

 

 

 

불탄 집

 

 

사람은 빠져나왔어도

아직 거기

치솟는 불길에 놀란 혼(魂) 같은

제 소름에 겨워 헐떡이는 숨결,

광야로 달음박질치는 가슴을

시커먼 기둥 뒤에 등짝을 기대고 가누고 있나

 

한 집안의 내력을

활활 불태워 자서전을 써내고서야

사라지는 불안증들이 저 안에 있겠다

불꽃이 이리저리 옮겨 붙는 내력들

무너지는 기억의 서까래와 헛말처럼 내려앉는 천장,

화려한 치장의 사연을 그을려버린 벽체여

 

들고나는 발걸음을 일시에 뚝 끊고

터져버린 유리창 너머로

새벽이슬이 기웃거린 뒤 우주의

낭인(浪人) 하나가 꽃베개를 들고 들어가

한숨 잘 주무시고 가는 뒤꽁무니는 다디달다

자물쇠를 물리친 시커먼 동굴 한 마리한테

수양벚나무 하나가

겨울인데도 화사한 슬픔으로 꽃가지 넣는다

 

뭘 모르는 바람은

거기 새삼 불 냄새를 맡겠다고 들어가

코밑이 새카매져 나온다

그을음으로

콧수염을 그리고 나온 바람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농담하는 버릇이 생겼다

바람 잡는다는 말이 그 농담의 시초처럼 분다

 

 

 

솔방울이 거미줄에 걸리듯

 

솔방울 하나가 거미줄에 걸리듯

덩치보다 가벼운 행보,

허공에 한 번 맺혀 볼 만한

또 다른 미련이

또한 열매라서

 

자신을 버리러 가다가

도리어 자신을 얻는

아, 저 호젓한 얽매임

 

무당거미는 저 솔방울이 또한 큰 난제라서

배고픔 속에 막막한 관망,

저 골칫거리를 땅으로 내리면

거기 솔방울만한 허방,

구멍 숭숭한 비탄을 이끌고 가는 거지

 

이 가을에 솔방울만한 얽매임으로

가을 거미도 솔방울도 입이 없는 식구,

가을이 물려주는 단식의 바람을 쐬다

툭, 하고

솔가리와 갈잎 위로 몸을 던지면

거미와 솔방울이 한통속이다

 

솔방울이 거미줄에 걸리듯

못 먹을 것들이 던져 주는 한 생각,

이제 생을 갈아타야 할 우주의 가을,

쓸쓸하니 달달한 생각의 침 고여 오듯

 

 

저수지에 빠진 의자

 

낡고 다리가 부러진 나무의자가

저수지 푸른 물 속에 빠져 있었다

평생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아온 날들을

살얼음 끼는 물 속에 헹궈버리고 싶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

온몸을 물 속에 던졌던 것이다

물 속에라도 누워 뒷모습을 챙기고 싶었다

 

의자가 물 속에 든 날부터

물들도 제 가만한 흐름으로

등을 기대며 앉기 시작했다

물은 누워서 흐르는 게 아니라

제 깊이만큼의 침묵으로 출렁이며

서서 흐르고 있었다

 

허리 아픈 물줄기가 등받이에 기대자

물수제비를 뜨던 하늘이

슬몃 건너편 산을 데려와 앉히기 시작했다

 

제 울음에 기댈 수밖에 없는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둥지인 양 물고기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새벽에 상가 골목을 걸었다

하얀 플라스틱 의자 열댓 개가

층층이 포개진 채

굵은 쇠사들에 묶여 있었다

 

의자 위에 의자가 앉아 있고

의자 위에 앉은 의자 위에 또 다른 의자가

앉아 있는 꼴이 계속 높아진다

 

의자가 제 안에 의자를 앉히는 것보다

사람이 제 안에 사람을 품는 것이 아득해서

새벽에 몰래 잠든 딸애를 안아본다

오래도록 빈 둥지였구나

 

마음을 비우는 것보다

마음을 채우는 것이 더 어려워

빈 의자나 상수리나무 빈 둥지를 볼 때면

하나같이 껍질처럼 포개버리기 일쑤였다

그래

비어 있는 것을 비어 있는 다른 것으로

끝없이 포개버리면 그 끝에

제일 처음 이슬 맞으며 마지막 포개지는

플라스틱 의자 위에 너무 많이

사람들을 포기해온 하느님의

하늘이 엉덩이를 내릴지 모른다

 

