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찔 레 / 문정희

에세이향기 2023. 7. 30. 00:02

찔 레 /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새우와의 만남  

  

                 

손에 쥔 칼을 슬며시 내려 놓았다

선뜻 그에게 탈을  댈 수가 없었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 기내식 속에

그는 분홍 반달로 누워 있었다

 

땅에서 나고 자란 내가

바다에서 나고 자란 그대가

하늘 한 가운데 3만 5천 피트

짙푸른 은하수 안에서 만난것은

오늘이 칠월 칠석 이어서가 아니다

그대의 그리움과 나의 간절함이

사람의 눈에는 잘 안보이는

구름같은 인연의 실들을 풀고 풀어서

드디어 이렇게 만난 것이다

 

나는 끝네 칼과 삼지창을 대지 못하고

내가 가진것 중에 가장 부드럽고 뜨거운

나의 일술을 그대의 알몸에 갖다 대었다

내사랑 견우여

 

<부부>,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 꽃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 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나의 아내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 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잔을 끓여다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 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손의 고백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손이 언제나 욕망을 쥐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는 말도 거짓임을 압니다

솨아솨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무엇을 쥐었을 때보다

그저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음을 압니다

처음 다가든 사랑조차도

그렇게 흘러보내고 백기처럼

오래 흔들었습니다

대낮인데도 밖은 어둡고 무거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본 사람은 압니다

아무 욕망도 없이 캄캄한 절벽

어느새 초침을 닮아버린 우리들의 발걸음

집중 호우로 퍼붓는 포탄들과

최신식 비극과

햄버거처럼 흔한 싸구려 행복들 속에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매장된 동물처럼

일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어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솨아솨아 흘려보낸 작은 오솔길이

와락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 / 문정희

김포공항을 떠날 때 나는 등 뒤에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왔다

남편의 사진은 옷장 속에 깊이 숨겨두었고

이제는 바다처럼 넓어져서

바람소리 숭숭 들려오는 넉넉한 나이도

기꺼이 주민등록증 속에 끼워두고 왔다

그래서 나는 큰 가방을 들었지만

날을 듯이 가벼웠었다

내가 가진 거라곤 출렁이는 자유,

소금처럼 짭잘한 외로움

이거면 시인의 식사로는 풍족하다

그런데 웬일일까

십수 년 전에 벌써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우리 할머니와 우리 어머니가

감쪽같이 나를 따라와

내 가슴 깊숙이 자리 잡고 앉아

사사건건 모든 일에 간섭하고 있다

 

몸이 큰 여자/문정희

저 넓은 보리밭을 갈아엎어

해마다 튼튼한 보리를 기르고

산돼지 같은 남자와 씨름하듯 사랑을 하여

알토란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는

탐스런 여자의 허리 속에 살아 있는 불

저울과 줄자의 눈금이 잴 수 있을까

참기름 비벼 맘껏 입 벌려 상추쌈을 먹는

야성의 핏줄 선명한

뱃가죽 속의 고향 노래를

젖가슴에 뽀얗게 솟아나는 젖샘을

어느 눈금으로 잴 수 있을까

몸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지*

식사 때마다 밥알을 세고 양상추의 무게를 달고

그리고 규격 줄자 앞에 한 줄로 줄을 서는

도시 여자들의 몸에는 없는

비옥한 밭이랑의

왕성한 산욕(産慾)과 사랑의 노래가

몸을 자신을 태우고 다니는 말로 전락시킨

상인의 술책 속에

짧은 수명의 유행 상품이 된 시대의 미인들이

둔부의 규격과 매끄러운 다리를 채찍질하며

뜻없이 시들어가는 이 거리에

나는 한 마리 산돼지를 방목하고 싶다

몸이 큰 천연 밀림이 되고 싶다

 

화살 노래 / 문정희

이 말을 할 때면 언제나

조금 울게 된다

너는 이제 물보다도 불보다도

기실은 돈보다도 더 많이

말(言)을 사용하며 살게 되리라

그러므로 말을 많이 모아야 한다

그리고 잘 쓰고 가야한다

하지만 말은 칼에 비유하지 않고

화살에 비유한단다

한 번 쓰고 나면 어딘가에 박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날카롭고 무성한 화살숲 속에

살아있는 생명, 심장 한 가운데 박혀

오소소 퍼져가는 독 혹은 불꽃

새 경전(經傳)의 첫 장처럼

새 말로 시작하는 사랑을 보면

목젖을 떨며 조금 울게 된다

너는 이제 물보다도 불보다도

돈보다도 더 많이

말을 사용하다 가리라

말이 제일 큰 재산이니까

이 말을 할 때면 정말

조금 울게 된다

벌레를 꿈꾸며 / 문정희

한번쯤 벌레를 꿈꾼 적이 있다면

이제 책벌레보다 애벌레가 되고 싶네

검은 활자를 갉아먹고

홀로 꿈틀거리며

집 한 채도 짓지 못하는 책벌레보다

휘청거리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초록 잎을 뗏목 삼아

하늘을 기어가는 애벌레가 되고 싶네

돈벌레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겁이 나고

열매란 열매는 죄다 먹어치우고

모든 곳에 구멍을 뚫어놓는

식욕도 두려워

한번쯤 벌레를 꿈꾼 적이 있다면

이제 애벌레가 되고 싶네

결국 사랑하는 이의 심장 속에 사는

작고 아름다운 각시별 같은

 

토요일 오후 / 문정희

신촌문고에 가서 책 일곱 권을 사 들고 오니

세상이 온통 내 손안에 있는 것 같다

책 속에 길이 있다지만 길은커녕

백 원짜리 동전 하나 보이지 않는 책을 사 들고 오며

밥 먹지 않아도 괜히 배부르다

김장 담그신 후

항아리를 쓰다듬던 어머니의 뿌듯한 손이 된다

이제 지구는 구석구석 다 시장이 되어 있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다 가격표를 붙여놓았다

그리고 가장 가볍게 가장 간단히 쓰고 버리는 것에다

정신없이 돈을 지불한다

그래서 책은 더욱 쓸모없고

보이지 않는 것만 유독 강조하지만

토요일 오후

무겁고 복잡하기만 한 책을 사 들고 오며

세상이 모처럼 아기 숨소리처럼

새근새근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이 뭉클함으로 깨를 볶으며

며칠을 살 궁리를 한다

전기밥솥 스위치를 누르는 것도 잊어버리고

나는 서둘러 차를 끓인다

책상 위 스탠드의 불을 환히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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