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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바람의 사원/김경윤

에세이향기 2023. 4. 27. 02:56

바람의 사원/김경윤
-미황사 시편1

영혼의 행려자들이 머물다가는 이 사원에 들어
한달포 머물러도 좋으리 남루를 끌고 온 오랜 노독을 풀고
고단한 일상의 구두를 벗어도 좋으리
바람의 거처에 가부좌를 틀고 사무친는 날이면
바람과 별빞이 다녀간 대웅전 기둥에
손가락이 남기고 간 지문을 읽듯
뼛속에 새겨진 비루한 생을 더듬어도 좋으리
추춧돌에 핀 연꽃 향기가 그리운 밤이면
사자포에서 기어 온 어린 게에게 길을 묻고
새벽녘엔 흰 고무신 헐렁한 발자국을 따라
숲길에 들어 밤새 숲이 흘린 피를 마셔도 좋으리
눈발이라도 다녀간 날이면 동백숲 아래서
푸른 하늘 길로 한 생애를 떠메고 가는
동박새의 붉은 울음소리 들어도 좋으리
새들이 날아간 자리마다 제 그림자를 무릎 밑에 묶어 놓고
참선에 든 나무들처럼 그대 나무 그늘에 펼쳐 놓은 바람의 경전을
눈시리게 읽어도 좋으리 사라온 세월만큼
법어가 새겨진 그대의 몸은 어느새
바람의 사원이되리니 바람의 사원에 들어
달마의 이마를 치는 낭랑한 목탁 소리를 들어도 좋으리

 

저녁 종소리
-미황사 시편 2






해가 기울고 나무들의 그림자가 제 몸을 빠져나가는 저녁입니다 어둠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나무들이 바람을 부릅니다 바람은 제 안의 오랜 상처를 서쪽하늘에 풀어 놓습니다 하늘 끝까지 낭자한 바람의 혈흔이 수평선에 번집니다 향적당 툇마루에 오도카니 앉아 해인(海印)을 찾아가는 바람의 울음소리, 어느덧 어둠의 빗장을 여는 저녁 종소리가 숲을 흔듭니다 나무들은 묵언의 경배를 올리고 범종은 살을 찢어 소리를 만듭니다 어둑한 상처에 기대어 종소리를 듣는 저녁, 항아리 같이 텅 빈 몸속으로 소리가 쌓입니다 저녁 종소리가 무쇠 같은 어둠을 이마로 들이받을 때마다 어둠의 상처에서 별이 뜹니다 마음은 종소리를 따라 자꾸 산 아래 마을로 달려갑니다 종소리를 따라나선 마음은 이내 돌아오지 않고 별빛 아래 혼자 앉아 내 몸이 오래 품고 온 소리를 듣습니다 내 안의 상처가 풀어 놓은 저녁 종소리 먼 하늘에 별꽃으로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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