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용접 / 이석현

용접 / 이석현 온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 있지 보안경 너머로/ 삼천도 불꽃물의 길을 터주면 두툼한 방열복 속으로/ 후끈 스며들던 고열의 마음들 서로 녹아 넘치도록 혼절해야만 한 몸 되는 힘겨운 접목/ 뼈와 살을 녹여내는 아픔을 나눈 후 태어난 신생 기억을 가로지르는 고압선에서 나온/ 수많은 불티들을 온 가슴으로 막아내다가 지나온 길을 더듬어 균열을 살핀다. 마음과 마음을 묶는 일이/ 얼마나 뜨거운 일인지 시뻘겋게 달아 온 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가 있지. - 시집 『둥근 소리의 힘』 (문학만, 2010) . 금속재료를 접합하기 위해 접합부에 금속을 가열 용융시켜 서로 다른 두 재료의 원자결합을 재배열 결합시키는 것을 용접이라 하고, 용접결과의 좋고 나쁨을 ‘용접성’이라고 한다. 오래 전 성수..

좋은 시 2023.05.31

골목의 각질 / 강윤미

골목의 각질 / 강윤미 골목은 동굴이다 늘 겨울 같았다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었다 누군가 한 사람만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공용 화장실이 있는 방부터 베란다가 있는 곳까지, 오리온자리의 1등성부터 5등성이 동시에 반짝거렸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표현처럼 구멍가게는 진부했다 속옷을 훔쳐가거나 창문을 엿보는 눈빛 덕분에 골목은 활기를 되찾기도 했다 우리는 한데 모여 취업을 걱정하거나 청춘보다 비싼 방값에 대해 이야기했다 닭다리를 뜯으며 값싼 연애를 혐오했다 청춘이 재산이라고 말하는 주인집 아주머니 말씀 알아들었지만 모르고 싶었다 우리가 나눈 말들은 어디로 가 쌓이는지 궁금해지는 겨울 초입 문을 닫으면 고요보다 더 고요해지는 골목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인기척에 세를 내주다가 얼굴 없는 가족이 되기도 ..

좋은 시 2023.05.31

마늘을 까며/이광

이광 마늘을 까며​ 껍질을 벗겨내면 드러나는 뽀얀 속살/우리가 원하는 건 겉이 아닌 속이지만/수북이 쌓인 껍질도 제 할 일 다한 은빛//손끝에 스며든 진 은근히 아려올 때/골목시장 한 모퉁이 쪼그려 마늘 까던/아낙네 몸에 밴 수고 알싸하게 떠오른다/한 점 마늘처럼 엮여 있는 하루하루/쭉정이만 이리저리 흩어놓은 시간 앞에/이 빈손 허무했겠다/마늘마저 안 깠으면 「​당신, 원본인가요」(2022, 시와소금) ‘마늘을 까며’는 소박한 생활시조다, 그렇지만 삶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 있다. 마늘은 식생활에 요긴한 재료다. 많은 요리에 맛을 내는 역할을 한다. 몸에도 이로운 식품이다. 보통은 깐 마늘을 구입하지만 이 작품의 화자는 마늘을 까고 있다. 그래서 껍질을 벗겨내면 드러나는 뽀얀 속살, 이라면서 우리가 원하는..

좋은 시 2023.05.30

갈대 등본/신용목

갈대 등본/신용목 ​ ​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모의(謨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좋은 시 2023.05.30

막판의 자세 / 최형만

막판의 자세 / 최형만 ​ 참숯이 불판을 달구고 있다 조개는 숯불의 바람을 들어주려는 듯 턱턱거리며 제 몸을 풀어낸다 무지근한 비명에 통증을 세우고 소금기 가득한 바다를 벌리는 거다 물컹한 속살 내밀 때는 해풍에 실린 갯내의 기억에 따개비도 뜬눈으로 엿봤을 것이다 그늘진 길로 흘러든 갯물처럼 하얗게 껴입은 물꽃을 개흙으로 풀어내는 갯벌의 시간 신트림을 게우고서야 눈을 감았다 ​ 저문 빛에 올라탄 바닷새들이 남은 온기에 몸을 부비는 동안 해름의 물너울에 가라앉은 바다 나는 철 지난 물의 통점을 본 적이 있다 툭툭 치고 가는 갯바람에, 조가비도 저만치 두고 온 생의 바닥을 친친 감고 싶었을 것이다 녹슨 닻을 당기는 어부의 몸짓에 그을린 껍데기로 물때를 가늠하는 밤 짠 내 나는 죽음을 끌어안고 반달 같은 머리..

