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는 자신의 가장 외곽에 있다
끝이다 싶은 곳에서 끝을 끄을고
한 마디를 더 뽑아올리는 게
대나무다
끝은
대나무의 생장점
그는 뱀처럼 허물을 벗으며
새 몸을 얻는다
뱀의 혀처럼 갈라지고 갈라져서
새잎을 뽑아낸다
만약 생장이 다하였다면 거기에 마디가 있을 것이다
마디는 최종점이자 시작점,
공중을 차지하기 위해 그는
마디와 마디 사이를 비워놓는다
그 사이에 꽉 찬 공란을 젖처럼 빨며 뻗어간다
풀인가 나무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다
자신이 자신의 첨단이 된 자들을 보라
손택수(1970~)
바닷가는 뭍의 끝(시작)이면서 바다의 시작(끝)이다. 시작과 끝이 한 지점에 상존한다. 물 위를 걸을 수 없으니 배를 타야 하고, 배에서 내려 걸어야 한다. “뱀처럼 허물을 벗”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시인은 대나무 마디에서 “최종점이자 시작점”을 발견한다. 해안을 닮은 마디는 “대나무의 생장점”이다. 외곽이자 끝에서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가까스로 뽑아 올리는 한마디에선 ‘삶의 치열’이 감지된다. 적응하지 못하면 또 다른 마디를 생성할 수 없다.
대나무는 “공중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까. 돈·명예·사랑…. 다 좋지만, 차지하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소중하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하루나 한 달, 일 년의 마디를 만들어 사는 동안 뱀처럼 사악한 적은 없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시인은 마디와 마디, 즉 끝과 시작 사이를 “젖처럼 빨며 뻗어”가는 대나무를 통해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윤선도의 ‘오우가’처럼 속을 비우고 곧고 푸르게 살라 한다. 그런 삶이 ‘첨단’이다.
대나무처럼 / 이산하
끝을 뾰족하게 깎으면
날카로운 창이 되고
끝을 살짝 구부리면
밭을 매는 호미가 되고
몸통에 구멍을 뚫으면
아름다운 피리가 되고
바람 불어 흔들리면
안을 비워 더욱 단단해지고
그리하여
60년 만에 처음으로
단 한 번 꽃을 피운 다음
숨을 딱 끊어버리는
그런 대나무가 되고 싶다
대나무 / 권달웅
곧은 대나무는
바람에 무수히 시달려도
중심의 줄기 하나로 살았다
많은 잔가지들 중에서
중심의 줄기 하나는
하늘로 하늘로 치솟았다
많은 대나무 가지들이
옆으로 옆으로 뻗었다
그래도 모든 어려움을
마디로 맺고 끊으면서 대나무는
중심의 줄기 하나로 살았다
무성한 대숲에서
대바람이 일었다
대밭이 바람에 흔들릴 때 / 조남익
키가 큰 대나무는
바람 잘 날 없어도
바람 타는 하늘에서
용솟음치는 깃발이 있다.
대나무는 일직선으로 큰다.
욕망의 내장은 아예 털어내고
뿌리털의 콘크리트에서 솟아오른다.
마음 비운 몸은 키만 큰다.
대밭이 바람에 흔들릴 때
깊숙이 희며 바람 먹고
허리 세우며 바람 뱉는다.
꺼질 듯 하이얀 숨소리의 휘파람.
나, 대밭에서 왔으리
나, 대밭에서 보냈으리
대밭이 바람에 흔들릴 때
하늘에 뜨는 울부짖음
흩어지고 뭉치는 바람속이 터지면
비로소 눈 뜨는 바다로 간다.
절망은 소스라쳐 놀라 절망을 깨고
짐짓 앉은뱅인 양 다시 돌이 된다.
어느 대나무의 고백 / 복효근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 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고목 / 복효근
오동은 고목이 되어갈수록
제 중심에 구멍을 기른다.
오동뿐이랴 느티나무가 그렇고 대나무가 그렇다
잘 마른 텅 빈 육신의 나무는
바람을 제 구멍에 연주한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아니랴.
수많은 구멍으로 빚어진 삶의 빈 고목에
어느 날
지나는 바람 한 줄기에서 거문고 소리 들리리니
거문고 소리가 아닌들 또 어떠랴.
고뇌의 피리새라도 한 마리 세 들어 새끼칠 수 있다면
텅 빈 누구의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
바람은 쉼없이 상처를 후비고 백금칼날처럼
햇볕 뜨거워 이승의 한낮은
육탈하기 좋은 때
잘 마른 구멍 하나 가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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