교우록 / 문학과지성사, 2005

 

 

 

귤橘

 

 

끝내는,

 

헤어지며 건네는 귤이어라

 

뒤돌아,

 

향기로 재장구치는 귤이어라

 

썩어도

 

나비를 부르는

 

달큰해진 혼魂이라

 

답청 (유종인 시조집) / 나남, 2021

 

 

 

너무 늦은 가을


이제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없게 돼버렸다
기억마저 잇몸이 들떠 아프다

누군가, 마지막 여름의 가래를 길게 돋워
모래땅에 뱉는다 모래알들이
좋다고 가래침에 둥글게 달라붙는다

여름날 보았던 미친 여자는 貞操한 맏며느리가 돼 있었다

먼지 낀 좌판에는
철 지난 과일들이 不安으로 더 윤기가 돌았다

무슨 過去를 기억했는지
새떼들이 눈 딱 감은 채 낄낄거리며 날아가고 있다

포경수술을 마친 아이의 性器 끝에서 고름이
일찍 져버린 가을꽃처럼 말라붙어 있다
붉은 무덤엔 양귀비꽃들 마른 씨들과 함께 피었다

피임하듯 흔적 없는 戀愛, 바람의 欄干에 허리를 기대고 섰다

상수리나무, 상수리나무 주문처럼 천 번을 중얼거렸다
겉껍질을 벗어난 알몸의 상수리 열매
갈잎의 私娼街 속에 쏙 숨어버린다

병신, 그것도 못해!
개 두 마리 서로 반대 방향을 한 채, 낑낑거린다
떨어지려 할수록 쾌감은 붉은 혀를 뽑아내고 있다

돌아오는 길, 늙은 거지를 만났다
그는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만 같다 더러움이
그의 비밀을 잘 품어준 것만 같다 둥지!

애인 대신, 입술이 쪼글쪼글한 모과 하나를 호주머니에 품고 왔다



교우록

눈이 내렸다
어둠 속에서
말 못할 것들이 흩날렸다

내리는 눈은
친구가 아니라서
바닥에 쌓이거나
행인의 발길에 밟힐 것이다

내리는 눈 속에서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문밖에 나와 있다

호랑이 한 마리 나타나 울부짖으면
내린 눈들이 화들짝 놀라
하늘 속으로 눈 내리러
다시 올라갈 것만 같았다

친구는, 내려오는 친구는
저렇게 하얗고 속절없이 많아도
다 내가 더럽혀야 할 눈이었다

내리지 않는 눈이
가장 순수한, 착한 눈이었다
친구는
죽은 친구가,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다

이미 치워진 눈과
치워진 눈 위에 밤을 새워 내리는 눈과
이미 눈 녹은 물로 내 신발을 적시는 눈과
눈을 뭉치며 달아나는 친구의 뒤통수에 정확히 박히는 눈과
말없이 뒤란 그늘 속으로 숨어드는 눈과 함께
친구는, 죽은 친구가 제일 착한 친구였다
 

교우록 / 문학과지성사,2005

 

 


나무 빨래판


세탁기는 베란다에서 웅웅거리며 돌고 있는데
옷 껍데기들만의 혼음(混淫)이
물살에 휘둘러지고 있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기 직전의 가슴마냥
욕실 한켠에 누워 있는
갈비뼈 한 짝, 저 가난에
내 속옷을 비벼 빨고 싶은 봄날이 있으니

새벽에 좌변기에 앉아
저 물맛도 오래 못 본 갈비뼈 위에
내 볼살이라도 덧붙여드리고 싶은데

가난은 가난해야 쓸모가 있다는 듯
갈비뼈는 더 갈비뼈답게 닮고 앙상해야
더 많이 때를 닳릴 수 있다는 듯
나무 골이 다 닳아 밋밋한 젖가슴처럼
세월의 자잘한 주름 골 다 평지로 만들어서야

아들아, 나는 해탈이 아니라 육탈肉脫이 즐거웠다
닳고 닳은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로
들판의 개뼉다귀와도 노시는 갈비뼈 한 짝의 어머니,
골골마다 당신이 주름잡은 곳 어디 저 빨래판뿐이겠습니까