좋은 시 2023.05.11

팔손이나무*/윤명수

팔손이나무* 윤명수 비진도 팔손이나무는 여덟 개 손을 가지고도 늘 바쁘다 저 손은 난중일기를 썼던 이순신 장군의 붓이요 임진년 조선수군의 칼이요 액막이굿판을 벌리는 무당의 부채요 연애하는 순이의 붉은 입술이요 돌 문어를 잡아 올리는 해녀의 갈쿠리요 다랭이 논갈이를 하는 우직한 소의 뒷발이요 섬을 싣고 다니는 유모차 바퀴요 성난 염소의 뿔이다 비진도를 사랑하다가 비진도의 손이 되어버린 팔손이나무 그래서 사시사철 쉴 틈이 없다 *천연기념물 제63호

좋은 시 2023.05.09

단짝/김선태

단짝 김선태 다사로운 봄날 돌담 길을 늙은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가 꼬옥 팔짱을 끼고 서로 뭐라 뭐라 주고받으며 아장아장 걸어간다 순진무구의 시작과 끝인 저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이다 『짧다』, 천년의시작, 2022. --------------- 얼마 전에 광화문 한복판에 이 시가 걸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좋은 시를 알아보는 맑은 눈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겨울 이 시집을 전해 받고 단숨에 읽으며 밑줄을 그어 놓은 작품이어서, 퀴즈 정답이라도 맞춘 듯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이실직고하건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언뜻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당황했던 선명한 기억도 있다. 늙은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의 팔짱이라니. 어떻게 서로의 키가 맞을까 하는, 의심이 자꾸 기웃거렸다. “꼬옥 손..

좋은 시 2023.05.08

저녁 범종소리/김선태

저녁 범종소리 김선태 ​ 울리다, 적시다, 덮어주다, 쓰다듬다, 재우다 같은 동사를 앞세우며 간다 낮다, 길다, 무겁다, 둥글다, 느리다, 너그럽다 같은 형용사들이 뒤따라간다 희, 노, 애, 락, 애, 오, 욕으로 소용돌이치는 명사들도 모조리 끌어안고 간다 지이잉~징 징하게는 곡조를 뽑다가 터어엉~텅 속을 비우며 운다 저 소리 속에는 묵묵히 쟁기를 끄는 소가 있고, 못난 자식의 가슴을 쓸어주는 어머니의 손길이 있고,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지우는 강물이 있고, 온갖 번뇌를 잠재우는 고요의 이부자리가 있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껴안는 넉넉한 품이 있다 오늘도 만물의 귀소를 알리며 고단한 영혼들을 불러들이는 낮고 부드러운 음성 하나 긴 꼬리를 늘어뜨리며 저녁 들판을 기어간다 (김선태 시집, , 문학동네, 20..

좋은 시 2023.05.08

파문의 뒤끝/김정아

파문의 뒤끝/김정아 목이 지독히도 말랐던 걸까 품었던 허공을 놓고 싶었던 걸까 날벌레 한 마리 발 디딘 곳이 하필이면 책상 위 물컵 속이라니! 거울같이 잔잔하던 물이 덜컥 바동거리는 동심원에 놀라는 거였다 둥글게 둥글게 흔들리다 멈추고 멈추었다 다시 흔들리는 물살 지금 내가 선 이 자리도 어쩌면 젖은 날개 퍼덕이는 자리? 이런 나를 저 높은 곳에서 누군가 가만히 전구처럼 내려다볼 걸 생각하니 이미 첨벙 빠진 발, 빼는 것 또한 아늑한 숨결이어야 하리 새벽 물안개 속에서 슬그머니 첫 어리연꽃 피는 것처럼 ◇김정아= 경북 상주 출생, 계간 ‘문장’ 신인상 , 형상시학회, 대구시인협회, 문장작가회 회원,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시집 ‘채널의 입술’. 현재의 행복이나 불행이 늘 그대로 인 채 ..

