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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동 옷수선집 유리문 안쪽/신용목

에세이향기 2023. 4. 18. 12:14

성내동 옷수선집 유리문 안쪽

신용목

잉어의 등뼈처럼 휘어진

골목에선 햇살도 휜다 세월도 곱추가 되어

멀리 가기 어려웠기에

함석 담장 사이 낮은 유리

문을 단 바느질집이 앉아 있다

지구의 기울기가 햇살을 감고 떨어지는 저녁

간혹 아가씨들이 먼발치로

바라볼 때도 있었으나

유리 뒤의 어둠에 비춰 하얀

얼굴을 인화했을 뿐 모두가

종잇장이 되어 오르는 골목에서는

누구도 유리문 안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쩌다 새로 산 바짓단에

다리를 세우기 위해 오래된

동화책 표지 같은 문고리를 당기면

늙은 아내는 없고

실밥을 뱉어내는 사내가 양서류의 눈으로

잠시 마중할 뿐 엄지와 검지로

길이를 말하면 못 들은 척

아가미를 벌렁거릴 뿐 이내

사람의 바늘코에 입질을 단련시키기 위해

드르르르 말줄임표 같은 박음질을 한다

재봉틀 위에 놓인 두 개의 지느러미

에서 꼿꼿하게 가늘어진 바늘

갈퀴를 확인하며

나오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유리문 안엔 물결이 있다

부력을 가진 실밥이 떠다니고

실밥을 먹고사는 잉어가 숨어 있다

누구든 그 안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삶의 각질을 벗어 들고

물고기처럼 휘어져야 한다 때로 바람에

신문지가 날아와 두드린다

해도 그 문은 열리지 않는다 자주 세월을 들이면

잉어의 비늘이 마를 것이므로

틀니를 꽉 다물고 버티는 유리가 있다

젖은 바지를 찾아오는 날에는

부레에 잠겨 있던 강물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휘어진 골목 옆에 바느질집이 있다

성내동 사람들은 모두

종이처럼 얇아져 있었으므로

아무도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어항 속에 형광등이 휘어지듯이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휘어지는 걸음을 어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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