껍질의 길

어제 벗겨 먹은 귤껍질이
방바닥에 뒹굴고 있다 쪼글쪼글
점점 더 말라가고 있다

틀니를 들어내면 합죽이가 되는 어머니를
오랜만에 꿈속에서 만났다 온갖 가재도구며
잡동사니를 내다 마당에서 태우신다
모두 껍질인 거라 살다보면 껍질에 둘러싸여
알맹이 하나 찾는데 껍질이 태산 같구나
이놈의 태산을 또 태우는데 불의
껍질이 얼마나 기일게 연기를 피우는지
전생(前生)의 눈알까지 맵고 눈물의 껍질이 또 한 겹 벗겨진다

어머니가 열매로 맺은 껍질, 나는
또 한 겹의 꿈에 싸여 어머니의 꿈을
까먹었지만, 되돌아보면 늘 껍질로 기일게
늘어나 있는 길들이 어떤 열매의 속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 마지막 씨눈을 파먹고 날아오르는 하늘의
껍질인 새떼들

귤껍질 속의 바다가 쪼글쪼글하게 마른
방바닥에 앉아 보면, 태산이
상수리 열매 하나를 감싸는 껍질로
날로 푸르러지고 있다는 것도





미루나무


바람 불어 길게 휘어지는 미루나무,
허리 아래까지 흔들리며
허공의 화선지 깊이 눌러 써대는 저 필력(筆力)

아무리 휘갈겨 써본들
아무리 파지를 낸들
하늘엔 기러기떼 지나간 흔적도 남지 않는다

태풍이 와 허리가 꺾이고
사철 붓을 쥔 흙의 손아귀힘이 빠질 때
초록에 단풍을 묻힌 것도 한 필법인가

죽은 미루나무 붓을 씻는 늦가을 저녁비,
초록의 붓털에서
쓰르라미 소리 쏟아지는 여름날이
삭정이 붓털로 빠져 근심하던
까치는 다시 제 집에 꽂아 쓰자고 물어 올리고

마른 우듬지 위에 흰 눈이 묻어온다
허공에선 죽은 나무의 운필이 너무 고요하다
모지라진 미루나무 독필(禿筆)은 불쏘시개로 쪼개진 뒤
아궁이 속 불길로 휘갈겨지는 초서체(草書體)들

지붕에 꽂힌 굴뚝 필봉(筆鋒)에 연기의 필체가 흐리다



촉지도(觸地圖)를 읽다.                      

휠체어 리프트가 선반처럼 올라간 뒤
역 계단 손잡이를 가만히 잡아본다
사마귀 그림자들이 철판 위에 돋아있다

사라진 시신경을 손끝에 모은 사람들,
입동(立冬) 근처 허공중엔 첫눈마저 들끓어서
사라진 하늘의 깊이를 맨얼굴로 읽고 있다

귀청이 찢어지듯 하행선 열차소리,
가슴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기억의 레일
누군가 밟고 오려고 귓볼이 자꾸 붉어진다

나무는 죽을 때까지 땅속을 더듬어가고
쉼 없이 꺾이는 길을 허방처럼 담은 세상,
죄 앞에 눈 못 뜬 날을 철필(鐵筆)로나 적어 볼까

내 안에 읽지 못한 요철(凹凸)덩어리 하나 있어
눈귀가 밝던 나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몸,
어머니 무덤마저도 통점(痛點)의 지도(地圖)였다.



기침 소리

씁쓸한 낮거리 얘기란다
그가, 한낮의 사창가를 거닐다가, 잡혀 들어가듯
한낮에도 밤인 그녀의 방, 배 위에 배를 얹고
아랫도리를 놀리던 순간, 신음 소리 뒤에
억눌린 잔기침 소리가 간간이 올라오더란다
섹스가 집중이 아니 되더란다 아래 사람의
잔기침 소리가 자꾸자꾸 귀청을 밞아와
무슨 꾸지람처럼 그의 몸으로 전해 오더란다
그녀의 배는 어는 순간 사라지고 저 혼자
지구라는 땅별하고 흘레붙고 있는 것 같아
말없이 땀 흘리며 외로워지더란다
잔기침 소리를 지우려고 더욱더 거짓 신음 소리가
애쓰듯 기침 사이사이에 피어나더란다
일 마치고 환한 대명천지에 드러나 보이는
유곽이, 폐가된 꽃 대궐 같더란다 기침 소리
온몸으로 전해 듣고 나오니
화대가 아니라 약값을 주고 나온 것 같더란다
어느새 봄꽃들 다 범하듯 덮어버린 초록 잎새들만
바람에 가랑이 벌렸다 오므리는 그 사이로
밭은기침을 내보내던 앙상한 그녀의 아랫도리 같은
묵은 줄기가 못 볼 것처럼 자꾸 눈에 밟히더란다