좋은 시 2023.05.07

옥수수 대궁 속으로 / 신용목

옥수수 대궁 속으로 / 신용목 뒤안을 돌아보는 정오, 어머니 묻어둔 몇 점 곡알이 어느덧 옥수수로 처마의 키를 잽니다. 서성이던 마음이 시절을 타느라 고향의 한때 귀 나간 그림처럼 걸려 있는데, 구렁이도 참새도 떠난 이곳에 한낮의 볕이 내려와 순하게 덧칠을 합니다. 이 하루 한세월쯤 그저 보내도 좋을 곡식들, 흙 속에 무엇을 두고 와서, 몸 밖으로 쿡쿡 열매을 밀어내고 옥수수 늙은 수염을 몸빼처럼 펄럭입니다. 그 펄럭임의 대궁 속, 대처를 돌아온 자식이 세월도 바람도 아닌 그 깊은 속을 보고 싶어 까칠한 마디 슬며시 쥐었을 때, 나는 그만 대궁마다 가득한 어둠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상을 차린 어머니가 마당까지 나서 때 잊은 막내를 불렀지만, 나는 이미 어머니 캄캄한 몸 속에서, 간간이 늙은 음성이 어머..

좋은 시 2023.05.07

비계공의 달집/박철영

비계공의 달집 박철영 1미터 이십 센티의 철선을 엿가락처럼 잘 다루어야 하고 눈대중으로 어디를 휠 것인가와 발판의 간격을 정밀하게 배열 흩어진 두 개의 발판을 목덜미처럼 어루만지는 것 휘청대는 중심을 지지해 줄 허공과 허공을 목측으로 풀어낸 허수를 정수처럼 순간 나꿔 채 입력한 뒤 쓰러지지 않을 만큼 파이프를 꼬라박아 점 같은 구멍을 마술처럼 꿴다는 비계공* 바닥 빼곤 온통 하늘까지 텅 빈 천애의 무한 공간에 발판을 얹어 사람 키만큼 바닥을 높여가는 비계 작업 단 한 곳이라도 놓칠 때면 죽음이라는 허망한 끝을 볼 수 있어 철선으로 하나씩 곤한 몸을 틀어 매다 보면 거대한 구조물이 허방을 꽉 채우곤 하지 하루에 수도 없이 새 떼처럼 대오를 지어 망망한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 듯 눈으로 점을 찍어 채웠다 헐..

좋은 시 2023.05.06

대나무 시

대나무는 자신의 가장 외곽에 있다 끝이다 싶은 곳에서 끝을 끄을고 한 마디를 더 뽑아올리는 게 대나무다 끝은 대나무의 생장점 그는 뱀처럼 허물을 벗으며 새 몸을 얻는다 뱀의 혀처럼 갈라지고 갈라져서 새잎을 뽑아낸다 만약 생장이 다하였다면 거기에 마디가 있을 것이다 마디는 최종점이자 시작점, 공중을 차지하기 위해 그는 마디와 마디 사이를 비워놓는다 그 사이에 꽉 찬 공란을 젖처럼 빨며 뻗어간다 풀인가 나무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다 자신이 자신의 첨단이 된 자들을 보라 손택수(1970~) 바닷가는 뭍의 끝(시작)이면서 바다의 시작(끝)이다. 시작과 끝이 한 지점에 상존한다. 물 위를 걸을 수 없으니 배를 타야 하고, 배에서 내려 걸어야 한다. “뱀처럼 허물을 벗”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시인은 대나무 ..

