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읽다
황봉학
금 간 돌 하나 영강 모래톱에 조용히 엎드려 있다
금 간 몸으로는 더 흐르지 못해 그 자리에 멈추어 버린 것일까
꽁꽁 언 몸으로 죽은 듯 있다
등덜미에 새겨진 수없는 잔금들이며
모서리가 다 닳아버린 둥그런 몸
부서지고 쪼개지며 부대껴온 그의 내력을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누군가 속삭인다
영강의 어머니는 조령천이요
조령천의 어머니는 주흘산이요
주흘산의 뼈는 암벽이요
암벽은 이따금 무너져 내린다고
아아, 이렇게 조용히 금이 간 채 낯선 모래톱에 엎드린
저 주흘산의 뼈를 어찌해야 하나
금 간 돌 하나 영강 모래톱에 조용히 엎드려 있다
금 간 몸으로는 더 흐르지 못해 그 자리에 멈추어 버린 것일까
꽁꽁 언 몸으로 죽은 듯 있다
등덜미에 새겨진 수없는 잔금들이며
모서리가 다 닳아버린 둥그런 몸
부서지고 쪼개지며 부대껴온 그의 내력을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누군가 속삭인다
영강의 어머니는 조령천이요
조령천의 어머니는 주흘산이요
주흘산의 뼈는 암벽이요
암벽은 이따금 무너져 내린다고
아아, 이렇게 조용히 금이 간 채 낯선 모래톱에 엎드린
저 주흘산의 뼈를 어찌해야 하나
석수만년(石壽萬年)이라 했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돌은 굳고 곧은 덕을 품은 절개의 상징으로 예부터 선비들이나 서화가들이 애지석지(愛之惜之) 해왔다. 시인 또한 “금간 돌 하나 영강모래톱에 조용히 엎드려 있”다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존재에서 무한의 시간으로 견자(見者)가 아닌 관자(觀者)의 아포리즘을 원칙화하고 있다. 하여 “금간 몸으로는 더 흐르지 못해 그 자리에 멈추어 버린 것”은 아닐까 라며 “꽁꽁 언 몸으로 죽은 듯 있”는 돌의 생명을 자연의 경외심으로 바라보다 끝내 성치 않는 ‘금간 몸’을 안타깝게 염려하며 석보(石譜)를 적는다.
돌에 새긴 시는 자연과 시간의 기록이다. ‘금간 돌’하나를 통하여 시인은 우주 혹은 자연의 본성에 집중하며 추론의 규칙을 탐구하는 논리와 인식이 두드러진 돌의 방명록을 펼쳐본다. 바람과 하늘과 땅 그리고 구름과 비가 만고풍상의 프리즘으로 겹쳐지는 교집합으로 돌의 무게는 세월의 업보이다. 어찌 적정(寂靜)한 고태의 멋으로 그윽할 수만 있겠는가. “등덜미에 새겨진 수많은 잔금들이며/ 모서리가 다 닳아버린” 몽돌로 “부서지고 쪼개지며 부대껴 온 그의 내력”은 꼭 물어보지 않아도 될 불가지(不可知)이다. 그러나 세상에 아무리 꽃길만 걷는다 해도 사람들의 이마엔 주름이 지고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매일 바위를 지고 산꼭대기에 오르는 우리 삶의 그림자가 돌의 침묵에서 깨어져 나간 슬픔의 신화를 읽는다.
시인은 다시 상처투성이로 실향민이 된 ‘금간 돌’의 고향을 찾아 나선다. 영강의 어머니인 조령천을 따라 불정, 마성, 구량리, 진남교는 우리나라 수석의 보고지이다. ‘금간 돌’은 태초에 영강에 있던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의 뼈”였다. 뼈는 영혼의 거처(居處)가 아니던가. 그리하여 ‘금간 돌’은 주흘산이 만고(萬古)의 수행으로 빚은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된다. 이윽고 시인은 “이렇게 조용히 금이 간 채 낯선 모래톱에 엎드”려 고요함이 멎은 한겨울에 뼈의 모어(母語)를 시의 언어로 귀환시키고 있다.
돌에 새긴 시는 자연과 시간의 기록이다. ‘금간 돌’하나를 통하여 시인은 우주 혹은 자연의 본성에 집중하며 추론의 규칙을 탐구하는 논리와 인식이 두드러진 돌의 방명록을 펼쳐본다. 바람과 하늘과 땅 그리고 구름과 비가 만고풍상의 프리즘으로 겹쳐지는 교집합으로 돌의 무게는 세월의 업보이다. 어찌 적정(寂靜)한 고태의 멋으로 그윽할 수만 있겠는가. “등덜미에 새겨진 수많은 잔금들이며/ 모서리가 다 닳아버린” 몽돌로 “부서지고 쪼개지며 부대껴 온 그의 내력”은 꼭 물어보지 않아도 될 불가지(不可知)이다. 그러나 세상에 아무리 꽃길만 걷는다 해도 사람들의 이마엔 주름이 지고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매일 바위를 지고 산꼭대기에 오르는 우리 삶의 그림자가 돌의 침묵에서 깨어져 나간 슬픔의 신화를 읽는다.
시인은 다시 상처투성이로 실향민이 된 ‘금간 돌’의 고향을 찾아 나선다. 영강의 어머니인 조령천을 따라 불정, 마성, 구량리, 진남교는 우리나라 수석의 보고지이다. ‘금간 돌’은 태초에 영강에 있던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의 뼈”였다. 뼈는 영혼의 거처(居處)가 아니던가. 그리하여 ‘금간 돌’은 주흘산이 만고(萬古)의 수행으로 빚은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된다. 이윽고 시인은 “이렇게 조용히 금이 간 채 낯선 모래톱에 엎드”려 고요함이 멎은 한겨울에 뼈의 모어(母語)를 시의 언어로 귀환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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