 

 

 

 

가을 춘란


 

가을날 연신내에 옛집처럼 들렀더니
야채 파는 노점상이 여벌로 파는 춘란,
떨이로 품에 안으니
눈시울이 젖어드는


들판의 바보여뀌 흔들며 능놀다가
가을빛이 만보계로 재보다가 그만둔 바람,
춘란 잎 흔들다 말고
까무룩 졸고 있네


화분에도 들지 못해 이끼에 싸인 춘란,
중심을 놔두고서 변두리를 아낀 나여,
술 취해 허리에 찬 춘란
가을 막차같이 탔네

교우록 /  문학과지성사, 2005

 

 


팝콘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꽃,

꽃은 열매 속에도 있다

 

단단한 씨앗들

뜨거움을 벗어버리려고

속을 밖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내 마음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

창문 깨고 투신하듯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 때

꽃이다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속을 뒤집었다밖이

안으로 들어왔다안은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꽃은

견딜수 없는 嘔吐

 

나는 꽃을 집어먹었다

 

 

눈과 개

 

눈이 오는데

나에겐 개가 없다

 

함박눈이 오는데 풀어줄 개가 없는 건

세상에

눈물이 비치는 外道가 없다는 거다

 

풀어준 쇠사슬은 시멘트바닥에 쩍쩍 얼어붙어도

소나무가 이리저리 허리를 뒤트는

지구 저편 언덕까지 돌다오라

 

눈밭에 가면

개야개야개야개 아닌 게 없는 개야

오종종 오종종 개발자국 꽃밭이 한창이다

 

개 하나로 성스러운 개야

함박눈 허공에 앞발을 높이 쳐드는

神命 하나만은 혁명인 개야

네 몸 속의 심장사상충마저 기뻐 날뛰는 개야

 

함박눈이 오는데

개를 풀어주는 건

사랑의 들판이 어디까지인가 꼬리쳐 헤매라는 것

 

눈 온 날 천지가 新婚인 개야

모든 인간의 악담을 대신 받아 모신

눈이 오면 인간의 굴레가 풀리고

오직 너 하나만 살린오로지 개 하나뿐인 개야

 

 

 

 

신발 베개

 

1

 

다리가 아팠다

숲길에는

버력돌이 닳고 닳은 이마를 보여주어도,

나는 한 숨 고요의 丹靑 같은

낮잠을 얻기로,

 

걸어온신발 밑창을 서로 대면하듯 맞붙여 베고는

귀에 걸리는

냄새의 野史를 열 개의 발가락보다 더

많이 귓바퀴에 걸어보는 것인데

 

2

 

멀리

당신이,

아주 머얼리 가신다 했을 때

그 신발들을

나는 蛇足인냥 그러모아 태웠으니

 

어머니발가락 냄새

아버지발꼬락 냄새

당신발바닥에 어린 내 발바닥 맞춰보며 웃던 일

있었는가 몰라도

 

풀밭 지나 너덜 지나

신발을 베고 누우면

뒷목에 차오르는

먼저 간 신발들의

낮은 말소리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를 보다


버드나무는 우듬지가 보이지 않는다.
치렁치렁한 줄기 가지로 옅은 바람을 탄다
흰 말이 곁에 있었지만
수양인지 능수인지 모를 버들은 말을 건드리지 않는다

말은 예민한 짐승잘못 건드리면
주인도 태우지 않고 먼 들판으로 달아난다
거기서 말의 고삐와 안장은
들꽃들의 우스갯거리에 불과하다
이 흰말에 죽은 말벗을 태우려 했나니 이 흰
말의 잔등에 앉아 영원을 달리려 했더니

버드나무는 고삐도 없이 수백 년 한자리에 묶이고
잠시 매인 흰 말은 무료한 투레질로
오월 허공에 뜬 버들잎에 허연 침버캐를 묻힌다
가만히 버들가지가 말의 허리를 쓸어준다
흰 말은 치뜬 눈동자가 고요해지며 제 눈의 호수에
버들잎 몇 개를 띄어준다 눈이 없는
버드나무는 말의 항문을 잎 끝으로 간질이자말은
()이 안 든 허공에 뒷발질을 먹인다 허공은 죄가 없으므로
멍이 들지 않는다 뼈가 부러지지도 않는다

주인이 오지 않는 흰 말과 버드나무
사이에 능수(能手)와 능란(能爛)의 연리지(連理枝고삐 끈이 늘어진다
버드나무는 오히려 짐승처럼 징그럽고
흰 말은 꽃 핀 오두막처럼 고요하다
친연(親緣)의 한나절이 주인을 빼먹은 일로 갸륵하다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공재 윤두서의 그림.보물.