좋은 시 2023.05.06

문경을 쓰고 문경을 읽다/권득용

돌을 읽다 황봉학 금 간 돌 하나 영강 모래톱에 조용히 엎드려 있다 금 간 몸으로는 더 흐르지 못해 그 자리에 멈추어 버린 것일까 꽁꽁 언 몸으로 죽은 듯 있다 등덜미에 새겨진 수없는 잔금들이며 모서리가 다 닳아버린 둥그런 몸 부서지고 쪼개지며 부대껴온 그의 내력을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누군가 속삭인다 영강의 어머니는 조령천이요 조령천의 어머니는 주흘산이요 주흘산의 뼈는 암벽이요 암벽은 이따금 무너져 내린다고 아아, 이렇게 조용히 금이 간 채 낯선 모래톱에 엎드린 저 주흘산의 뼈를 어찌해야 하나 석수만년(石壽萬年)이라 했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돌은 굳고 곧은 덕을 품은 절개의 상징으로 예부터 선비들이나 서화가들이 애지석지(愛之惜之) 해왔다. 시인 또한 “금간 돌 하나 영강모래톱에 조..

좋은 시 2023.05.01

고비의 저녁 / 김경윤 시인

고비의 저녁 김경윤 고비의 저녁은 모음의 나라 어스름이 하늘과 지평선의 경계를 허무는 시간이면 적막한 초원은 모음으로 가득하다 양떼도 낙타도 사막을 건너는 바람 소리도 고비에서는 모음으로 운다 아! 와 으! 사이 그 까마득한 광야에서 ㄴ자로 눕거나 ㄷ자로 걷는 짐승들이 말똥 같은 게르에 말똥구리처럼 기어든다 사막을 달리던 바람도 쉼표(?) 같은 게르에서 몸을 눕히는 저녁이면 각진 마음도 어느새 초원의 부추꽃처럼 부드럽게 돗자리를 깐다 우 우 우 쏟아져 내리는 별빛들을 내 고향 말로 쏘내기별이라 불러도 좋겠다 캄캄하고 막막한 고비의 밤 새끼 잃은 말처럼 나는 깨어나 이 붉은 별에 처음 왔던 조상처럼 무릎을 꿇고 어두운 지평선을 바라본다 오! 하늘과 땅 사이 까마득한 우주의 소리가 들린다 태초의 저녁처럼 모..

좋은 시 2023.04.29

한지(韓紙)/신달자

한지(韓紙) 신달자 저 허공의 질감이 어떻더냐 햇살 지나고 박살나는 피투성이 천둥 지나고 할퀴듯 사나운 폭풍 하며 연한 몸빛의 달빛 지나고 연한 쑥물 봄바람 지나고 그 다음에 늘씬하게 두들겨 태어나는 한지 종이의 질긴 정신은 죽음을 넘어왔다 세상이 뱉어내는 것들 다 안아 들인 그래서 낮은 보폭으로 깊은 침묵 안에 얼어붙는 겨울 대지에 쏘옥 고개 드는 싹 소리 없이 도도한 사람의 정신 여기 태어난다.

좋은 시 2023.04.29

경첩/정윤천

경첩 정윤천 너를 열고 싶은 곳에서, 너에게로 닿고 싶을 때 아무도 모르는 저 은밀한 해제의 지점에서 쇠나비 한 마리가 방금 날개를 일으켰다는 뜻이다 그의 차가운 두 닢이 바스락거리기라도 하듯이 한번은 펼쳐주어야만, 나는 너에게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너를 한번 열어, 너에게로 간다는 사실은 어딘지, 너 이전의 지점 같기도 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긴 날개의 쇠나비 한 마리가 비로소 활짝 펼쳐주었다는 일이다 사랑의 경계에는 한사코 쇠나비 한 마리가 접은 날개의 기다림으로 깃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좋은 시 2023.04.29

바람의 사원/김경윤

바람의 사원/김경윤 -미황사 시편1 영혼의 행려자들이 머물다가는 이 사원에 들어 한달포 머물러도 좋으리 남루를 끌고 온 오랜 노독을 풀고 고단한 일상의 구두를 벗어도 좋으리 바람의 거처에 가부좌를 틀고 사무친는 날이면 바람과 별빞이 다녀간 대웅전 기둥에 손가락이 남기고 간 지문을 읽듯 뼛속에 새겨진 비루한 생을 더듬어도 좋으리 추춧돌에 핀 연꽃 향기가 그리운 밤이면 사자포에서 기어 온 어린 게에게 길을 묻고 새벽녘엔 흰 고무신 헐렁한 발자국을 따라 숲길에 들어 밤새 숲이 흘린 피를 마셔도 좋으리 눈발이라도 다녀간 날이면 동백숲 아래서 푸른 하늘 길로 한 생애를 떠메고 가는 동박새의 붉은 울음소리 들어도 좋으리 새들이 날아간 자리마다 제 그림자를 무릎 밑에 묶어 놓고 참선에 든 나무들처럼 그대 나무 그늘에..