 

 

 

 

창경(鶬鶊)



봄볕이 좋아
영혼의 내장까지 환히 비춰질 거 같네
거기 전생을 밟고 온
징검돌에 이끼가 파르라니 돋아서
이젠 머리를 괴고
낮잠을 다독이는 석침(石枕)으로 쓰려는데
봄볕이 좋아
꾀꼬리 소리가 맴도네
슬픔까지는 너무 처지고
웃음까지는 너무 날래서
그냥 한 꾸러미 명랑이 날개를 달았다 싶네
그것도 샛노란 판본(板本)을 하고
나온 저 허공의 생색(生色)이려니
겨우내
군동내 나는 허공이 엉덩이로 지긋이 뭉개고
주니가 든 앙가슴으로 얼러 내놓은
샛노란 명랑이려니 싶네
봄볕이 좋아

      

 

 

이끼 2

  

 

그대가 오는 것도 한 그늘이라고 했다

그늘 속에

꽃도 열매도 늦춘 걸음은

그늘의 한 축이라 했다

 

늦춘 걸음은 그늘을 맛보며 오래 번지는 중이라 했다

 

번진다는 말이 가슴에 슬었다

번지는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옛날이 아직도 머뭇거리며 번지고 있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랑의 옛말,

여직도 청맹과니의 손처럼 그늘을 더듬어

번지고 있다

 

한끝 걸음을 얻으면 그늘이

없는 사랑이라는 재촉들,

너무 멀리

키를 세울까 두려운 그늘의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사랑이라는 옷을 아직 입어보지 않은

축축한 옛말이지만

      

      

파초(芭蕉숲으로 가다

 

1.

파초 숲에 가니

지난밤 비바람에 꺾인 파초 잎이 배를 깔았다

 

나는 먹물을 대령하고

쥐수염붓을 바랑에서 꺼냈다

 

어머니 당신 이름을 써 보니

빗방울이 모여 파초 잎맥을 따라 눈물처럼 구른다

파초에 새로 오신 당신,

오늘 생신이라고 나는 축 자를 밥상처럼 납작하게 쓴다

 

어머니 앞에서 고민은 장난 같다

초록 옷에 검게 머리를 물들이고 오신 어머니,

그 말씀 그 눈빛이 슬프고 수려하니

이게 살아 있는 신령인가

 

2.

나보다 앞서간 숨탄것들 이름을 써 보듯

이 붓을 남기려 수염을 보탠 쥐들의 이름도

생쥐부터 시궁쥐까지 바람 냄새 가득한 들쥐도 함께

떡잎 같은 쥐의 귀까지 그리듯 써 본다

 

그대를 떠올릴 때는

그 눈을 바로 그릴 수 없어 눈썹을

버들눈썹의 고요한 그늘을 가만히 흘려 본다

그러면 그대 눈이 고요히 나를 눈부처로 담으리

 

곁을 따라온 개가 내 파초 잎 낙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어령칙한 전생을 떠올리듯 심각하게 또 물끄러미 바라보니

나는 오동잎 지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라고 쓰고

개의 왼발을 먹물에 담가 낙관(落款)하니

개는 어리둥절한다

 

가끔 물초가 된 가마우지 소리를 흘려 쓰면

파초 잎에 물비린내가 번진다

 

어느 날 산기슭에서 데려온 돌의 이마를 쓰니

파초에 그늘이 드리우는 듯

그러나 먼 우레 소리로 돌의 등짝을 밀어내니 가붓하다

그래도 뭔가 섭섭한가

사랑을 다 짓지 못한 저 섬 같은 돌은

부처님 머리 육계(肉髻같아서 이를 어쩐다

 

3.