좋은 시 2023.04.27

성내동 옷수선집 유리문 안쪽/신용목

성내동 옷수선집 유리문 안쪽 ​ 신용목 ​ ​ 잉어의 등뼈처럼 휘어진 골목에선 햇살도 휜다 세월도 곱추가 되어 멀리 가기 어려웠기에 함석 담장 사이 낮은 유리 문을 단 바느질집이 앉아 있다 지구의 기울기가 햇살을 감고 떨어지는 저녁 간혹 아가씨들이 먼발치로 바라볼 때도 있었으나 유리 뒤의 어둠에 비춰 하얀 얼굴을 인화했을 뿐 모두가 종잇장이 되어 오르는 골목에서는 누구도 유리문 안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쩌다 새로 산 바짓단에 다리를 세우기 위해 오래된 동화책 표지 같은 문고리를 당기면 늙은 아내는 없고 실밥을 뱉어내는 사내가 양서류의 눈으로 잠시 마중할 뿐 엄지와 검지로 길이를 말하면 못 들은 척 아가미를 벌렁거릴 뿐 이내 사람의 바늘코에 입질을 단련시키기 위해 드르르르 말줄임표 같은 박음질을 한다 재봉..

좋은 시 2023.04.18

고통도 잘 튀겨지면 맛있다/정채원

고통도 잘 튀겨지면 맛있다/정채원 극장 뒤 모퉁이에는 뻥튀기를 파는 내외가 있다 강냉이를 한 줌 튀김 통에 집어넣고 돌려 가며 볶는다 바람 매운 날에도 콧등이 땀에 맺히도록 한참 돌리고 나면 뻥! 소리 없이 튀겨지는 삶도있을까 그 내외는 빠른 손놀림으로 뻥튀기를 크고 작은 자루에 담아 죽 늘어 놓는다 알갱이가 찌그러진 것, 귀가 떨어져 나간 것, 때깔이 뽀얗지도 윤이 나지 않은 것들도 튀겨지고 나면 얼굴이 환해진다 모두 풍성해진다 불지옥을 한 번 겪고 나면 너 나 할 것 없이 삶이 몇 길씩 깊어져 있다 집으로 가면 늘 튀겨지지 않은 삶이 그들을 기다리건만 오늘도 쉬지 않고 튀겨대는 그 내외의 앞을 사람들이 지나간다 외마디 소리 지르던 기억들은 저마다 한 봉지씩 들고 극장으로 들어간다 화면에는 스릴 넘치는..

좋은 시 2023.04.16

망둥어 국/김규성

망둥어 국/김규성 여든 여덟 어머니가 끓여주신 망둥어 국을 먹는다 평소 간간하던 간이 영 싱겁다 짠 것은 내 혈압에 해롭다는 지나친 염려 탓이시다 그런데 아무래도 통 몸통이 보이지 않는다 살점은 손자들 다 주고 엊그제 큰아들 떠나 하나뿐인 아들에게 설마 뼈다귀만 일부러 골라 먹이실 턱은 없는데, 아! 가뜩이나 어두운 눈에 전기를 아끼느라고 컴컴한 부엌에서 급히 큰놈을 고르다보니 애먼 대가리만 눈에 밟히셨구나 기막힌 魚頭一味 골라 낸 것들을 다시 천천히 발라먹는다 눈물이 한 방을 뚝 떨어져 마침 간을 맞춰준다 ―졸시 '망둥어 국' 전문 아직 젊은 형이 가고 나서부터 어머니는 급격히 기력을 잃으셨다. 그 부럽던 총기도 눈에 띄게 흐려지셨다. 그 것은 내게 있어서 설움이나 안타까움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

좋은 시 2023.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