다시 물어보고 싶은 사람들

다시 캐 보고 싶은 비밀들

마음은 다 살고도 남고 다 지나오고도 남는 파도 소리 같은 거

파초 잎에 아직 들키지 않은 소낙비 소리가 잔귀 먹어 남은 거

그런 미련 같은 거 가만히 받자하는 파초 잎

쥐수염붓이 망설이는 것

그건 종지부를 찍을 수 없는 설렘 같은 것

 

전생으로부터 흘러온 당신이란 끌림 같은 거

포개듯 파초 잎에 쓰고 써 보니 까만 점이 되는 것

그것이 당신 눈동자라는 걸 아는 것

 

그러나 파초 잎에 듣는 비꽃들

나보다 먼저 물초가 되는 글자들

검은 눈물로 파초 잎을 떠나는 이여

파초 잎은 아마도 샛강에 가려는가

옴두꺼비 두 마리 싣고 신행길 보내 주러 가고 싶은가

여우비보다 먼저 쥐수염붓을 걷고

나는 파초 우산을 쓰고 강으로 왼 어깨가 젖어 가고 싶은가

  

 

 

 

솔방울이 거미줄에 걸리듯

 

솔방울 하나가 거미줄에 걸리듯

덩치보다 가벼운 행보,

허공에 한 번 맺혀 볼 만한

또 다른 미련이

또한 열매라서

 

자신을 버리러 가다가

도리어 자신을 얻는

저 호젓한 얽매임

 

무당거미는 저 솔방울이 또한 큰 난제라서

배고픔 속에 막막한 관망,

저 골칫거리를 땅으로 내리면

거기 솔방울만한 허방,

구멍 숭숭한 비탄을 이끌고 가는 거지

 

이 가을에 솔방울만한 얽매임으로

가을 거미도 솔방울도 입이 없는 식구,

가을이 물려주는 단식의 바람을 쐬다

하고

솔가리와 갈잎 위로 몸을 던지면

거미와 솔방울이 한통속이다

 

솔방울이 거미줄에 걸리듯

못 먹을 것들이 던져 주는 한 생각,

이제 생을 갈아타야 할 우주의 가을,

쓸쓸하니 달달한 생각의 침 고여 오듯

 

 

 

교우록

  

 

눈이 내렸다

어둠 속에서

말 못할 것들이 흩날렸다

내리는 눈은

친구가 아니라서

바닥에 쌓이거나

행인의 발길에 밟힐 것이다

 

내리는 눈 속에서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문밖에 나와 있다

 

호랑이 한 마리 나타나 울부짖으면

내린 눈들이 화들짝 놀라

하늘 속으로 눈 내리러

다시 올라갈 것만 같았다

 

친구는내려오는 친구는

저렇게 하얗고 속절없이 많아도

다 내가 더럽혀야 할 눈이었다

 

내리지 않는 눈이

가장 순수한착한 눈이었다

친구는

죽은 친구가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다

 

이미 치워진 눈과

치워진 눈 위에 밤을 세워 내리는 눈과

이미 눈 녹은 물로 내 신발을 적시는 눈과

눈을 뭉치며 달아나는 친구의 뒤통수에 정확히 박히는 눈과

말없이 뒤란 그늘 속으로 숨어드는 눈과 함께

친구는죽은 친구가 제일 착한 친구였다

 

 

 

진눈깨비

어느 캄캄한 하늘 저쪽 문밖이었을 거다
눈과 비가
서로 어깨를 걸고
대문만 남은 집 마당에 서서
지상에 내려오기로 맘먹었던 것은

눈과 비, 두 혈육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가 먼저 떠날 수 없다는 걸 안 순간,
샴쌍둥이처럼 동시에
지상으로 헛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기꺼이 내딛는 헛발들로
그들은 천 개 만 개의 몸뚱어리로 산산이
캄캄한 허공에 줄 없는 주렴처럼
매달려 내려왔으나

그들은 서로 모른 척
한쪽 날개를 다친 두 새를 묶어놓은 듯
서로의 어깨를 걸고 이
새벽 오줌보를 줄이러 일어난 내게
창문 너머 눈보다 빠르게
비보다 좀 느리게 퇴짜 맞은 사랑처럼 울며 내려온 거다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부/김시천  (0) 2023.07.30
찔 레 / 문정희  (1) 2023.07.30
쑥개떡 / 권여원  (1) 2023.07.25
겨울 과메기 / 이영옥  (0) 2023.07.25
이 맛있는 욕!/이가을  (0) 2023.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